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국회의원 보좌관 정찬수

"그림자 인생이지만 나는 진정한 프로"

"우린 이름이 없습니다.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게 싫다면 이 일을 시작하질 말았어야죠."

벌써 15년째다. 국회의원 보좌관 정찬수(43). 그의 15년은 일반 직장인의 15년과 다르다. 공무원은 공무원이지만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외줄 위의 공무원.

선거 때마다 사활의 경계선을 뚫고나왔다. 보좌하는 국회의원의 한마디면 당장이라도 밀려날 수 있는 위치다. 억울하다고 항변할 곳도 없는 냉정한 프로의 세계. 그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15년이나 한길을 지켰다.

선량(選良) 중에서도 흔치 않은 연속당선 5선의원을 보좌하게 된 것부터가 복이라면 복이고, 그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1,600여명에 이르는 국회의원 보좌진중에서도 상위 랭킹 10위권안에 드는, 관록의 베테랑이다.

요즘도 출근시간은 새벽이다. 6시반쯤 집을 나서 7시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도착한다. 그는 한나라당 정재문 의원을 보좌하고 있다. 의원회관 340호가 사무실이다. 들어서자마자 각종 일간지에다 외신, 지역구인 부산의 지역신문까지 모두 체크한 뒤에야 워밍업이 끝난다. 일반 회사원은 채 출근하기도 전, 그는 그날치의 문서작업까지 모두 끝낸 뒤다.


민원인들의 분노 섞인 하소연 듣는일 허다

그외엔 사람과 부대끼는 일이 주된 일과다. 의원실로 걸려오는 외부전화만 하루 100여통. 의원과 연결되는 모든 보고와 외부연락은 최종적으로 그를 거쳐나간다. 직접 찾아오는 민원인도 적지 않다. 열이면 아홉, 이미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이들이다.

청와대와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 다닐 곳은 다 다녀본 뒤다. 그 역시 도와주고 싶어도 해결이 어려운 문제가 대부분이다.

최근엔 '예비군 보상법' 문제로 예비군 중대장들이 매일 출근이다. 전두환 정부 시절 해직된 사람들이다. 몇몇은 아예 복도끝 의자에 와서 산다. 하루 두번씩 들러 인사도 하고 때론 음료수까지 내민다. 별 말도 없다. 그게 더 무섭다. 다혈질 방문객이라도 들르는 날은 대소동이다.

바깥에서 분통이 터질대로 터져들어온 상태다. 공연히 그들에게 멱살을 잡혀 애꿎은 봉변을 당하는 보좌관도 익히 보았다. 발끝만 보고도 지레 달아나는 직원까지 생긴다. 이런 방문객에겐 공통된 특징도 있다. 지난번에 했던 얘기를 올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리바이벌한다. 주로 '나쁜 놈' 리스트다.

조용히 듣는게 상책이다. 평소에도 친절한 응대로 소문난 그다. 분노는 30분쯤 지나면 가라앉는다. 아무도 자신의 억울함을 몰라준다는 답답함, 그것이 분노의 핵심이다. 도움을 줄 수 없어 안타깝긴 그도 마찬가지다. 해결방법이 없을 땐 그 자신도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다.

언젠가 군에서 의문사를 당한 아들의 사인규명을 위해 찾아왔던 한 어머니.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알아봤지만 찾아온 시점이 너무 늦어 더이상 손쓸 여지가 없었다. 나중엔 "너도 똑같은 놈"이라며 그에게 화살이 돌아왔다. 정말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아닌가 한동안 죄의식을 느끼기까지 했다.

국회의원 1인당 소속된 보좌진은 전부 6명. 4급 보좌관 2명을 비롯해 그의 방엔 5, 6, 7, 9급 비서관 네명이 팀을 이뤘다. 한 사람의 국회의원이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건 다 이들의 보이지 않는 공이다.

일인다역도 이만한 다역이 없다. 의정활동부터 정당행사, 심지어 경조사까지 전방위로 뛰어야 한다. 연설문, 홍보문의 작성은 기본이고 민원, 고충처리에서부터 지역구 관리 등 챙겨야 할 일이 사방에 널렸다. 동시에 의정활동과 관계된 모든 뉴스에 항상 촉각이 서 있다.


국정감사때는 '전사', 전문가 수준의 상임위 활동

특히 의원의 상임위 활동은 곧 보좌관의 전공. 정 의원이 속했던 외교통일과 국방위 활동을 지원하는 동안 그도 얼추 전문가가 다 됐다. 웬만한 문제는 어디서 어떻게 접근해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 지 한눈에 감이 잡힌다.

현장경험은 물론, 사무실에 빽빽한 행정ㆍ법률 책 더미속에서 10여년 노력해온 결과다. 홍보전략이라면 더 도사다. 보도자료로 낼 의원 관련 소식이라도 1단짜리 기사인지, 박스기사감인지 보내기도 전에 짚힌다. 제목도 섹시하게, 직접 쓴 홍보문구는 전문 카피라이터도 아쉽지 않다.

정보를 수집할 땐 수사관이나 다름없다.

특히 대외비가 주종인 국방분야는 드러내놓고 일하지도 못한다. 필요한 정보는 직접 학자나 기자 등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비밀리에 얻어낸다. 시종 007작전을 방불케 한다. 접촉사실조차 덮기 위해 만날 약속도 사무실 아닌 공중전화를 이용한다. 복도를 지나다말고 불쑥 아무 방에나 들어가 전화를 빌려쓸 때도 있다. 정 급하면 친구의 핸드폰도 빌린다.

국회의원 개인의 역량이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국정감사 때는 특히 보좌관들에게 전시(戰時)나 다름없다.

결론은 극과 극. 얼마나 치밀하게 정보를 수집, 의원을 지원하느냐에 따라 본인에겐 위기가 될 수도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한달 열흘 집구경을 못해봤다는 보좌관도 이 기간에는 수두룩하다. 그도 수차례 겪은 일이다. 잠은 사무실 소파에서 웅크려잔다. 열심히 뒤진 끝에 '특종'이라도 잡았을 땐 남모르는 흥분도 느낀다.

대정부 질의를 비롯해 의원의 단상발언을 빛낼 비장의 무기다. 문제는 발표 직전까지의 보안이다. 이럴 땐 친구도 몰라본다. 치사할만큼 철저한 경계태세다.

한창 문서를 작성하다가도 외부인만 어른거리면 올스톱이다. 책상 위에 떠도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자료거나 교란용 문서다. 컴퓨터엔 아예 위장용 화면까지 미리 띄워뒀다가 유사시 번개같이 화면을 바꾼다. 자리를 뜰 때마다 문서는 캐비넷에 넣고 잠근다.

마침내 현장에서 터뜨릴 땐 그만한 희열이 없다. 국민으로부터 더 많은 박수와 관심이 의원에게 쏟아지게 하는 것, 그게 보좌관의 성취감이다.

1987년 육군 석사정훈장교로 복무하다 제대한 직후 그는 예정에 없던 의원 보좌관이 되었다.

외국어대 정치외교학 석사 출신. 정 의원은 그의 은사와 각별한 친분이 있어 오래전부터 그와 인연이 있었고, 제대후 인사차 들른 길에 보좌관 일을 제의받았다. 막 시작하려던 박사과정을 포기했다. 어차피 정치공부에 뜻을 품은 길, 현장 한가운데서 일을 배우는 것도 의미있어 보였다. 민주화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박사과정 포기하고 뛰어든 '고단한 길'

12대는 야당이었던 신민당에서 출발했다. 당시엔 보좌관이란 명칭도 없었다. 전체 의원비서중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는 그를 포함해 단 네명. 당시로선 눈에 띄는 고학력자였다.

예상대로 몸도, 정신도 힘든 일 일색이었다. 대학재학시에도 운동권이었던 그는 일만 터지면 양복을 입은 채 달려나가 의원들과 스크럼을 짜고 광화문을 누볐다.

그리고 대학에서도 한번 배운 일없는 영문편지 쓰는 법도, 전화 응대하는 법도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하루빨리 인정을 받기위해 토요일 일요일도 스스로 나와 밤늦도록 일했다. 정재문 의원은 경기고와 버클리대를 졸업한 인텔리.

그러면서도 인품이 자상해 언?은 기색 한번 없이 서툰 그를 조목조목 가르쳐주었다. 아랫사람을 키워줄 줄 아는 의원을 만난 건 분명 행운이었다. 지금까지도 상관이라기보단 아버님처럼, 스승처럼 모시는 남다른 관계. 15년간 한결같은 팀웍을 유지해온 것도 주위에선 부러움의 대상이다.

정 의원의 행보 그대로 신민당, 신한국당을 거쳐 현재의 한나라당에 이르기까지 여야 생활을 모두 경험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보좌관으로선 큰 차이랄 게 없었다.

오히려 여당 때는 여당이라 답답할 때가 더 많았다. 도무지 야당 때와 같은 직격탄이 먹혀들지 않는 것이다. 조금만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면 "같은 편끼리 왜 그러느냐"며 눙치려 들었다.

총선 4회, 대선 3회, 선거엔 귀신이 다 됐다. 지방선거까지 합치면 그간 겪은 선거만 줄잡아 십여회다. 13대 국회의원선거 땐 특히 아찔했다. 경쟁후보가 막강했다. 젊은 혈기, 사생결단의 각오로 승리를 따냈다. 총선은 모든 보좌관의 고비다. 의원이 없으면 보좌관도 없다.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선거 때만 다가오면 여지없이 긴장된다.

의원의 당락엔 보좌관의 자존심도 걸렸다. 보좌관들에게 낙선이란 출마자가 패한 게 아니라 보좌관이 졌다는 뜻이 먼저다.

의원의 의정활동을 위해선 누구보다 절실한 조역이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신분은 여전히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현재도 의원회관에 수시로 빠져나가고 들어오는 보좌관 인력이 한달 평균 10명. 지난 2월만 해도 한나라당 쪽에서만 5명이 면직됐고 7명의 새 얼굴이 들어왔다. 심지어 3개월마다 한번씩 보좌관이 바뀌는 사무실도 있다.

작년엔 본인의 선거도 치렀다. 처음 경선으로 진행된 한나라당 보좌관 협의회장 선거. 회장에 당선됐다. 따로 보좌관이 필요없는 전천후 회장이다.


전문가집단이면서도 차별받는 '별동부대'

15년차에 접어든 정 보좌관은 현재 4급 상당, 연소득 4천만원쯤 된다. 4급중엔 최고액수다. 일반 공무원보다는 다소 높은 편이지만 이리저리 새나가는 활동비를 빼고나면 온전히 전액을 집에 가져가본 적이 없다.

국민의 권익을 위해 일하는 공복이라곤 하지만 정작 보좌관직 자체의 권익은 아직 바닥이다. 국회법엔 보좌관에 대한 항목조차 없고 몇몇 기본수당과 혜택에서도 제외된다.

고도의 전문가 집단이면서도 근로자로선 차별을 받는 외로운 별동부대, 별정직 공무원. 워낙 들락날락 불안정한 자리이다보니 지금껏 누구도 보좌관의 복지와 권익에 선뜻 총대를 메지 못한 이유도 있다. 한보협 회장에 나선 것도 그런 기초공사를 위해서다.

집에선 1남1녀의 아버지이자 성악가인 아내의 보좌를 받는 가장이다. 직업병인지 어떤지, 이따금씩 즐기는 바둑도 직접 두기보단 관전쪽을 더 좋아한다. 어쩌다 친구나 동창을 만나면 너나없이 첫 인사가 "너네 요즘 왜 그러냐"는 소리다.

공(功)은 아는 사람만 알아준다지만 어디가나 정치판 욕은 대표로 다 먹는다. 사실상 자신이 정치현장에 있으면서도 아직 민주화가 보이지 않는 판국이니 무리도 아니다.

아직도 그는 자신이 수련과정중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살이 센 곳에서 큰 고기가 자란다. 보이지 않는 스타메이커의 노릇도 매력적이지만 사실 그에겐 또다른 꿈도 있다. 그 준비된 미래가 무엇인지는 또 함구.

그러면서도 다른 보좌관들의 속이 궁금하기는 그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본인이 끝까지 대답을 피하던 바로 그 물음일 것이다.

"안그래도 언제 한번 전체 보좌관들에게 설문조사를 해보려고 해요. 당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뭐냐고. 어쩌면 비슷한 답이 나올것도 같지만, 글쎄요, 뭘까요."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03/0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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