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좋다, 백만장자를 잡아라"

'포스트 페미니즘'현상, 사랑은 뒷전으로

누가 백만장자와 결혼하기를 원하는가?

언뜻 여성을 비하하는, 공격적인 물음으로 들리지만 지금부터 1년 전 미국 폭스 TV는 이런 제목의 쇼 프로를 기획해 '인기 대박'을 터뜨렸다.

프로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돈밖에 가진 게 없는' 남자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젊은 여성들을 출연시켜 야외복 및 수영복 심사, 인터뷰 등 미인 대회와 비슷한 경선 과정을 거친 뒤 즉석에서 진짜 결혼식을 올리는 단발성 오락 프로그램.

돈 많은 부동산업자 릭 록웰이 1,000여명이 넘는 미녀들중에서 과연 누구를 선택하고, 누가 그와 결혼에 성공해 신데렐라가 되는지 모두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선 최종 5명의 아름다운 신부가운데 한명에게 그가 꽃을 바치는 순간을 담은 2시간짜리 특집이 방영된 마지막날 밤엔 시청자가 2,280만명에 달했다.

시청률면으로만 보면 대단한 성공이었다.

물론 이 프로가 진행되는 동안 수많은 여성들이 얼굴도 모르는 백만장자와 결혼하기 위해 몸매 경쟁을 벌인다는 형식 때문에 미인대회보다 더 심하게 여성을 상품화했다는 비난이 잇따랐다. 신성한 결혼을 시청률 올리기 오락게임에 끌어들였다는 도덕적 기준도 문제가 됐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에서 본선에 오른 49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백만장자의 사랑을 얻은 신데렐라 다바 콘저양이 1주일만에 파혼을 선언하자 "거 봐! 사기잖아"라는 수근거림도 적지 않았다.


돈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식

그러나 '누가 백만장자와~' 쇼가 미국의 젊은 현대여성의 결혼관을 꿰뚫어본 프로였다는 평가가 뒤늦게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최근 미국의 젊은 여성들이 백만장자와 결혼하려는 목표를 세운 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포스트 페미니즘 현상'을 소개했다.

'사랑이냐 돈이냐'를 두고 고민하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은 시대를 뛰어넘은 관심거리지만 이제는 스스럼없이 돈을 선택하는 여성이 늘고 있다는 것. 가난하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꾸려가던 모습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라는 게 뉴욕 타임스의 메시지다.

"어디 돈밖에 없는 남자 없소"라고 외치는 듯한 현대 여성들은 마음속으로는 바라면서도 결국엔 사랑을 선택했던 과거 여인상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그러한 여성들의 태도는 '누가 백만장자와~'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성의 수와 시청률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골드러시 시대에 황금을 찾아 떠난 '골드 디저(gold digger)'로 표현되는 백만장자 추종 여성들은 이제 사회 밑바닥 계층에서부터 뚜렷한 사회흐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TV는 물론 영화, 잡지, 소설 등에서 관심을 끄는 주요 소재가 등장했다. 골드 디저를 다시 인기 용어로 끌어올린 사람은 뉴욕 타임스 부장인 콘스턴스 로젠블럼.

그는 '골드 디저'란 책에서 돈 많고 병약한 홀아비를 만나 10년간 봉사한 뒤 유산을 물려받는 실존 여성을 다뤘는데, 그녀는 지금 온 몸에 온갖 보석을 달고 밤의 TV 토크쇼에 나올 정도로 유명인사가 됐다.

또 매년 뉴욕에서 출판되는 잡지 기사중 가장 인기 있는 내용은 '돈많은 미혼남 100인'이란 기획물이고. 뉴욕의 한 문화센터에선 '부자와 결혼하는 법'이란 강좌가 절찬리에 운영되고 있다.

증권중개업자 출신인 강사 지니 세일즈는 이 강좌에서 부자와 결혼하려면 우선 부자동네로 이사를 가고, 부자들이 즐기는 스포츠와 여가생활을 배우고, 촌스런 이름을 고상하게 바꿀 것을 권한다. 그녀가 낸 책 '부자와 만나는 법'에선 자신의 실제 경험담도 들어 있다.

벤츠 승용차를 탄 남자를 뒤따라가 초청받지 못한 손님으로 설움을 당했지만 몇 차례 소동 끝에 텍사스 출신 부동산업자와 만나 수개월동안 교제할 수 있었다고 그녀는 털어놓았다.

백화점 스타킹 판매장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의 부자 꼬시기를 다룬 '올드 머니(Old Money)'를 쓴 코미디 작가 웬디 워저스타인은 "여성들은 이제 백만장자와 결혼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있다"며 "이런 여성들은 앞으로 흥미 있는 소재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백만장자와의 결혼주선업체 성업중

백만장자와 결혼을 주선하는 결혼중개업소도 성업중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인기를 끄는 '백만장자 클럽'은 백만장자 남자와 백만장자와 결혼을 꿈꾸는 여성만 회원이 될 수 있다.

남자는 보통 샐러리맨 연봉의 3분의 1가량인 1만2,000달러(1,500만원)을 가입비로 내면 부자와 결혼하고 싶은 미녀 50명을 소개받을 수 있다.

운영자 패티 스탠저의 말을 빌리면 백만장자 클럽 가입 여성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 초반. '백마를 탄 늠름한 기사'를 만나려는 젊은 여성들의 심리가 거기에 숨어 있다.

한 여성 회원은 "돈 많은 남자를 만나는 게 가장 빠른 출세의 길"임을 스스럼없이 밝히기도 한다. 백만장자와 만날 수 있다면, 결혼에 골인하지는 못하더라도 교제하는 동안 혼자서는 도저히 가볼 수 없는 호화 레스토랑에서 멋진 밤을 즐길 수는 있을 것이라는 게 그녀의 솔직한 고백이다.

젊은 여성들의 변한 세태를 반영하는 영화, 연극, 소설 등에서는 골드 디저를 더욱 손쉽게 만날 수 있다. 3월 하순 미국에서 상영될 '하트 브레이커스'란 영화는 한 모녀가 백만장자들과 정략적으로 결혼한 뒤 이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내용이다. 사랑보다 돈과 결혼한 주인공을 다룬 소설로는 '4명의 미녀'(부쉬넬 작)과 '스펜딩'(메리 고든 작) 등이 유명하다.


결혼 통한 신분상승이 꿈

그렇다면 미국의 젊은 여성들이 왜 이렇게 변화했을까. 뉴욕 타임스는 "아직도 여성들은 직장에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중간 관리자급 이상 승진이 힘든 현실"을 꼽았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남는 것은 작은 방하나 짜리 아파트가 고작이라는 것.

그래서 뒤늦게나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이 가장 빠른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뉴욕의 한 심리학자인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것은 원하는 것을 얻을 능력을 가진 여성들의 자기과시 표현"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플라스틱 스푼으로 콘프레이크를 떠먹는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백만장자 클럽 한 여성 회원의 이야기가 심리학자의 분석보다 더 현실적이다. 미국 여성들에게는 이제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은 미덕의 항목에서 빠져버린 것 같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1/03/14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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