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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보 파탄…관료·정치권 무능이 원흉

의보 파탄…관료·정치권 무능이 원흉

무소신정책의 전형, 정부 떠넘기기에 급급

"의약분업은 내 책임이 가장 크다.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듣고 시작했지만 지금 보면 준비가 부족했음을 느낀다."

김대중 대통령은 3월19일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의약분업에 대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김 대통령이 추진한 주요정책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실정'(失政)을 인정한 것이다. 물론 국민건강(의료)보험 재정파탄과 관련해 온나라가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 어수선한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대선공약에 발목잡힌 '준비안된' 시행

정부ㆍ여당은 "이번 정부 최대 실정(失政)으로 기록될 사안", "집권후반기 개혁정책과 강한 정부의 기조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악재"라는 등 위기감을 감추지 않고 있고, 야당은 "DJ정권의 국정수행 능력의 한계가 명백히 드러난 사건"이라며 내각 총사퇴 등 고삐를 조이고 있다.

의약분업의 정책수립에서 실행까지 이례적으로 정부측 입장에 동조해오던 시민단체도 복지부와 정치권의 무능과 무소신을 지적하며 일제히 공세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여기에 청와대, 보건복지부, 의협, 약사회 등 이해관계가 엇갈린 단체들은 서로 책임 떠넘기기의 핑퐁 대결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올해 예상되는 4조원(3조9,714억원) 가량의 건강보험 적자는 누가 부담하든 메워져야 한다. 아마도 희생의 제물은 또다시 국민이 될 수밖에 없다. '과연 누구를 위한, 누구의 희생과 불편을 전제로 한 의약분업이었는가'를 정치권과 정부당국에 되묻지 않을 수 없다.

20여년 묵은 의약분업이라는 '오랜 불발탄'을 수면 위로 끌어낸 것은 다름아닌 1997년 대선이었다. 선거운동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민생정책의 앞자리에 의료보험과 의료보험통합을 올려 놓았다.

의료계와 약국, 제약회사간의 오랜 부조리와 음성적 관행의 고리를 차단하고 의료계를 정상화시키겠다는 취지에서다.

더구나 의료보험은 가장 대표적인 사회보장정책의 하나여서 국민의 정부를 표방한 DJ 정부로서는 이 공약(公約)을 단순히 공약(空約)으로 넘길 수만은 없었다.

더구나 의약분업은 이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의 하나였고, 당시 국정전반에 흘렀던 개혁이나 구조조정 등의 사회적 분위기와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어서 더욱 포기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의료보험 자체가 지니고 있던 구조적인 문제점도 있었다. 당시 의료보험은 크게 지역의보, 직장의보, 공무원조합 등 3개 부분으로 나눠져 있었다.

특히 지역의보는 매년 수천억원의 적자가 발생해 거의 파산 직전에 있었다. 정부와 직장의보의 직ㆍ간접 지원이 없으면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따라서 당국은 우선 지역과 직장, 공무원 의료보험을 통합해 파산을 막을 '물타기 처방'이 필요했다.

물론 이런 단기적인 임시요법으로도 근본적인 치유가 안된다는 것을 복지부 관계자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던 내용이다.

이에 따라 만성 적자에 시달릴 의료보험 재정을 건전하게 만들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의약분업이었다. 오랜 골치거리인 의약계의 고질병에 메스를 가해볼 호기로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대통령 공약 사업의 하나라 청와대가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나왔을 뿐 아니라, 이례적으로 시민단체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어 복지부로서는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밀어붙일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주먹구구식 정책, 홍보에만 열올려

그러다 보니 의약분업 실시로 인한 재정소요 규모와 파장, 후유증에 대한 정밀한 사전조사를 뒤로 한 채 정책홍보에 더욱 열을 올렸다.

"국민이 조그만 불편을 감수하면 국민건강도 증진되고 부실한 의보재정도 견실해진다"고.

직장의보 노동조합의 송용섭 사무차장은 "당시 정부는 '약물 오ㆍ남용 방지', '의료계의 부패고리 차단'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의약분업과 의보통합을 추진했지만 속내는 대선공약을 실행에 옮기고 지역의보 파탄을 일시 봉합하자는 얄팍한 속셈이 더 컸다"고 지적했다.

야권에서도 "의료계 질서를 바로잡아 국민 건강과 복지를 향상시키겠다"는 행정당국의 정책을 굳이 반대하고 나설 명분을 찾지 못했다.

정치권은 당시 파업으로 맞서는 의사들을 당근으로 설득하거나 전면 시행일을 한두달 연기하는 정도의 중재안을 내는 정도였다. 의약분업 실시를 앞둔 지난해 여름 사회 분위기는 '결사반대'를 주장하는 의사들을 제외하곤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다.

그런 연유로 청와대와 정치권은 한결같이 의보재정 파탄의 책임을 보건복지부 쪽으로 돌리고 있다. 이한동 국무총리는 19일 확대간부회의에서 "복지부의 안이한 준비와 예측으로 정부가 국민의 지탄 대상이 되고 있다"며 "복지부는 존립을 걸고 이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강도높게 비난했다.

청와대 고위 당국자도 "대통령이 화가 난 이유는 차흥봉 전장관에 이어 지난해 7월 취임한 최선정 장관도 수가만 올리면 해결된다는 식으로 보고해왔기 때문"이라고 질책했다. 민주당의 고위 관계자들은 "당이 정부(복지부)에 속았다", "복지부 관료들을 대해 보니 한마디로 마피아더라.

의약계와의 유착 수준이 상상 이상"이라는 식으로 복지부를 난도질하고 있다.


청와대론 장밋빗 청사진만 제공

물론 복지부는 '의약분업을 실시하면 병ㆍ의원 출입과 약국 조제가 불편해져 불필요한 약물남용이 줄어 의료비 지출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내린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하지만 복지부 외에도 의약분업에 대한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하는데 앞장선 몇몇 청와대 브레인과 여ㆍ야 정치인, 일부 의료사회학자들 책임 또한 크다.

당시 청와대와 학계 정치권의 의약분업 옹호자들은 김 대통령에게 '의약분업을 실시하면 약물 오남용이 줄고, 병원ㆍ제약회사 간의 음성거래가 사라지는 동시에 약 1조원 가량의 의보재정 절감 효과가 발생할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제공해 오판을 내리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의약분업 논의가 한창이던 1999년 6월 보건복지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재직하다 실ㆍ국장 회의에서 의보통합 정책을 반대하다 직권면직된 김종대 대구경산대 보건학부 객원교수는 "당시 차흥봉 한림대 교수와 서울대 김용익 교수, 청와대 김성재 정책기획수석, 민주당 이성재 전의원, 이상이 정책위원회 전문위원, 최선정 복지부 차관 등이 김 대통령과 집권당에 의약분업의 논리를 집중전파한 핵심 인물이었다"며 "당시 의약분업에 대한 반대론을 펴는 사람은 '반개혁적 인물'로 몰리는 분위기였다"고 폭로했다.

김교수는 "최선정 전장관은 의약분업 실시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입장이었으나 의사와 약사의 반발을 무마하라는 정치권의 주문에 따라 의보수가 인상 등의 미봉책을 썼다"고 말했다.

따라서 복지부 외에 청와대와 민주당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국정 최고책임자인 김 대통령이 다양한 정보채널을 통해 이 문제를 보다 다각적이고 깊이있게 판단하지 못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떻게 보면 공약사업이라는 지상 과제, 그리고 민생현안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 여기에 개혁추진이라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마냥 끌려다닌 셈이다. 이런 실패한 정책 때문에 국민이 수개월간을 병원 응급실 앞에서 가슴 졸여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현재 정치권과 사회 일각에서는 의약분업을 전면 재검토하자는 주장까지 터져나오고 있다.

하지만 의약분업 시행이 그러하듯 '반대를 위한 반대'식의 성급한 극단 논리는 또다른 후유증을 낳는다. 문제는 의약분업 자체가 아니다. 의약분업은 제대로만 시행된다면 고질적인 의약계의 썩은 물을 없앨 좋은 제도다.

다만 제도의 톱니바퀴가 제대로 돌릴 충분한 에너지가 갖춰져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관리ㆍ운영할 수 있는 인적 자질이 충족돼 있는가가 중요하다. 행여 또다시 그릇된 정보와 판단이 최고위층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herosong@hk.co.kr

입력시간 2001/03/28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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