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중독증] 청소년 '자기만의 우상' 가꾸기

연예계 스타에 대한 10대 청소년의 맹목적인 동경과 우상화가 점차 심화되고 있다. 10대에게 연예인은 선망의 대상이 된지 오래고, 실제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청소년은 물론 사회 전반에까지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부 학자와 시민운동가들은 이런 현상을 '연예중독증'이라 말하고 있다.


연예인 우상화, 일반적 현상

경기 광명시에 사는 이재설(15)양은 어린 소녀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중학교 3학년이다. 차분한 성격의 이양은 학교 성적도 상위권에 속해 현재 선도부원을 맡고 있는 모범생이다.

하지만 이처럼 평범한 여중생인 이양에게도 한가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H.O.T.에 관한 것이다. 이양은 이 그룹 멤버에 관한 신문ㆍ잡지의 인터뷰, 사진, 스티커, 앨범, 그리고 방송 프로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없다.

멤버들의 생년월일과 신장 취미 버릇, 심지어는 그들 가족의 신상까지 꿰차고 있다. 이양은 평소 학원 수업을 마치고 밤 11시에 귀가하면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TV 가요 프로그램은 꼭 인터넷으로 챙겨본다. 홍콩에서 방영되는 스타TV V채널의 한국 가요 방송시간대도 모두 파악하고 이 위성방송을 시청한다.

이양의 방 내부는 H.O.T.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음반은 말할 것도 없고, 수십권의 가요 전문 잡지가 책장을 가득 덮고 있으며 멤버의 모습을 담은 대형 브로마이드만도 100여장에 달한다.

이밖에 사진첩과 엑세서리, 그리고 책과 노트 표지도 대부분 이들 사진으로 덮여 있다. 부모님이 간간히 처분하는 바람에 줄어든 것이 그 정도다.

그래서 이양은 한달 용돈의 90% 가량이 이 그룹과 관련된 비용으로 지출된다. 팬클럽에 가입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는 것은 물론이다. 학업에 지장을 줄까 우려하는 부모님에게 이양은 "공부에는 절대로 지장을 받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실제 아직까지 이 문제로 학업에 나쁜 영향을 미친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이양은 "저는 학교내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오히려 소극적인 편이다. 어떤 친구는 지방 공연을 보기 위해 가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서울 모여고 1학년인 고지연(16ㆍ가명)양은 학급에서 5등 안에 드는 우등생이다. 고양은 명문대 진학을 위해 과외수업을 받고 있어 매일 자정이 되어야 귀가한다.

하지만 매일 녹초가 된 상태에서도 고양이 빼놓지 않는 작업이 있다. 바로 '팬픽'이라는 인터넷 소설 쓰기다. 고양은 두달여전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주인공으로 한 장편 연재소설을 써서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

중학 시절까지만 해도 음반, 사진 모으기, 녹화장과 콘서트 따라다니기 같은 '오빠 부대'의 열렬한 멤버였던 고양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시간에 쫓기는데다 한 차원 높은 팬으로서의 길을 모색하다 요즘 유행하는 팬픽을 시작했다.

고양은 소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에 관련된 기사는 모두 스크랩한다.

소설을 쓰다보면 새벽 2~3시를 넘기기가 일쑤다. 하지만 '좋아하는 가수를 항상 내 마음속에 두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고양은 이 소설을 200여편으로 마무리한 뒤 책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고양의 부모님은 처음 이 사실을 알고는 무척 놀라고 또 실망했다. 고양의 부모는 "소설을 쓰면 작문에 도움이 된다"는 고양의 주장에 반신반의 하면서도 "어차피 한번 겪어야 할 것이라면 빨리 경험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철저하게 만들어지는 스타

TV, 라디오, 영화 같은 대중매체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는 사춘기 청소년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온지 오래다.

더구나 요즘처럼 격렬한 음악과 튀는 대사, 화려한 의상, 멋진 외모 등 음반 기획사에 의해 철저하게 만들어진 연예 스타에게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이 빠져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사회에 만연하는 연예중독증은 '사춘기 시절 한때의 열병'에 불과했던 예전과는 판이하다. 예전의 극성팬들은 일부 청소년, 그것도 한순간의 집착에 그쳤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대부분의 10대 청소년이 연예중독증세에 빠져 있으며, 연령대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요즘은 오히려 학교 모범생이고,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일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다양한 채널을 통해 자신만의 우상을 가꾸고 있다.

한 남자 솔로 가수의 팬이이라는 서울 모여중 2학년생 박모(14)양은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일수록 연예인 팬클럽 활동도 더 적극적"이라며 "같은 반내에서도 서로 같은 가수나 탤런트를 좋아하는 아이들끼리 친하게 모여 다니기 때문에 연예인을 관심이 없는 극소수의 아이들은 왕따를 당하기도 한다. 간간히 팬클럽 간에 싸움을 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고 말했다.

일부 극성 팬의 연예인 집착증은 도를 넘기도 한다. 영하의 한 겨울에도 스타들이 거주하는 숙소 앞에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겠다'는 생각에 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밤을 세우는 노숙파가 상당수 있다.

일부는 가출해 겨울방학 한달여간을 지키고 있는 여학생도 있다. 또 연예인의 지방 공연을 보기 위해 아예 학교수업을 팽개친 학생도 있다. 실제 서울 모여고의 김모(16)양은 좋아하는 연예인을 쫓아다니다 수업일수가 모자라 퇴학당한 뒤 부모님의 간청으로 어렵게 복학하기도 했다.

경기도 분당 남녀공학고교의 한 담임 선생님은 "연예인에 대한 관심은 남자보다는 여자가, 고교생보다는 중학생이 더욱 심하다"며 "올해 초 반에서 5등 안에 드는 상위권 학생이 갑자기 의기소침하고 침울하게 변해 연유를 물어봤더니 '좋아하는 댄스 그룹이 해체 위기에 있어서 그렇다. 매일 꿈속에 오빠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괴로워 죽고 싶다'고 대답해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최근의 연예중독 증세는 초ㆍ중ㆍ고생 등 10대에서 벗어나 이제는 대학생, 직장인까지 폭 넓게 퍼져가고 있다.

지난해 서태지가 미국에서 컴백해 공연을 가졌을 당시 공연장을 메운 관객의 상당수가 10대 시절부터 서태지를 흠모했던 20대 여성 팬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서태지 기념 사업회'라는 팬클럽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데 이 팬클럽의 멤버의 대다수가 20대, 30대다.


세대 초월한 '스타 좋아하기'

명문대를 나와 현재 고시를 준비중인 최모(25ㆍ여)씨는 바쁜 와중에도 인터넷에 자신이 좋아하는 그룹의 팬페이지를 만들어 운영중이다.

본래 최씨는 대학시절까지 가수를 따라다니는 열성 팬이 아니었으나 지난해부터 이 그룹에 빠져 들면서 고시 준비와 인터넷 사이트 운영을 병행한다. 최씨는 당시 이것을 제작하느라 거의 두달여간 꼬박 밤을 세웠다.

물론 시험준비는 잠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주위로부터 "최고학부를 나온 다 큰 처녀가 무슨 가수의 팬페이지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은 개의치않는다. "나이가 들었다고 좋아하는 연예인이 없으란 법이 있느냐"는 나름대로의 소신이다. 지금도 최씨는 하루 2~3시간을 팬페이지 관리에 쏟아넣고 있다.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예전의 팬 클럽은 자생적이고 개별적인 성격을 띄고 있어 수명이 짧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가수나 탤런트의 소속 기획사가 인기관리나, 상업적인 차원에서 팬 클럽을 직ㆍ간접적으로 주도하고 있어 수명이 그만큼 점차 길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연예인은 종전의 가수와 탤런트 일변도에서 영화배우 개그맨 MC 아나운서 심지어는 PD와 작가 해설자 강사 등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그야말로 TV에 얼굴을 비추는 사람이면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연예계 진출은 요즘 청소년이 가장 선망하는 직종 1순위에 올라있다.

지난해 KBS TV의 인기 프로인 '게그 콘서트'는 10대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개인기', '형님 시리즈' 등을 유행시켰다. 특히 '114'라는 코너의 영향으로 실제 한국통신의 114 안내 교환원의 멘트 내용과 딱딱했던 안내 어조가 바뀌는 일도 있었다. 이 프로의 '빰바야'라는 인기 코너를 이름을 딴 어린이 과자도 시중에 선보였다.


"닫힌 교육에서 파생된 결과'분석"

중앙대 청소년학과 최윤진 교수는 "개성을 무시한 획일적이고 닫힌 교육, 그리고 상업적인 대중문화가 청소년이 연예인을 우상시하게 만들고 있다"며 "사회가 정치권의 갈등, 경제계의 혼란 등으로 젊은이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과 존경할 만한 인물을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점도 한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TV와 연예인이 대중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은 이제 그 어떤 예술ㆍ문학 장르가 대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다.

이것은 아마도 찰나적이고 감각적인 자극에 매달리는 TV와 연예인을 대체할 만한 질높은 대중문화가 아직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현상을 탓하기 전에 오랜 타성에 쉽게 젖어 버린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3/14 19:49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