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51)] 사쿠라

지금은 거의 쓰지 않지만 오랫동안 우리 정계에서는 '사쿠라'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요즘의 '2중대'처럼 권력의 앞잡이를 뜻하는 말이다.

벚꽃을 가리키는 일본말 '사쿠라'의 이런 특별한 의미는 일제 식민지 역사에서 비롯했다. 일본도 미웠지만 그 앞잡이로 나선 동포는 더욱 미울 수 밖에 없었다. 같은 동포였지만 생각과 형태가 일본인 빰치는 친일파나 일본 앞잡이를 굳이 '사쿠라'라는 일본말로 부른 것도 본질과 정체를 밝히겠다는 암묵적 의지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벚꽃을 일본의 상징으로 여긴 것은 우리 스스로의 인식이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 이래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에서 일본의 지도층은 벚꽃을 나라꽃으로 내세우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썼다.

특히 태평양 전쟁 당시의 군국주의 세력은 '일본의 남아로 태어난 이상 조국을 위해 벚꽃처럼 아름답게 지는 죽음을 택해야 한다'고 국민을 세뇌시켰다.

전쟁이 끝난 직후 일본 전국의 공원과 대로변의 벚나무는 군국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마구 베어 넘겨졌다. 한 국민이 특정 식물에 이토록 상반된 태도를 보인 예도 세계적으로 드물다.

엄밀한 의미에서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도, 먼 옛날부터 일본을 상징해 온 꽃도 아니다.

일본은 1999년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국기와 국가로 정했지만 국화를 정한 바는 없다. 그냥 '하나(化)'하면 으례 벚꽃을 가리킬 정도로 일본 국민이 애정과 친근감을 느끼는 꽃이라는 점에서 국화로 여길 수도 있지만 우리 문궁화의 예에서 보듯 나라 꽃이 대중적 선호를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전인 이아나미쇼텡의 '고지엔'이 '일본의 나라꽃은 벚꽃 또는 국화'라고 적고 있듯이 천황가의 문장인 국화와 우열을 가리기도 어렵다.

벚꽃에 대한 일본인의 정서도 뿌리가 그리 깊지는 않다. '사쿠라'의 어원은 신화집인 '고지키(712년)'에 여성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고노하나노사쿠야비메'의 '사쿠야'라는 것이 통설이다.

'나무꽃인 사쿠야처럼 아름다운 공주'를 뜻한다. 8세기 중반이후 편찬된 만요슈에 벚꽃을 읊은 노래가 44수나 돼 언뜻 나라(710~784년) 시대 이전부터 특별한 애정을 기울였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만요슈는 매화를 읊은 노래를 무려 118수나 싣고 있다. 당시 일본의 지배층이 모방한 중국 한시가 벚꽃보다는 매화를 즐겨 노래한 때문이다.

'고킨와카슈(905년)'에 이르러 벚꽃 노래가 양적으로 매화를 압도한다는 점에서 헤이안(794~1192년) 시대 이후 벚꽃에 대한 일본적 정서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당시 일본인들이 대했던 벚꽃은 주로 '야마자쿠라', 즉 자생하는 산벚꽃이었다. 현재의 재배종과 달리 잎이 꽃과 함께 피기 때문에 화려함이 덜하다. 소박한 아름다움은 '화사하게 피었다가 깨끗이 진다'는 벚꽃의 이미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현재의 이미지는 에도(1603~1867)시대 말기 현재 도쿄 스가모 인근의 소메이에 살던 정원사가 2종의 재래종에서 만들어 낸 잡종인 '소메이요시노'에 의해 이뤄졌다. 은은한 분홍색을 띤 꽃이 나뭇가지가 휠 정도로 가득 피었다가 1주일 정도 지나면 깨끗이 지고 그제서야 잎이 핀다.

소메이요시노는 일본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고 이때서야 일본인의 벚꽃 사랑이 분명한 자리를 잡았다. 소메이요시노는 현재 일본 전체 벚꽃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불행히도 때마침 근대적 국가·국민 건설이 정치적 과제로 등장한 가운데 벚꽃을 일본 고유의 꽃이라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식물학자들이 잇따랐다.

이런 분위기는 침략전쟁의 역사를 통해 도를 더해갔다. 중국과 인도, 한국의 자생종 벚꽃을 소개했던 '벚꽃 박사'미요시 마나부 조차도 1938년의 저술에서는 그런 내용을 모두 삭제했을 정도였다.

역사가 강요한 이런 잠재의식 때문에 아직도 벚꽃르 그냥 꽃으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벚꽃놀이인 '하나미'. 특히 밤 벚꽃놀이인 '요자쿠라'를 즐기는 남녀노소의 모습에서 그런 잠재의식을 읽어내기는 어렵다. 축축 늘어진 가지에 다홍빛 꽃을 단 '시다래자쿠라'의 인기에서도 벚꽃이 단순히 꽃으로 정착해 가는 느릿한 흐름을 느낄 수 있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1/04/02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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