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T-2000 동기식 어떻게 돼가나

사업자선정 연기 구조조정
연계시키며 사업자 압박 의도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짙은 안개에 잠긴 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칩시다. 게다가 앞에는 여러 갈래 길이 놓여 있습니다. 표지판도 없습니다.

이럴 땐 속도를 최대한 늦추거나, 안개가 어느 정도 걷힐 때까지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멈춰서 있을 수 밖에 없겠죠."

최근 만난 한 정보통신 전문가는 난마처럼 얽힌 통신시장 현안에 대한 전망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지적처럼 요즘 통신업계는 '시계 0의 짙은 안개' 속에 갇혀 있다.

드문 드문 용기를 내 제 갈 길을 가던 차량들 조차 운행을 포기한 채 멈춰 섰다. 수신호를 보내주던 교통경찰(정보통신부)이 느닷없이 손을 들고 '통행정지'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정보통신부는 2월 23일 동기식 차세대 이동통신(IMT-2000) 사업권 신청 접수를 불과 사흘 앞두고 사업자 선정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포항제철 LG 등 대기업들이 동기식 사업 참여를 끝내 거부하고, 하나로통신과 정보통신중소기업협회 등 컨소시엄을 주도하던 업체들마저 "출연금 대폭 삭감 없이는 사업권 신청이 어렵다"고 배수진을 치고 나왔기 때문. 더욱이 기대를 모았던 퀄컴 등 해외 사업자들의 참여도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매 피하자" 시간끌기

정통부는 앞서 2월 19일 청와대 업무보고를 통해 통신시장 구조조정 필요성을 공식 제기했다. '3개의 유ㆍ무선 종합사업 그룹' 구도로 통신시장의 재편을 유도하겠다는 게 골자다. 정통부는 이를 위해 최근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에 지시, 실무연구팀을 구성했다.

사업자 선정 연기와 통신시장 구조조정 추진. 이를 통해 정통부가 노린 것은 무엇일까?

우선 '매를 피하고 보자'는 계산이 엿보인다. 이번에도 사업자 선정에 실패할 경우 정통부는 동기식 사업자 선정을 고집할 명분을 잃고 자리 보전마저 어려운 궁지에 몰리게 된다.

마침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 통신시장에 'IMT-2000 회의론'이 급속 확산되면서 사업자 선정 연기에 대한 비난 여론을 다소 누그러뜨릴 수 있는 핑계거리도 생겼다.

정통부는 특히 동기식 사업자 선정에 누구나 필요성을 공감하면서도 쉽사리 결론내기 힘든 구조조정 문제를 연계시킴으로써 시간을 끌 명분도 챙기고, 사업자를 압박할 무기도 확보했다.

3자 구도에서 2강은 이미 비동기 사업권을 따낸 한국통신과 SK텔레콤으로 드러난 만큼 동기식 사업자가 나머지 한 축이 될 것은 뻔한 이치다. 뒤집어 말하면 포철이든 LG든 동기식 사업 참여를 거부할 경우 통신시장에 발을 붙이기 어렵다는 무언의 압력인 셈이다.

과연 누가 제3의 통신사업자가 될까?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곳은 포철이다.

포철의 최대 강점은 통신사업의 성공을 좌우하는 자금력이 막강하다는 것이다. 포철은 더욱이 철강산업의 사양화 추세에 대비, 통신사업을 중장기 전략사업으로 채택하고 시장진출 기회를 노려왔다.

포철은 지난해 정통부의 반대로 무산된 한전의 자회사 파워콤의 인수에 여전히 미련을 갖고 있다. SK IMT에도 지분 12%의 2대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포철 겨냥한 동기-비동기 중복허용

통신업계의 여론도 호의적이다. 특히 신윤식 하나로통신 사장은 올해 초 '포철 역할론'을 담은 '통신업계 구조조정 건의서'를 청와대 등 정ㆍ관계 요로에 전달했다.

포철이 주도적 사업자로 나서 동기식 사업권을 획득하고 하나로통신과 LG텔레콤을 인수하도록 해 통신시장을 한국통신-SK텔레콤-포철의 3강 구도로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 이 문건의 골자다.

한때 신 사장의 '짝사랑'쯤으로 치부되던 '포철 역할론'은 LG가 '동기식 사업 절대 불가' 방침을 굳히면서 유일한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정통부가 1월 동기산업 육성 대책을 발표하면서 동기-비동기 중복참여를 허용하기로 한 것은 다름아닌 포철을 겨냥한 것.

정통부가 굳이 청와대 업무보고를 통해 '3자 구도 시장 재편론'을 공식화한 것도 신 사장이 청와대에 건의서를 올린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양측 문건을 비교해 보면 문제제기 배경과 결론이 놀랍도록 흡사하다.

특히 '유ㆍ무선 종합통신사업 그룹'이라는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LG의 최근 행보도 포철 역할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박운서 데이콤 부회장은 얼마 전 기자간담회에서 "LG는 절대 동기식 사업에 참여하지 않는다"면서 "포철이 동기식 컨소시엄의 주도적 사업자가 될 경우 LG텔레콤을 매각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LG가 IMT-2000을 비롯한 이동통신 사업의 포기를 확정한 것은 아니다. LG는 얼마 전까지도 동기 사업자 선정이 결국 실패로 끝나 남은 주파수를 비동기로 전환할 가능성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정통부의 사업자 선정 연기로 이마저도 어렵게 되자 일단 이동통신 사업 정리로 가닥을 잡고 LG텔레콤 처리 방안을 다각도로 검토중이다.

LG 관계자는 "LG의 선택은 종속변수가 될 수 밖에 없다"면서 "설사 비동기 사업의 길이 열리더라도 사업권을 신청할 지는 그때 가서 검토할 문제"라고 말했다.

문제의 포철의 태도. 포철의 공식 입장은 통신사업에는 관심이 있지만 사업성이 불투명한 동기식 사업에는 뛰어들지 않겠다는 것. 유상부 포철 회장도 그동안 기업설명회, 기자회견 등을 통해 수차례 "동기식 컨소시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포철, 시간끌며 과실 챙기려들 것"

그러나 포철이 통신사업 진출의 꿈을 접지 않는 한 동기식 사업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물론 이들도 포철의 최종 결심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제3의 통신사업자 지위를 보장받는 대신 퇴출위기에 몰린 여러 기업을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 통신사업 진출에 부정적인 외국인 주주들을 설득하는 것도 난제다.

또 다급한 측은 정통부인 만큼 포철로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 업계 한 관계자는 "포철은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과실'을 하나 하나 챙기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해외업체 컨소시엄이 제3의 통신사업자로 나설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이미 몇몇 해외 사업자가 한국을 방문해 정통부와 동기식 사업 참여 조건을 협의중이라는 소문도 들린다. 그러나 동기식 사업자 선정이 무산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통신 전문가는 "한심한 노릇이지만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통정리가 이뤄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누구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뿐"이라고 토로했다.

이희정 인터넷부 기자

입력시간 2001/03/14 20:45


이희정 인터넷부 jay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