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대란'에 가위 눌니다

기업들 비적정의견 받을까 전전긍긍

대우그룹의 몰락과정에 나타났던 분식(扮飾)회계가 '회계대란'으로 탈바꿈해 망령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다.

지난해 대우 분식회계로 산동 회계법인이 아예 문을 닫고 또 "분식회계로 손실을 입었다"며 회계법인을 상대로 한 소송이 봇물을 이루자 회계법인이 깐깐한 회계감사를 선포하고 나선 것.

기업들로서는 더이상 회계장부를 부풀리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셈인데 지금까지 관행화한 분식회계를 당장 올해부터 근절하고 기업의 살림살이를 투명하게 내보이자니 자금조달 애로와 주가하락 등 피해가 만만치 않다.

때문에 회계장부를 감사하는 회계법인과 실랑이를 벌이느라 주총 일정까지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항간에 떠도는 회계대란의 여파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회계대란, 이미 시작됐다

기업이 한해동안 사업을 통해 거둔 실적을 투자자와 시장에 공개하는 것이 회계장부로 통하는 재무제표. 자본금 70억원 이상 기업의 회계장부에 대해서는 외부감사인(주로 회계법인)의 감사를 받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분식회계가 말썽이 됐던 것은 회계법인이 기업체의 요구를 받아들여 실적을 부풀리고 채무를 줄이는 농간을 눈감아 줬기 때문.

그러나 지난해 대우그룹 분식회계 사건 이후 회계법인의 자세가 돌변했다. S회계법인의 J상무(38)는 "1억원의 수임수수료를 받으려다 부실감사로 적발되면 수백억원의 소송에 휘말리는 현실에 누가 감히 위험을 감수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빅5 회계법인들은 부실징후가 명백한 기업에 대해서는 철저히 사전조사를 실시하고 위험도가 높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수임 자체를 거절하는 형편이다.

회계법인이 빼든 생존을 향한 비장한 칼날은 정기주총을 앞두고 회계감사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기업의 발등으로 떨어졌다.

3월 중ㆍ하순에 주총을 소집하는 대부분의 12월 결산법인들은 보통 2월 말이면 주총 일정을 확정해 공시를 통해 밝히게 되는데 2월말 현재 12월 결산 574개 상장법인 가운데 절반 이상이 주총 일정을 잡지 못했다.

이유는 회계법인의 감사보고서를 두고 의견조율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섬유업체인 A사의 경우 누적적자 처리 문제로 아직 회계법인에 재무제표를 넘겨주지 못해 3월 말 주총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을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다.


부정적의견 의견거절두배이상 증가할 것

감사인이 기업체의 회계장부에 대해 회계기준에 따라 적정하게 작성됐는지 여부를 판정하는 것이 결산기 주총 직전에 공시를 통해 밝히는 감사보고서.

감사보고서에는 적정, 한정, 부적정, 의견거절 등 감사인이 판정한 네 가지 의견 가운데 하나가 첨부돼 투자자들이 투자에 참고하는 주요한 텍스트가 된다.

적정의견은 기업이 회계기준에 따라 제대로 장부를 작성했다는 의미이고 한정의견은 일부 오류, 부적정의견은 중대한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의견거절은 회계장부의 적정성을 판정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해당기업이 협조하지 않아 의견을 낼 수 없다는 의미다.

상장ㆍ등록기업이 이 가운데 부적정의견과 의견거절을 받게 되면 바로 관리종목으로 편입되게 된다. 또 금융기관 등으로부터 무보증회사채 발행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불이익도 받게 된다.

부적정의견, 의견거절이 올해는 예년의 최소 두배 이상 증가할 것이란 전망이다.

삼정회계법인의 옥민석 상무는 "결산기업들은 현실적 제재가 없는 한정의견이라도 달라고 애원하지만 더이상 감사의견을 타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라며 "지난해 비해 최소 두배 이상의 부적정, 의견거절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의 최수미 연구원도 "지난해 12월결산 상장법인 가운데 부적정이나 의견거절을 받은 업체는 2.7%인 15개사였지만 올해는 10%로 증가할 전망"이라고 예측했다.

부적정의견이나 의견거절은 받으면 당장 해당기업은 신용등급의 하락이 불가피하고 자금조달에 애로를 겪게 된다.

또 관리종목으로 편입됨으로써 주가하락도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같은 판정이 대규모로 속출할 경우 증시에 무더기 관리종목이 한꺼번에 나타나 시장에 충격을 줄 있다는 우려다.

증시전문가들은 "부실회계 기업이 대규모로 나타난다면 적정으로 판정나는 기업에 대한 불신도 커질 것"이라며 "회계대란으로 투자심리가 약화할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다.


분식회계 근절방안은 없나

금융감독원은 최근 분식회계의 근절을 위해 "지금까지 이뤄졌던 분식회계에 대해서는 기업체와 회계법인을 일시적으로 사면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던 회계전문가를 인사조치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중대한 사안에 대해 보고계통을 거치지 않고 외부에 공표했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파장이 예상되는 논란거리를 조기에 수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사면을 정책적으로 결정할 경우 그동안 정당하게 회계장부를 작성하고 감사를 실시한 기업체나 회계법인과의 형평성 문제가 당장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지금까지의 부실회계 관행에 대해서는 일시적으로 고리를 끊는 과감한 시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회계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부실회계 근절방안' 보고서에서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누적부실을 대청소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고 관련 기업과 외부감사인에 대해서는 올 한해동안 면죄부를 주는 정책적 결단이 필요하다"며 "과거의 부실에 대한 새 출발의 기회가 부여될 때만 과거와의 단절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물론 이외에 기업의 내부통제 기준 강화와 감사인의 독립성 증대 등의 갖가지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회계장부를 작성하는 기업의 건전한 경영마인드가 형성되지 않는 한 구호성 방안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때문에 이번 회계대란을 오히려 부실회계를 근절하는 분수령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영화회계법인의 윤창환 대표는 "부실회계를 강행해 상당한 피해가 예상되는 부적정의견이나 의견거절을 받기보다 손실을 투명하게 드러내 투자자의 정당한 심판을 받겠다는 인식의 변화가 일부 기업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곤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1/03/06 18:20


김정곤 경제부 kimj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