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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강릉 선교장 민속박물관장 이강백

[인간탐구] 강릉 선교장 민속박물관장 이강백

'배다리' 지키는 영원한 악동

" 악질이예요, 악질."

이강백(54). 자신이 그렇다는 소리다. 악질까지는 몰라도, 악동기질임엔 틀림없다.

그 증거중 하나는 여성동지를 못살게 군다는 거다. 말이 여간 짖궂지 않다. 때로는 위험수위도 아찔아찔 넘어간다. 드물지만 정반대로 돌변하는 수도 있다. 용납하지 못할 실수를 하면 평소 막역했던 사이라도 가차없이 눈물이 쏙 빠지게 야단을 친다. 할 도리는 하고 보자는 주의다. 장단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처음 만나는 여성이라면 특히 헷갈리는 상대다. 물론 이럴 때도 그의 해명은 있다.

"농담이 심한 건 무섭게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겁니다. 굳은 표정으로 있으면 제가 아주 무서워보이거든요. 학교 다닐 때도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눈길만 마주치면 꼭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야, 이강백, 눈에 힘 풀어!' 사람들과 가까워지려고 애쓰는 겁니다."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 걸고 행동도 과격한 이 남자가 오히려 누구보다 점잖을 만한, 대단한 반가의 자제라는 것을. 조선왕족의 혈통을 물려받은 효령대군의 19대손. 게다가 민속박물관 관장이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명함을 갖고 있는 줄을.


방랑벽 가득 "평생 여행가가 되고 싶었다"

집안에서도 소문난 변종이다. 아버지는 강릉시장을 지낸 고 이기재씨. 올해 여든세살의 어머니는 전 관동대 가정학과 교수 성기희 여사.

이강륭 조흥은행 부행장이 친형이고 선교장 사랑채의 당호를 본 딴 출판사 열화당 대표 이기웅씨가 당숙이다. 예의범절 깍듯한 5남매중 차남. 유독 역마살이 끼었는지 어렸을 적 고향을 떠난 뒤 학창시절엔 운동선수로, 사회에 나와선 공직자로, 사업가로 변신하며 살았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여행가가 되고 싶었던, 잠재적 방랑자. 그런 그가 돌연 서울을 버리고 고향에서 뿌리를 내린 것도, 좀처럼 한 자리엔 좀이 쑤셔 못견디는 성미에 그간 10여년이나 온전히 자리를 지켜온 것도 그로선 다분히 이례적인 기록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유학가면서 '다시는 죽어도 강릉에 오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는데 결국 제발로 찾아와 이렇게 살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긴 어머니가 진즉에 예언하신 게 있긴 있습니다.

저를 낳고 유모가 사랑채에 출산소식을 전하러 가는데, 그때만 해도 거의 사라지고 없던 호랑이 한 마리가 갑자기 유모 앞에 나타나서 기절을 한 소동이 있었답니다.

그후로 '강백이는 아무래도 산신이 호랑이를 보내 부르는 것 같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자식이 모두 곁을 떠나는데도 이유없이 저만은 언젠가 돌아와 집을 지킬 것 같다는 예감이 들더라구요. 실제로 현실이 된거죠. 지금 제가 바로 영낙없는 선교장 호랑이 노릇 아닙니까."

왜 그리 고향을 벗어나려 안달했을까? 너무 반듯해서, 너무 엄격해서 그에겐 짐이었다. 어려서부터 환경이 남달랐다. 매번 제사 때마다 모이는 제관이 200여명.

매년 가을 소작인을 위한 1주일 위안잔치를 열면 강원도 거지가 모두 찾아와 먹고갔다는 부유한 대가(大家)였다. 가족 외의 식구만 청지기와 대목, 소목수, 자체 금은방과 약방, 마부, 매 기르는 사람, 유모, 요리사, 목동, 농사관리자 등 그야말로 대부대였다. 엄청난 부자이면서도 아낌없이 이웃에 베풀어 인심을 잃지 않았다.

근대ㆍ현대사의 격변기에서 소위 수많은 사대부 집안이 패가망신하는 것을 지켜본 조부모는 행여 집안의 전통이 무너질까, 특히 아랫대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많았다. 어디에 나가서도 행여 집안에 누가 될세라 어려서부터 몸가짐을 단속시켰다.

사소한 습관까지도 항상 제약이 따랐다. 대여섯살 코흘리개 나이에도 식사중 실수로 젓가락에서 뭘 흘리면 당장 팥을 그릇채 갖다놓고 종일 팥알을 젓가락으로 집어 옮기는 훈련을 시켰다.

벗어둔 신발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벌, 문 닫을 때 조금만 소리가 나도 어김없이 불벼락이 떨어졌다. 허물없이 뛰노는 다른 아이들이 부러웠다.

종손인 형은 어른들 뜻대로 모범생처럼 자랐지만 그는 반대였다. 1년에 절반쯤 여행으로 전국을 떠돌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았다. 초등학교때 시작된 서울생활은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상경하자마자 풀밭에 나온 망아지처럼 숨통이 트였다. 어딜 가든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성미.

처음부터 8년동안 내리 싸움의 연속이었다. 이사하자마자 동네 골목대장자리부터 뺏은, 무서운 촌놈이다. 테니스 특기자였던 학창시절을 거쳐 대학2년 때 대학선수권대회의 단ㆍ복식 우승을 모두 휩쓰는 등 한번 눈독 들인 일엔 2등도 싫었다.

휘문고,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한 후엔 거대한 조직생활이 좋아보여 공무원이 됐다. 1975년 감사원에 들어가 감사위원회에 상정되는 안건을 다루는 사무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3년만에 그만뒀다. 경직된 조직생활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업을 시작했다. 콘크리트나 방파제 호안 제조업체 사장. 감사원 시절 미리 구상해뒀던 일이었다. 직접 고안해낸 특허만 20여종을 갖고 있었다.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떵떵거릴만큼 큰 돈을 벌었지만 한번에 떨어먹기도 했다.

자신있게 100억원이나 되는 거금을 들여 시작한 벽돌제조사업이 시장상황의 오판으로 빛도 보지 못한 채 곤두박질 쳤다. 본전은 커녕 간신히 이름만 건져나왔다. 한달만 더 붙들고 있었어도 부도를 맞을 뻔 했다.


사업실패 뒤 방황, 어머니 곁으로

선교장으로 돌아온 것도 그 와중의 우연한 일이었다. 사업실패의 충격으로 몇달 동안 방황했다.

설악산을 오가며 마음을 달래던 중 어머니 얼굴을 보고 가겠다고 강릉집을 찾았다. 도착해보니 칠순의 노모는 약한 몸에 계단을 헛디뎌 다리가 상한 채 아들을 맞았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유난히 아껴주었던 어머니. 당뇨로 아버지를 잃고 조모마저 돌아가신 뒤 수십년간 홀로 사신 어른. 아파도 수발 들어줄 사람 하나 없었다. 무조건 어머니 곁을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느닷없는 귀향통보에 의아해하는 가족도 아랑곳 없이 1991년 어느 봄날, 30여년의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집 선교장으로 이삿짐을 옮겼다. 얼마후 가족들도 뒤따랐다.

그의 고향집인 선교장은 1965년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된 전통한옥이다. 조선조 사대부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안채와 별당, 사랑채, 정자 등이 총 3만여평의 부지에 그림처럼 펼쳐진 채 현재 민속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서울에서 내려온 첫 해, 집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문화재라곤 하지만 관리가 부실해 사방이 구둣발 자국에다 아수라장이었다.

당장 대나무, 소나무 숲으로 둘러쳐진 집주위는 밤마다 몰려든 아베크족의 천국. 해괴한 광경 때문에 연로한 노모는 아예 해만 지면 방안에서 한발짝도 못 나가는, 되레 당신이 감옥생활을 하고 있었다.

곧바로 야간에 외부인의 출입부터 막았다. 10개년 계획을 세우고 본격적 정비에 들어갔다. 허술한 건물을 고치고, 전에 없던 도자, 목공예, 공방까지 아담하게 갖추는 사이 선교장엔 다시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무장한 도둑과 목숨 건 대결도 수차례 겪었다. 소장한 유물은 서적 3,000권, 의상 6,000점, 수예 6,000점, 생활도구 3,000점 등 대형박물관을 조성해도 될만큼 방대한 양.

문화재 절도범에겐 수시로 표적이 되었다.

"좀도둑 정도가 아닙니다. 인적도 드물지, 여럿이 몰려다니지, 아주 겁나는 상황입니다. 자체 경비원까지 눈 앞에서 뻔히 도둑을 보고도 무서워서 대항하지 못할 정돕니다.

첫 해엔 한달 사이 연달아 네번 도둑이 든 적도 있습니다. 워낙 위치가 외진데다 그땐 소나무, 대나무 숲이 둘레로 무성할 때라 어떨 땐 제가 제집이면서도 웬지 등골이 오싹하도록 무섭고 음산할 때가 있습니다.

그날도 웬지 예감이 안좋았던 터에 자꾸만 한밤중에 개가 짖어 순찰을 나가봤더니 수상한 물체가 띄었습니다. 천장을 뚫고 들어온 도둑들이었습니다.

처음엔 꿈쩍도 안하다가 제가 공기총으로 공포탄까지 쏘며 다가가자(당시 신고없이 공기총 소지 가능) 그제서야 도망을 치더라구요.

저도 월남전까지 겪은 놈인데, 이쪽에서 워낙 세게 나가니까 겁을 먹은 모양입니다. 그전엔 개가 짖지 못하도록 아예 동네의 개부터 싸그리 죽인뒤 들어온 도둑도 있습니다. 그때 마주쳤더라면 아 저까지도 개죽음을 당했을겁니다."


문화재 지키려 강릉시와 전쟁

그 일이 있은 뒤 곧바로 강릉시에 보안시스템 설치를 요구했다. 문화재를 보호할 책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시에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일어난 일이 지금도 강릉 일대에 유명한 '선교장 보이콧 사건'.

특히 문화재 관계자 사이에선 소문이 자자한 전대미문의 에피소드다. 즉, 시로부터 거절당한 이 관장이 선교장에 돌아가자마자 즉시 박물관을 폐쇄해버린 것. 관리인들조차 당황한 지시였다.

"당국에서 지켜주지 않는 문화재는 스스로라도 지킬 수밖에 없다"며 일체 입장객을 받지 않았다.

시민과 언론쪽에서 당장 반응이 나타났다. 사태의 전말이 알려지자 강릉시에 항의가 쏟아졌고 결국 당국에선 부랴부랴 보안장치를 설치하겠다고 나섰다. 성깔있는 이 관장의 판정승. 악명은 얻었지만 문화재는 지켰다.

현재 받는 관람료는 청소, 보수 등을 맡은 관리인의 월급으로도 빠듯하다. 이득을 보기는 커녕 10년 사이 제돈만 20억원이나 까먹었다. 앞으로도 관람료 수입엔 별 관심이 없다.

자존심이라면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기 싫은 몸. "집안 전통을 팔아 돈을 번다"는 소리를 뿌리부터 막기 위해서다. 젊어서 벌어둔 돈이 그래서 더 요긴하다.

"참 묘한 일입니다. 밖에선 전혀 다른 일만 하다가 왔는데 지나고나서 보니 그 모든 과거의 일이 결국엔 지금 나를 여기서 이렇게 써먹게 하려고 하늘이 모의한 것 같더란 말입니다. 행정적인 일부터 직접 보수공사를 하는 기술까지 이곳 일과 연결되지 않은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다음 세대가 걱정입니다. 한옥의 정서나 추억 없이 자란 요즘 세대에 과연 누가 제 다음에 선교장을 지킬지 의문입니다.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설령 지킬 사람이 없어 언젠가 선교장이 허물어진다 해도 그것 역시 선교장 운명일테니 받아들여야지요."

짖궂기만 하던 이 관장의 얼굴이 순간 쓸쓸해진다. 그에게도 한가닥 기대는 있다. 누구보다 멀리 달아났던 그가 어느날 예고없이 돌아왔듯 훗날 뜻밖의 누군가도 자신처럼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는 희망이다.

선교장 호랑이의 얼굴에 또다시 장난기어린 웃음이 스물거린다. "그렇다면 지금도 하늘에선 뭔가 작전이 진행되고 있겠죠? 다음 낙점 대상이 누군지는 몰라도 지금 열심히 사전코스를 돌고 있겠지만."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1/03/28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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