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스타열전(51)] 디지털 드림 스튜디오 이정근 사장(下)

"IMF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었죠. 사업하는 사람에겐 부도 위기로, 직장인에겐 실업 공포로, 가정주부에겐 살림살이의 쪼들림으로 머리에 남아있을 것이고, 우리 사회 전체로는 기존의 모든 사고나 논리, 행위가 IMF로 인해 부정되는 현상이 벌어졌어요.

디지털드림스튜디오(DDS)도 마찬가지여서 과거와 같은 생각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IMF 위기는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던 이정근 사장에게 새로운 도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뭔가 바꾸고, 방향을 재정립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도 던져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DDS는 첨단 미디어 컨텐츠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전문제작업체.

비록 DVD와 같은 첨단 멀티미디어 컨텐츠와 3D 게임 등을 국내에 소개하는 회사로 성과를 올렸지만 계속해서 잡화점식으로 갈 수는 없었다. 이 사장은 과감히 정리하기로 했다.


디지털로 전환후 엔지니어 키우는데 전력

"다른 건 버리고 디지털 애니메이션 분야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단을 내렸지요. 디지털시대가 곧 닥쳐올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는데 다행히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디지털은 또 각 매체별 경계를 허물어버렸어요. 기술발전과 함께 초보적인 디지털 애니메이션은 3D 게임으로, 만화영화로, TV용 3D애니메이션으로 분화하고 넓어졌고 저희는 재빨리 새 흐름을 탈 수 있었습니다."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비즈니스 방향을 튼 뒤 DDS는 제품을 내놓기보다는 여주에 있는 청강대학에 입주해 전문 엔지니어들을 키웠다. 동시에 관련 기술과 장비를 확보해 스튜디오 건설에 들어갔다. DDS측으로서는 인고의 세월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늘을 지탱하는 밑거름이 됐다.

1999년 2월. DDS는 마침내 국내에서 처음으로 디지털 스튜디오를 완공하면서 또한번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한겨레 정보통신이란 간판도 5년만에 내리고 디지털드림스튜디오로 바꿔달았다.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적절한 조화가 필수조건이지요.

그중에서도 엔지니어의 능력이 생명인데 우리에겐 스스로 키운 전문 애니메이터가 200여명입니다. 그래서 디지털 제작능력은 아시아권에서는 최고이고 세계적으로도 10위권 이내입니다."

이 사장의 말은 허튼 소리가 아니다.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DDS의 스튜디오엔 모션캡쳐 스테이지와 렌더 팜(render farm) 등 비주얼 컴퓨팅 기술과 장비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만화적인 소재를 첨단매체에 응용

'꿈의 세계'를 창조하는 아이디어는 어릴 때부터 만화광이었던 이 사장의 몫이다. 그의 사무실에는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자료가 널려있다.

그는 주로 독고탁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상무를 비롯해 허영만, 황제 등과 같은 만화작가들과 함께 자랐다고 했다. "주로 비행기 안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편입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편안하게 만화책을 보거나 노트북을 통해 DVD 만화를 볼 수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그가 탄 비행거리는 150만 마일 정도. 단순계산으로도 지구를 60~70바퀴를 돈 거리다. 그 시간에 그는 만화적인 소재로 새로운 첨단매체에 응용하는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요즈음은 '싱글 컨텐츠에 멀티 매체'가 유행이다. 하나의 소재를 잡으면 그것으로 게임도 만들고, 만화영화도 만들고, 3D애니메이션도 제작하고, 그러다 히트를 치면 그 주인공을 내세운 캐릭터 사업을 벌이는 식이다.

DDS의 이름으로 내놓은 작품은 연거푸 히트를 쳤다.

2000년 2월에 출시한 골프게임 '타이거우즈 PGA 2000'은 1년만에 200만개 이상의 판매기록을 세웠고, 플레이스테이션2(PS2)용 게임으로 출시한 '런딤'은 게임종주국인 일본에서도 기술력과 제작능력을 인정받았다. 런딤은 이제 TV용 3D 만화영화(13부작)로 만들어져 올해 4 월부터 일본의 주요 방송을 탈 예정이다.

DDS는 현재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인 오우삼을 내세워 극장용 애니메이션 '아크(Ark)'를 제작중이다. 아크는 400여년 전과 현재를 배경으로 은하계의 한 행성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는 SF 환타지 영화다.

DDS에서 올해 최대의 화두는 유명한 온라인 게임인 리니지의 3D애니메이션 제작이다. 리니지는 극장용과 TV용으로 나눠 제작되는데, 26부작 TV 시리즈에 필요한 종합계획과 디자인이 완성됐다. 4-5월이면 본격 제작에 들어가 2002년 봄이면 극장과 안방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이 사장은 "리니지의 사업 전망에 대해 회의를 갖는 사람도 있지만 영화로 만들어지면 기존의 만화나 온라인 게임과는 차원이 다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만화나 게임보다 더 화려하고, 스케일이 웅장해 블록버스트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적극성에서 오는 위험, 성실함으로 보완

그렇다면 그의 성공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패기와 도전정신, 그리고 신뢰라고 한다.

그러나 요즘 와서는 연륜도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우리 조직의 평균연령이 27세입니다. 패기에 넘치지요. 그러나 그만큼 리스크가 커요. 연륜도 필요한 시기라고 봅니다.

요즘 벤처들은 대개 연륜을 깡그리 무시하고, 조금 잘 되면 그게 다 자신의 실력덕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사업은 운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야만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의 능력은 역시 시장을 보는 눈이다. 2D에서 3D로의 변화 흐름을 잘 포착한 게 대표적.

그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를 적극적인 사람으로 분류한다. 적극적인 만큼 위험도 따르지만 그것을 성실함으로 보완한다고 했다.

이 사장은 아직 3D애니메이션 분야를 온라인으로 서비스할 생각은 없다. 수익창출 방식에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을 철저하게 수량적으로 검증하는 그의 경영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익도 손해도 숫자화할 수 없으면 결정을 내리지 않는 편이지요. 숫자로 따져보면 리스크는 리스크대로, 수익은 수익대로 더 피부에 와닿게 됩니다. 영어로 '로스(loss)도 캘큐레이트(calculate)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을 지킵니다."

그는 지난 10년간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낸 시간을 3일 정도라고 기억한다. 아직도 일요일 오후부터는 회사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는 형이다. 월요일 새벽에는 거의 잠도 못잘 정도. 빨리 그만두고 싶다는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DDS를 월트디즈니나 소니엔터테인먼트 같은 종합적인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키울 때까지는 그만둘 수 없다. "당장은 월트디즈니가 되지 못한다 해도 후배들이라도 목표를 이룰 수 있게 그 길만큼은 확실히 닦아놓겠다"는 게 이 사장의 당찬 포부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1/03/06 18:53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