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김민기 노래모음(下)

김민기의 노래가 정치적 족쇄를 풀기에는 15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1972년에서 1987년까지 그의 이름으로는 어떠한 곡도 발표되지 못했다.

군복무 시절 '늙은 군인의 노래' 등 많은 곡이 '김아영'이란 가명으로 발표되었지만 언제나 그의 가슴에는 '금지'라는 명찰이 떡 하니 붙여졌다. 1972년 양희은의 2집 '서울로 가는 길'이후 시작된 악몽은 1987년 6월26일 겨우 기지개를 켜게 된다.

해금이후 김민기는 순수창작곡으로 공륜을 통과해 1987년 7월과 12월에 두 장의 LP음반을 발매하게 된다.

88 서울올림픽. 메달을 획득못한 선수을 위한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후에 '모래시계'로 유명해진 작가 송지나가 이 프로그램의 주제음악을 김민기에게 의뢰하여 '봉우리'라는 곡이 만들어진다. TV상영시 주제곡으로 쓰여졌던 이 곡은 여전히 얼굴없는 노래로 공중파를 타고 허공에 메아리쳤다.

해금이 되었다지만 여전히 '김민기'란 이름 석자는 국가적 행사의 주제곡을 만들었다고 발표하기엔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1993년 2월15일 김민기는 '작은 연못'(연주곡)을 포함, 40곡이 수록된 '김민기1-4. 서울음반. 음반번호SPDR331-4' LP들을 2년간의 기획준비기간을 거쳐 발표한다. 2년뒤인 1995년6월 같은 내용의 CD도 발매한다.

이 음반 발매시 각 매스컴은 "김민기 노래의 제 모습을 찾았다"(동아일보 1995년 6월29일자), "시대변화 절감, 김민기 음악 결산전집 나온다"(중앙일보1993년 3월4일자)는 등 호들갑을 떨었다.

"70, 80년대 내내 정치적 억압과 자본주의의 퇴폐성에 눌려있다가 뒤늦게 빛을 보게 된 작품이 이 시대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는 김민기의 감회어린 소감 뒤엔 경제논리가 분명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모든 곡을 정규녹음실에서 할 수 없어 "음악친구들의 작업실을 전전하며 때론 24트랙은 고사하고 아나로그 4트랙으로 겨우 녹음을 했다"고 김민기는 고백했다.

세션맨으로 참여했던 김광민의 피아노 튜닝이 잘못되어 고쳐가면서 녹음을 했다하니 그야말로 난산 끝에 출산한 음반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가 자세히 음악을 듣다보면 차 지나가는 소리, 심지어 개짖는 소리까지 희미하게 들릴 지경이다.

2년여동안의 고초 끝에 빛을 본 김민기의 이 전집음반은 구전으로만 알려지거나 공륜의 심의거부로 음반에 수록하지 못한 것, 작사ㆍ작곡자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발표되거나 다른 가수의 목소리로 알려졌던 노래 등 40곡을 총망라한 소중한 음반이다. 1971년의 초판에 비해 그의 목소리는 이제 중년의 지독한 저음이 되었다.

녹음작업에는 고인이 된 김광석 외에 조동익 김광민 안치환 한영애 이병우 노영심 등 많은 가수와 세션맨 그리고 어린이들이 기꺼히 참여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음악적으로 다양하고 실험적 음반이 탄생할 수 있었다.

1집은 거의 김민기 본인의 연주노래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가을편지'(작사 고은)에선 요즘 최고의 기타 뮤지션으로 명성을 날리는 이병우의 차분하면서도 화려한 선율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문제가 되었던 '꽃 피우는 아이'와 송창식 작곡의 '내나라 내겨례', 그리고 '아침이슬', '친구', '그날'도 1집의 레퍼토리다.

경쾌한 휘파람 속에 여행스케치 등 10여명의 후배들과 합창한 '그 사이', 안치환과 함께한 '아무도 아무데도', '눈산', 김광석의 하모니카가 빛나는 '길', 조동진의 동생이자 어떤 날의 리더였던 조동익과 어우러진 '혼혈아', 장필순 한동준 손진태 등과 최신감각으로 노래한 '철망 앞에서' 등. 2집은 음악후배들과 한마음으로 작업한 앨범이다.

3집도 후배들과 함께 한 앨범으로 1980년대 운동권에서 가장 애창되었던 타령조의 '가뭄', 합창곡으로 꾸며진 '늙은 군인의 노래'가 눈길을 끈다. 김지하가 작사한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순수한 어린아이 목소리와 중저음의 김민기 낭송이 소름끼치는 불협(?)의 감동을 준다.

한영애의 절규와 읊조리는 김민기의 하모니가 압권인 '기지촌' 또한 추천하고 싶은 노래다.

4집. 기타, 신디사이저 연주와 편곡까지 도맡아 한 김광민의 재능이 돋보이는 '봉우리'는 명곡이 아닐 수 없다. 늘 김민기가 그리고 이미지화했던 동심의 마음. 이지윤 어린이의 목소리로 자신의 영혼을 대신한 채 그저 허밍만을 하는 '백구'. 그리고 '인형'. 콧등이 시큰해오는 감동을 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음반이 아닐까!

"제 노래를 아는 사람에게는 좋은 추억이 되고 제 노래를 경험하지 못하고 자란 신세대에겐 지금의 기성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란다"는 김민기의 바램.

이제 대중문화의 시장 한가운데 선 김민기는 10대, 20대에게는 잊혀져가고 있지만 앞으로도 "상업적이고 말초신경이나 자극하는 작금의 대중문화에 하나의 대안의 문화활동을 펼쳐나가고 싶다"고 수줍게 이야기한다.

김민기는 '지하철 1호선', '모스키토'로 이어지는 일관된 뮤지컬 작업으로 1970년대와는 다르게 이 시대를 치열하게 대응하고 있다. 최근 성사된 록뮤지컬 '지하철1호선'의 성공적인 독일공연과 영원히 '꽃 피우는 아이'로 상록수처럼 변하지않는 그의 모습을 꿈꿔본다.

최규성 가요음반컬럼리스트

입력시간 2001/02/2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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