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딸을 위한 아빠의 사랑과 범죄

■ 라이미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에게 2001년은 잊을 수 없는 해가 될 것 같다. 줄리아 로버츠가 열연한 실화극 <에린 브로코비치>와 최고의 작품성을 인정받은 <트래픽>을 동시에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로 올릴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기 때문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의 재능에 대한 의혹을 말끔히 씻어줄 수 있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소더버그 감독은 단 8일만에 시나리오를 쓰고 녹음, 믹싱, 편집까지 해낸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로 1989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으면서 떠들썩하게 데뷔했다.

그때의 나이가 26살. 조숙한 천재로 추켜올려진 소더버그는 프란쯔 카프카의 하루를 창조적으로 해석한 <카프카>, 공황기를 배경으로 한 소년의 성장기 <리틀 킹>, 플레시백을 활용한 느와르풍의 <언더니쓰>와 같은 수준작을 내놓았지만 데뷔작의 반향이 워낙 큰 탓인지 이렇다할 평가를 받지못했다.

1998년 납치범과 사랑에 빠지는 여경찰 이야기 <조지 클루니의 표적>으로 다시 주목받은 소더버그는 <에린->과 <트래픽>으로 평단을 완전히 제압하게 된 것이다.

소더버그가 1999년에 발표한 <라이미:The Limey>(18세 등급, MV-net)는 영화 <카프카>의 시나리오를 맡았던 렘 돕스와 다시 손잡고 만든 범죄영화다. 제목 '라이미'는 영국 수병에게 괴혈병 예방을 위해 라임주스를 준데서 유래한 미국 속어로, 미국 해병이 영국인을 지칭할 때 주로 쓰는 말이라고 한다.

딸 제니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미국까지 날아온 초로의 사나이 윌슨(테렌스 스템프). 강한 악센트의 영국 사투리를 건조한 음색에 담아 내뱉다시피 하는 무표정한 사나이.

무장강도로 9년을 복역한 끝에 막 출옥했다. 보석을 도적질해서라도 아내를 기쁘게 하고팠던 그는 일찍 어미를 잃고 혼자 크다시피한 딸의 죽음 앞에서 한없이 냉정해지는가 하면, 과거의 기억과 회한에 가슴이 허전해진다.

윌슨은 배우를 지망했던 딸과 함께 연기수업을 들었다는 에드(루이스 구즈만)와 일레인(레슬리 앤 워렌)의 도움을 받아 딸의 애인이었다는 테리(피터 폰다)에게 접근한다. 테리는 유명한 로큰롤 프로모터로 산을 내려다보는 수영장이 딸린 저택에서 살고 있다.

영화 <라이미>가 노련한 범죄영화가 된 것은 테렌스 스템프와 피터 폰다의 출연 덕분이다.

1939년생인 이들은 1960년대의 영국과 미국 영화에서 기성 세대에 도전하는 젊은이로 출연하여 청춘의 아이콘이 되다시피 했다. 스템프의 1960년대 대표작은 <빌리 버드> <콜렉터> <푸어 카우>로, 폰다는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히피로 분했던 <이지 라이더>로 청년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라이미>에서 윌슨이 비틀즈 스타일로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는 장면이나, 테리의 다음과 같은 대사는 두 배우의 과거 이미지를 멋지게 활용한 것이라 하겠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곳을 꿈꾸어본 적이 있나? 먼 곳, 잠에서 깨어난 듯 반쯤 망각된 곳, 언어도 필요없는 곳이 우리의 60년대였지."

스템프는 1980년작 <수퍼맨>의 악역 조연으로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고, 폰다는 1997년작 <율리스 골드>의 벌치는 노인으로 기적적으로 재기했다.

삶의 그늘을 보여주는 주름진 얼굴과 나이가 믿기지 않는 날랜 몸매를 가꿔온 두 배우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영화가 <라이미>다. 회한으로 가득찬 내용과 방금 전에 일어난 사건까지 플래시 백으로 오가는 편집의 묘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옥선희 비디오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1/03/06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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