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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김송자 전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인간탐구] 김송자 전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그녀의 주민등록증은 이상하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경북 칠곡이란 걸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뜬금없는 '서울 중구 초동 72번지'가 본적란에 올라있다. 남편의 본적지도 똑같다. 이것은 부부만의 비밀이었다. 남편으로부터 프로포즈를 받은 것이 서울의 한 풀(草)밭이었고, 그날이 7월2일이었다는, 두사람만의 암호다.

그토록 낭만적이었던 여성이 어느 날부턴가 여전사로 변했다. 남자처럼 폭탄주 석잔도 앉은 자리에서 연달아 들이키고, 필요할 땐 기세좋게 담배도 뻑뻑 핀다. 기선제압용이다. 회식 때 누군가 음담패설로 기를 죽이려들면 더 화끈한 'Y담'으로 장악해버린다.

평소엔 더없이 다정다감한 천상 여성이지만 여성이라고 얕잡아보는 덴 어림도 없다.

여성 최초로 중앙부처 1급 관리관 자리에 올라 화제를 모았던 여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김송자(61). 가시와 모성을 함께 지닌 강철여인이다.

"나는 운이 없는 사람이예요. 운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더 투쟁, 투쟁, 투쟁으로 내 몫을 찾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포목장사를 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다. 열심히 공부해 고려대 법대에 입학한 뒤에도 현재의 남편인 애인만 일편단심 쫓아다니느라 간신히 낙제만 면한 순정파였다. 애인을 군대에 보낸 뒤 비로소 독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쌀가마니가 쌓인 시골집의 차가운 광 속에서 책과 씨름한 끝에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진학했다.


공무원으로 첫출근하는 날부터 여성차별 실감

여성으로 받는 차별은 대학원 때부터 서서히 체감됐다. 마지막 학기 인턴수업 때 총무처 인사국에 지원하자 주위로부터 눈총과 직ㆍ간접의 압력을 받았다. "안되는 줄 알면서 왜 신청했느냐"는 핀잔부터 "여자 주제에 보건사회부 이상은 넘보지말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왕따까지 각오하며 고집대로 나갔지만 의외로 귀여움을 받았다. 여직원이라곤 타자수 몇명 정도가 전부였던 당시, 엘리트 여성이 인턴으로 들어오자 다들 기특해했다.

그러나 인턴수업후 채용시험을 통해 정식직원으로 다시 찾았을 땐 180도 태도가 돌변했다. 그는 인턴사원 중에서도 채용시험사상 최초로 행정학 만점을 기록한 재원이었다.

1969년 총무처 인사국 인사제도과 행정주사로 발령을 받고 첫 출근하던 날, 바로 얼마전까지도 한 가족처럼 아껴주던 사람들이 얼음장처럼 냉랭했다. 그들이 가리키는 자신의 자리는 거의 모욕처럼 다가왔다. 6급 주사로 임용된 그는 원칙상 계장 뒤, 주사보 앞에 앉아야 옳았다.

그런데 그의 책상은 주사보 다음 자리. 남성 사이에선 그리도 헌법같은 조직서열이나 계급도 여성에겐 예외였다. 직급이야 어쨌든 여자가 남자 앞에 앉는 꼴은 볼 수 없다는, 배타적 룰이었다. 공공연히 떠드는 소리도 들렸다.

"감히 어디라고 이 총독부 건물에 여자가 들어오냐"든가 "얼마 안가 못버티고 나갈 것"이라고들 했다.

쉽게 얻은 자리였다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사표를 냈을 것이다. '학력과 실력을 갖고도 그만큼 정부의 푸대접을 받는데, 기업체에 있는 여성은 오죽하랴'고 생각하니 속으로 분통이 터졌다.

여성근로자들을 위해 일하리라 결심했다. 몇 달 만에 총무처를 박차고 나와 노동청에 자원했다. 당시 노동청은 정부조직 중에서도 가장 머리아프고 고생스런 '지옥코스'. 공무원들이 가장 기피하는 '최하급 부처'였다. 심지어 '거지청'이란 험한 별명까지 붙어있었다.

1970년부터 노동청 근로기준국 부녀계로 출근했다. 들어가자마자 부녀계를 과로, 그리고 국으로 확대격상시키는 일부터 착수했다. 터를 잡은 다음,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72년부터 시행된 산업상담원제도를 비롯해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 입안, 전화교환원의 정년 연장소송에서 여성근로자의 정년 40세가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례를 끌어낸 일, 기혼여성 근로자들을 위한 탁아소 건립을 추진하는 등 부녀소년과장, 노동연수원장, 노동보험국장, 근로여성국장 등을 거치며 30년간 맹활약을 벌였다.

한번에 쉽게 이뤄진 일은 없었다. 한번에 안되면 두번, 세번이라도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성사시켰다. 타부서로 전출되면 몇년동안 다른 곳에 갔다가 돌아온 뒤라도 다시 그 일을 붙잡고 늘어졌다. '추진의 강자', '전략의 명수'라는 별명은 과장시절부터 따라붙었다.


노동관련업무로 맹활약, 전략의 명수

버스안내양들의 1일2교대제를 추진할 땐 당돌한 정면돌파 작전도 있었다. 1일 18시간 근무라는 악조건도 처절한데, 곧 통행금지를 해제할거라는 정부의 발표까지 있자 하루 스무시간 이상 노동이 불보듯 뻔했다.

발빠른 준비끝에 1일2교대제라는 대책을 세웠지만 문제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당시 노동부 차관의 결재였다. 어느날 밤 불쑥 차관집을 찾아갔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과장 앞에 차관은 적잖이 당황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절박한 상황을 호소했다. 차관의 종교가 자신과 같다는 사실까지 미리 알고 가톨릭 신자로서의 양심까지 걸었다. 자칫하면 무례한 직원으로 밉보여 오히려 자신에게 해가 될 수도 있음을 각오한 무리수였다.

다행히 결과는 성공, 얼마 뒤 차관의 지시가 떨어지면서 꼬였던 실타래가 순식간에 풀려나갔다.

남모르는, 자신과의 싸움도 많았다. 담배를 처음 배운 것도 자신의 아이를 가졌을 때 입덧을 숨기기 위해 주윗 사람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임신사실이 알려지면 퇴사를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밟힐수록 일어나는 배짱과 오기는 물려받았지만 실력없는 배짱이란 웃음거리였다.

남보다 몇배 더 준비하고 공부했다. 사업구상도 책상 앞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뛰며 찾았다. 현장 근로자들이나 진보적인 여성단체들과 자주 만나다보니 '이념이 불순한 공무원'으로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

그래도 직장 동료 사이에선 신망을 잃지 않았다. 남자 이상으로 인기많은 선배이자 동료였다. 누군가 억울한 문책 위기에 몰렸을 때도 차마 아무도 입을 떼지못할 때 용감하게 나서 대변자 노릇을 했다. 든든한 울타리같은 그를 후배들은 믿고 따랐다.

동시에 자상한 대모이기도 했다. 식사배식 때 상급자인 그를 대우해 후배직원이 그의 밥을 떠주려하면 얼른 주걱을 빼앗아 선수를 쳤다.

"여자가 퍼주는 밥이 훨씬 맛있다"며 다른 후배들 것까지 모두 퍼주는 선배였다. 그렇게 끈끈하게 맺어진 동료들은 실제로 그의 어려움 앞에서도 가장 든든한 바람막이가 돼 주었다. 베푼 만큼 얻는 것, 그의 전략이란 현실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것이다.

"여자에겐 더더욱 인맥의 힘이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밖에서 어떤 외풍이 불어닥쳐도 주위에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이 딱 버티고 있으면 아무리 누가 와서 흔들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여자니까 여자 인맥? 아뇨. 씁쓸한 얘기지만 여자일수록 여자 동료보다는 오히려 남자들을 더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조직내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아직은 대부분 남자이고 상위직 여성의 숫자도 극히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친목이 아니라 조직내 생존에 대한 얘깁니다. 지연이든 학연이든, 끈이 닿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평소 충실해야 합니다."

최대의 난적은 인사상 차별이었다. 1998년 언론에 대서특필된 '여성 최초의 1급 공무원 탄생'이란 한줄의 기사가 나가기까지 숱한 맞바람을 견뎌야했다. 평소에도 동일 직위의 남자라면 2-3년만에 승진될 자리를 그는 평균 5년씩 걸려 겨우 올랐다.

10여년 전엔 여성에게 불리한 법의 개정에 강력히 반대하다 인사권자의 눈밖에 나 2급이면서도 3급 자리로 좌천됐던 그는 문민정부 하에서 시장, 부지사 자리를 제안받기도 했다.

사실상 동일 직급. 이름엔 별 욕심도 없거니와 현실적인 승급이 따르지 않으면 갈 이유가 없다고 거절했다. 제안했던 쪽에선 "턱없이 욕심을 부린다"고 빈정댔다. 얼마 뒤 같은 직급의 한 남성이 도지사 자리로 발령받는 것을 보았다. 그에겐 택도 없다던 승진의 보너스까지 함께 업고서.

"여성에게 새 자리가 제시될 땐 특히 잘 판단해야 됩니다. 무턱대고 받다간 죽 쒀서 남주는 꼴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가령 어떤 새 자리에 여성을 보낼 땐 그 여성이 있던 자리에 남자를 밀어넣기 위한 경우가 많거든요.

결과적으로 오히려 더 요직의 자리를 남성에게 빼앗기는 셈이지요. 하도 그런 일을 많이 겪다보니 이젠 무슨 판이 움직이는 것만 봐도 내 눈에 꼼수가 다 보입니다."


"저는 오줌도 서서 눕니다" 피맺힌 절규

1980년 무렵 있었던 에피소드. 승진에서 탈락된 직후 참담한 심정으로 앉은 어느 회식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들어가자 인사권을 쥔 상사가 농담처럼 던졌다.

"노래를 잘 하면 과장 시켜주려고 했더니 영 시원찮네." 가시있는 농담이었다. 듣자마자 용수철처럼 발딱 튀어나와 오기로 다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의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이지.." 뼈있는 화답이었다.

그때부터 '먼저 앉는 게 임자라는 무서운 여자'로 꼬리표가 붙었다. 언젠가 1급 승진누락을 암시하는 모 차관앞에선 이런 말도 한 적이 있다. "제가 남자보다 못한 게 어디 있습니까?" "저는 오줌도 서서 눕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던진 절규였다.

심지어 본적을 바꿀 만큼 열렬한 사랑으로 맺어진 남편마저 한동안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때 이혼 얘기까지 오갔다.

그러나 아내의 현실을 직접 곁에서 지켜보는 사이, 이제는 누구보다 든든한 평생 아군이다. 명지대 무역경영대학원장 유경득 교수가 부군이다.

"마침내 1급에 올랐을 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여성차별은 내 시대에서 끝내겠다고 30년동안 이를 악물고 뛰었습니다. 이제 이만큼이라도 길은 틔어놓았으니 뒤에 오는 후배들만큼은 우아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해 4월 퇴직한 그는 현재 고려대 행정대학원 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수업을 시작한 지 고작 1주일 여. 그간에 쌓은 실전 노하우들을 아낌없이 제자들에게 전수할 계획이다. 최근 '성공하려면 전략가가 되라'는 책을 펴낸 그는 후배여성에게 특히 힘주어 말하는 이야기가 있다.

"초창기에 히트작을 내라." "벼랑 끝에 서더라도 배짱으로 살아라." "사표를 쓰고 싶으면 사표대신 돈을 써라." "부부 사이라도 직장 이야기는 다 하지 말아라."

한가지만 해도 하루종일 떠들어도 모자랄, 하나하나마다 뼈저린 투쟁기가 담긴 값비싼 조언이다. 나이도 무색하게 여전히 쾌활하고 용감한 투사, 김송자의 싸움은 종전(終戰)된 게 아니라 다만 전략적으로 휴전상태에 있을 뿐이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1/03/1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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