[재미있는 일본(47)] 만요슈(萬葉集)

일본의 가장 오래된 시가집 '만요슈'(萬葉集)는 오랜 세월 수많은 연구자들을 때로는 즐겁게 하고, 때로는 괴롭게 했다.

4,500여수의 시가를 20권에 수록한 방대한 양도 그렇지만 '만요가나'(萬葉假名) 표기가 좀체로 완전한 해독을 허용하지 않는다. 언제든 새로운 해석의 장이 열려있어 연구의욕을 자극하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기 어려운 때문이다.

만요슈 해독의 어려움은 비슷한 시기에 흡사한 방법으로 씌어진 향가 해석의 어려움에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향가는 겨우 25수만 남았지만 양주동 박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체적인 해독이 이뤄졌다. 물론 그후에도 새로운 해석이 끊이지 않고 있어 정확한 해독은 여전한 과제로 남아있다.

만요가나는 향가를 표기한 향찰이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任隱)이라고 썼듯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적었다. 시기에 따라 한자음이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그나마 '아메'(阿米ㆍ하늘)나 '고코로'(許己呂ㆍ마음)처럼 한자의 소리를 빌린 표기는 해독이 비교적 쉽다.

한자의 뜻을 빌린 표기의 해독은 암호풀이에 가깝다. '구니'(國ㆍ하늘)나 '도후'(問ㆍ묻다)처럼 한자의 원뜻이 굳어진 것은 곧바로 풀리지만 한자 하나가 여러가지 뜻을 가진 경우 과연 어떤 뜻으로 표기한 것인지 애매해진다.

더욱이 장난기 섞인 표기도 지뢰처럼 깔려있다. '시시'(獅子)라고 쓰면 될 것을 일부러 '十六'이라고 써서 읽는 사람이 '4?=16'에 착안해 '시시'(四四)로 읽도록 하거나 '이즈'(出)를 '산 위에 또 산이 있다'(山上復有山)고 김삿갓처럼 쓴 예도 있다.

일일이 암호를 풀 듯 260여수의 장가(長歌)를 포함한 4,500여수를 읽어내는 작업이니 어려움이 클 수 밖에 없다.

물론 현재 남아있는 판본은 한자로만 씌어진 원본이 아니라 편찬자들이 원본의 한자 옆에 가나로 읽는 법을 달아둔 필사본이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잇따라 만들어진 이런 필사본은 해독의 실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가나로 씌어진 풀이가 현재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먼 옛말, 옛글이고 같은 노래를 필사본마다 다르게 풀이한 것도 걸림돌이다. 893년에 첫 신찬본을 만들면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가 "만요슈는 옛 노래여서 이미 읽을 수 없게 됐다"고 밝혔을 정도니 이후의 해독은 말할 것도 없다.

만요슈는 746~778년에 걸쳐 편찬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새로 씌어진 시가도 있지만 궁중과 지식층에 구전된 노래도 실렸다. 당연히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할 구전시가도 불과 115년만에 읽기 어렵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만요가나의 용도폐기다.

나라(奈良)시대(710~794)에 꽃핀 만요가나는 헤이안(平安)시대(794~1192)에 들어 가나에 밀려 쇠퇴를 거듭했고 9세기 중반에는 맥이 끊겼다. 만요가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향찰이 고려시대 들어 쇠퇴했던 과정을 연상시킨다.

시가 해독이 어렵다 보니 만요가나가 일본어 표기수단이라는 기본가정을 버리고 아예 한국어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이뤄지기도 했다.

편찬 당시 한반도계 도래인이 지배층을 형성한 만큼 한국어를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는 흥미로운 시도였지만 8세기 당시 한국어의 모습을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는 근본적 한계에 부딪혀있다.

현재의 경상도 사투리, 그것도 반쯤은 욕설로 해독해 대중적 인기를 끈 예도 있지만 언어와 역사에 대한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내용이다. 한반도계 도래인의 대부분은 가야ㆍ백제계가 차지했다.

가야ㆍ백제어의 연관성이 깊었고 경남 지역이 가야의 중심무대였으며 사투리에는 비교적 옛말의 흔적이 진하다는 점에서 경상도 사투리로 가야어의 모습을 더듬어보았다고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고대어에 대한 지식을 보여주지 못해 장님 코끼리 더듬기에 머물렀다.

태반을 음담패설로 해독,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떠받드는 일본인은 물론 만요슈 편찬에 깊이 관여한 한반도계 도래인까지 웃음거리로 만든 것은 악취미 치고도 심하다. 오랜 세월 불린 노래를 모아 길에 후세에 전한다는 뜻에서 붙은 만요슈라는 이름이나 궁중의례 등 공식행사에서 불린 노래가 많다는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만요슈의 시가에 대한 일본의 사랑은 이후의 보다 세련되고 정형화한 시가와는 달리 소박하고도 웅장한 기풍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대 필사본을 통해 언어 변화를 추적할 수 있는 자료의 보고이기도 하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1/02/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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