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최전선 24時] 서녘의 파도와 싸우는 '독수리 28형제'

해군의 최선봉-
'참수리' 고속정

인천 군항을 빠져 나온 해군 고속정이 속도를 높였다. 스크루가 일으키는 물보라가 높아지면서 얼굴을 때리는 해풍의 강도도 강해졌다. 고속정 항해는 지프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덕적도와 선미도를 지나자 서해의 망망대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서쪽으로 침로를 잡은 함수 저쪽으로 수평선이 둥그렇게 떠 있다.

육지에서는 봄기운이 완연한 3월 말. 고속정 갑판은 아직 겨울이었다. 느긋하게 바다를 감상할 요량이었지만 곧 선실로 쫓겨 내려와야 했다. 30노트 이상 속도로 달리는 고속정이 맞받아치는 해풍은 온 몸을 금세 꽁꽁 얼게 만들었다. 고속정이 일으키는 물보라가 폭포수처럼 상갑판으로 쏟아졌다.


뛰어난 기동력으로 연근해서 큰 위력

고속정(PKM)은 '참수리'로 불린다. 배수량 150톤에 최고속도 36노트, 전장 37m, 전폭 6.63m, 높이 10.7m다. 무장은 선수의 30mm 쌍발포(또는 40mm 포) 1문과 선미의 20mm 발칸포 2문이다.

이들 포는 컴퓨터 사격통제장치를 통해 자동발사되거나, 각 포에 탑승한 사수에 의해 수동으로 발사된다. 고속정은 덩치가 작은데다 날렵해 수심이 얕은 연근해에서는 위력을 발휘한다. 지난 99년의 연평해전에서 '올라타기'로 북한 고속정과 어뢰정을 격퇴한 주역도 고속정이다.

고속정 승조원은 해군의 최선봉이란 자부심을 강하게 갖고 있다. 고속정은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가장 먼저 출동해 확인과 사후조치를 해야 한다. 해상 검문ㆍ검색작전의 최일선을 맡고, 해전이 벌어졌을 때는 대형함정의 전방에 산개해 임무를 수행한다.

고속정은 바다의 보병이다. 위험부담도 그만큼 크다. 연평해전 당시 고속정 정장 안지영 대위가 북한측이 쏜 AK47 소총탄에 맞아 부상한 것이 위험도를 말해 준다. 연평해전 직후 해군은 상갑판의 함교창을 방탄유리로 교체했다.

인천해역방어사령부 소속 고속정 승무원은 밤낮이 반대다. 일몰 직후 출항해 다음날 일출 직전 귀항한다. 야음을 이용해 주로 항로에서 엔진을 끈 채 매복해 있다가 상황이 닥치면 즉시 현장으로 달려간다.

해양경찰과 협력해 북방조업한계선에 근접하는 어선을 단속하고, 밀항선을 나포하는 것도 주요 임무다. 고속정은 항상 출동대기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3척으로 구성된 고속정 편대는 각각 5분출동대기, 30분출동대기, 1시간출동대기 상태에 있다. 5분출동대기 고속정은 항구에서 항상 시동을 켜고 있다. 가장 느긋한 1시간출동대기 고속정의 영외거주자도 부대 근처를 떠날 수 없다. 대기상태에 들어가면 편대교대 때까지 가족과 나들이는 꿈도 못꾼다.

고속정 정장의 정위치는 강풍과 바닷물에 완전히 노출된 상갑판이다. 고속정은 대형함정과 달리 상갑판을 함교라 부른다. 기동중인 고속정 정장은 어떤 기상조건에서도 상갑판을 떠날 수 없다.

고속정에서 함교는 가장 전망이 좋다. 대신 함교는 나지막한 전면 함교창을 제외하면 바람과 눈비, 바닷물에 완전 무방비다. 겨울이면 동사직전의 혹한을, 여름에도 추위를 느끼는 곳이 고속정 함교다. 겨울철 함교는 튀어 올라온 바닷물로 빙판을 이룬다.


파도와 추위 고스란히 맞닥뜨리며 근무

취재진을 태운 PKM-292의 정장 김동석 대위는 어느샌가 두툼한 스키장갑을 끼고 있었다. 착용한 마이크로폰으로 항해지시를 내리며 2시간 이상 무표정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선수에 부딪힌 파도가 잇달아 함교창을 넘어 쏟아졌다. 정장과 함께 함교를 지키고 있는 부장(중위)과 전령수병도 바닷물을 뒤집어 쓴 채 떨고 있었다.

방수ㆍ방풍이 되는 고속정복과 스키고글을 착용했지만 쏟아지는 바닷물을 막기엔 역부족. 1년간 정장근무를 하면 얼굴에 마른버짐이 핀다는 것이 고속정 근무 경험자의 이야기다.

김 대위는 지난해 8월부터 정장근무를 시작했다. 그에게 추위와 바닷물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정위치 근무는 일도 아니다. 추울 땐 옷을 많이 입으면 된다. 함의 안전과 대원관리가 더 어렵다. 대원들에 불미스런 일이 없도록 하고, 전력을 최대화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고속정 승조원은 모두 28명. 정장과 부장, 기관장 등 장교 3명과 부사관(하사관) 14명, 수병 11명이다. 하갑판 침실에는 야간근무를 마친 비번 승조원들이 담요를 푹 덮어쓴 채 잠자고 있었다.

항로 전방 곳곳에 어망표지용 흰색 스티로폼 부유물이 나타났다. 전방을 주시중인 정장이 잇달아 조타실에 방향과 속도조절 명령을 내렸다. 고속정이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며 어망을 피해 나갔다. 고속정 뒤로는 긴 거품궤적이 뱀처럼 꾸불꾸불 따라오고 있었다.

김 정장에 따르면 항해중에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망이다. 특히 해면 가까운 수중에 떠있는 폐어망은 지뢰나 다름없다. 폐어망이 스크루에 감기면 배가 기동불능에 빠질 수 있다. 저수심도 복병이다.

서해안에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모래암초가 적지 않다. 봄ㆍ여름 안개 역시 골칫거리. 안개가 심할 경우에는 함교에서 함수가 보이지 않는다. 짙은 안개속에서는 레이더를 이용해 저속항해할 수 밖에 없다. 부두에 들어갈 때는 눈을 감고도 레이더에만 의존해 항해할 수 있다는 것이 김 정장의 말이다.

출항한 지 3시간 남짓. 무전교신이 이뤄지자 잠시 후 수평선에 점이 하나 나타났다. 점은 순식간에 커져 고속정으로 변했다. PKM-292와 해상계류할 PKM-339였다. 파도속에서 고속정끼리의 해상교류는 쉽지 않다. 옆구리를 맞댄 고속정들이 파도에 밀려 부딪히면서 좌우로 크게 요동쳤다.

"야, 배 깨지겠다"는 저쪽 정장의 농담이 들려왔다. PKM-339의 정장 김인국 대위는 PKM-292의 김동석 대위와 해사 50기 동기다.


1개편대 출동대기, 우리어선 안전이 최우선 임무

취재진을 옮겨 태운 고속정은 침로를 북서쪽으로 잡아 쏜살같이 내달렸다. 40분 남짓 지나자 소청도와 대청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목적지는 서해 최북단 함정기지인 대청도 고속정 기지(기지장 이성진 대위).

대청도 기지에는 고속정 1개 편대가 상시 출동대기중이다. 북한 함정에 대한 대응출동과 백령도~인천을 운항하는 여객선 근접호송, 조업통제가 주요 임무다. 지난 1월17일 백령도 근해에서 항해중 불이 난 여객선 데모크라시호의 승객들을 구조한 것도 대청도 주둔 고속정 편대였다.

대청도 주둔 고속정 편대장 권기환 소령에 따르면 요즘 북한함정과 어선의 도발은 현저하게 줄었다. 과거에는 우리측이 하루에 7번 비상출동하기도 했지만 최근 북한함정은 일상적인 교대 외에는 움직임이 거의 없는 상태.

편대장은 "요즘 적 군함의 북방한계선(NNL) 접근은 거의 없고, 북 어선도 고정된 위치에서만 조업한다"고 말했다. 북측이 자체 조업통제를 강화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의 상황평가.

대청도 기지 앞 해변에는 북한의 무동력 철제 전마선 2척이 인양돼 있었다. 조류에 흘러와 레이더에 잡힌 것을 고속정이 예인해 온 것이다. 서해5도와 북한땅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3개의 경계선이 있다.

어로한계선과 적색선, NNL이 차례로 해도상에 그어져 있다. 남북교류는 대청도 어민에게 긴장완화로 와 닿고 있다. 조업중 어로한계선에 접근하는 사례가 느는 게 그 증거다. 조업중 조타수가 졸거나 해류에 밀려 깜박하는 경우보다 물고기를 쫓아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빈도가 높다.

어선이 어로한계선에 접근하면 고속정에는 비상이 걸린다. 한 고속정 승조원은 "어로한계선에 접근하는 어선은 제지한다기 보다는 붙잡아 온다는 표현이 옳다"고 말했다. 눈앞에서 물고기를 보고도 따라가지 못하는 어민들이 좀처럼 지시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해군에 의해 선수를 돌린 어민은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남북한이 교류하는 세상인데 좀더 올라가서 고기를 잡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는 식이다.

대청도와 소청도는 손짓하면 보일 듯 가깝다. 대청도에서 백령도까지는 여객선으로 30여분. 부두에 정박한 고속정은 밤 9시가 넘으면 수병들과 함께 취침준비에 들어간다.

'매미집'으로 불리는 선실 침대로 올라간 수병들은 '오늘밤도 무사히'를 기원하며 잠을 청한다. 출동을 알리는 비상 사이렌과 마스트의 붉은 경고등이 오늘밤은 켜지지 않기를 바라며. 수병들에 와 닿는 남북교류의 분위기는 후방의 국민이나 대청도 어민과는 다르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04/04 11:43


배연해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