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정주영] 한국경제의 '큰 별'지다

정주영 전 현대회장 타계… 도전의 일생, 아나로그 경제시대의 종언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분명 거인(巨人)이다. 거인의 죽음은 시대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의 그 누구도, 심지어 해외에서도 그의 죽음을 단순히 생물학적 사망으로만 여기지는 않는다.

2001년 3월21일 오후 10시. 그는 영광과 착잡함, 그리고 그가 살아온 지난 역사에 대한 향수와 반성을 산 자에게 숙제처럼 남기고 떠났다.

그의 족적과 삶의 의미, 죽음의 의미는 그가 평생을 바쳐 일군 현대나 그가 주역으로 참가했던 한국 경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화산처럼 살아온 86년간은 한국이 마침내 일어서서 도약한 시기와 일치한다.

그가 현대를 일으켜온 과정은 한국 현대사의 경제발전 과정과 일치한다. 아울러 오늘날 현대그룹의 모습은 현재 한국이 안고 있는 고민과 일치한다. 그의 죽음이 시대사적 의미를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풍운아

정주영 전 회장은 흔히 풍운아로 불린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 정주영의 한 면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그는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풍운아였다. 기업가와 기업가 정신이 뚜렷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에 기업을 일으켜 기업가와 기업가 정신의 한 모델을 제시한 존재였다.

그가 제시한 모델은 불굴의 기업가 정신과 시류에의 적응, 기업가적 도덕과 사회적 모순으로 교직돼 있다. 20세기를 살아온 그의 정신은 21세기적 토양에서 재평가되고 있고, 또 앞으로 부단히 재평가될 것이다. 이 같은 재평가는 인간 정주영이 계속 '왕회장'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소년 정주영은 당시 동아일보 연재소설인 이광수의 '흙'을 애독했다. 그가 1915년 태어난 고향은 현재 북한땅인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그의 호 아산(峨山)은 고향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연재소설 '흙'을 읽기 위해 마을에서 유일하게 동아일보를 구독하는 구장집으로 매일 밤 2km를 달렸다.

그는 이 소설을 읽으며 흙이 아니라 도시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러던 16세 때 그는 가업잇기를 바라는 부친의 희망을 뿌리치고 서울로 가출했다. 훔쳐낸 소를 판 14원을 들고서다. 가출을 속죄하는데 67년이 걸렸다. 1998년 6월 그는 소떼를 몰고 북한으로 가며 판문점 기자회견에서 소회를 밝혔다.

"어릴 적 가난이 싫어 소 판 돈을 갖고 무작정 상경한 적이 있었다. 그후 나는 묵묵히 일 잘하고 참을성있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왔다. 이제 그 한 마리가 1,000 마리의 소가 되어 빚을 갚기 위해 고향산천으로 간다."

서울로 가출해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그가 19세에 자리잡은 곳은 쌀가게 복흥상회였다. 여기서 특유의 근면과 성실로 신뢰를 얻었고, 월급을 모아 1938년 드디어 가게를 인수했다.

인수 후 새로 개업한 쌀가게 경일상회는 훗날 현대왕국의 씨앗이 됐다. 1939년 변중석 여사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이듬해 자동차 수리센터 아도써비스 공장을 설립한 그는 광복과 더불어 숨가쁜 질주를 시작했다.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1947년 현대토건사, 1950년 현대건설ㆍ현대상운, 1960년 현대자동차, 1969년 현대시멘트, 1971년 금강개발, 1973년 현대조선, 1974년 현대엔지니어링ㆍ현대자동차써비스, 1975년 현대미포조선, 1976년 고려산업개발ㆍ현대종합상사, 1977년 현대정공, 1983년 현대전자, 1986년 현대산업개발, 1989년 북한과 금강산합작개발 의향서 교환, 1998년 금강산개발 및 관광사업 합의, 1999년 현대아산 설립 등이다.

왕회장의 기업설립 시간표는 한국의 공업발전 시간표와 대체로 일치한다. 왕회장이 전후복구, 공업입국, 중화학공업화, 첨단산업화, 대북경협으로 이어지는 한국 경제의 흐름을 민간부문에서 선도해왔다는 이야기다.

그가 풍운아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1960대 이후 현대의 진로는 중화학공업 발전을 추진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노선과 맞아 떨어진다.

박정희와 정주영의 관계는 친밀했고, 상호필요를 넘어서는 신뢰관계를 형성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왕회장은 종종 청와대로 불려가 박정희와 막걸리를 마시는 파트너였다.


오늘의 현대 일군 '신용'

그가 풍운을 탄 것이 시대의 덕분만은 아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자서전 제목처럼 그는 도전정신의 화신이었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정열을 갖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는 불도저"라고 말한 바 있다. 생각하는 불도저를 지탱한 그의 기업가적 신조는 신용이었다. 그에게 신용은 미래를 기약하는 본능적인 무기였는지 모른다.

그의 신용제1주의가 노다지를 안겨준 대표적 사례는 한국전 전후복구 사업의 하나인 고령교 공사. 계약조건은 공사기간 26개월에 총공사비 5,478만환이었다. 물가폭등으로 자재, 노임비가 급등하고 장비부족으로 곤경에 부딪히면서 공사 중반에 비용이 계약금액을 초과했다.

임원들이 공사포기를 건의했지만 그는 "신용을 잃으면 사업가의 생명은 끝"이라며 강행했다. 완공 후 적자액은 7,000만환.

하지만 이것은 도약대로 탈바꿈했다. 그의 정신을 높이 산 정부가 2억3,000만환 규모의 한강 인도교 공사를 비롯한 대형공사를 잇따라 맡겼기 때문. 현대가 건설분야에서 급성장할 수 있었던 초석은 이때 놓였다.

기업가로서 왕회장은 '사업보국주의'(事業報國主義)와 유형적인 창조를 중시했다.

한국 최초의 해외건설사업인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1965년), 경부고속도로 공사(1970), 조선소 건설과 동시에 배를 진수시킨 현대조선소(1973년), 최초의 국산기술 자동차 포니 생산(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 대토목 공사(1976년), 유조선으로 조류를 막은 서해안 간척지 개발(1984년) 등이 그의 작품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왕회장의 스타일은 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의 독특한 기업문화와 자부심을 낳았다. 왕회장의 사업보국주의 철학에는 재계 단독 1위를 달리는 삼성도 여전히 자격지심을 갖고 있다.

미국 AP통신은 왕회장을 "한국의 경제기적을 일구는데 큰 몫을 했지만 기적에 수반된 정실주의(cronyism)를 체화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정치권과의 결탁이 현대의 발전과 연관돼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권과의 관계는 1992년 12월 그가 대선에 출마하면서 극도로 나빠졌다. 그는 경제를 망치는 정치를 바꾸기 위해 나섰다고 주장했지만 득표율 16.3%에 3위로 좌절했다.

그는 "정치가 경제보다 어렵다", "정치는 정치인의 몫"이라는 말을 남기고 1993년 2월 통일국민당 탈퇴와 국회의원직 사퇴를 선언했다.


정치 '외도'로 큰 상처, 우울한 말년

대선패배 이후의 말년은 우울했다. YS의 괘씸죄에 걸려 자신은 대선법 위반혐의로 법정에 섰고, 현대그룹은 자금줄이 차단됐다. 1993년 5월 현대그룹 해체와 소유ㆍ경영 완전분리 선언은 사실상 YS에 대한 백기선언이었다.

DJ정권 출범과 함께 왕회장과 정치권은 다시 밀월을 맞았다. 하지만 급피치를 올린 대북사업에 대한 전망은 썩 밝지만은 않다. 1998년 11월 출범한 현대아산의 대북사업은 현대의 자금줄을 옥죄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2세 역시 정치만큼이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지난해 3월 현대자동차 계열분리 과정에서 촉발된 정몽구ㆍ정몽헌 회장간 '왕자의 난'으로 현대그룹은 사분오열됐다.

왕회장은 "기업이 작으면 개인 것이지만 커지면 국가와 국민의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앞으로 현대 계열사들이 가족의 손을 떠난다 해도 그에겐 그리 슬픈 일이 아닐지 모른다.

1992년 대선출마 이전과 그 이후의 왕회장을 보는 한국인의 감정은 다르다. 전자에 애정과 존경, 향수가 실려있다면 후자에는 연민과 다소간의 분노가 담겨있다. 한국인의 삶의 질과 의식변화에 따라 양자간 비율도 달라질 것이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3/28 14:36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