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으로 가는 일본의 역사인식

역사교과서 검정통과, 한중 양국에 분노 안겨

2002년도용 초 중학교 교과서가 일본 문부과학성 교과서 검정 조사심의회의를 최종 통과한 4월 3일 마치무라 노부타카 문부과학성 장관은 담화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교과서 검정은 국가가 특정 역사인식이나 역사관을 확정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검정을 통과했다고 해서 그 교과서의 역사관이 정부와 일치하는 것으로 해석돼서는 안된다.(중략) 이번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근린제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우려가 표명됐지만 검정은 학습지도요령 및 '근린제국 조항'을 포함한 검정 기준에 의거, 엄정하게 이뤄졌다.

일본 정부의 역사에 대한 기본 인식은 1995년 8월15일 총리담화가 밝혔듯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제국 국민에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준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 들이고 통절한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데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

초등학교 과정에서 원주율의 소수점 이하를 버리고 그냥 3으로 계산하도록 하고 전자계산기를 사칙연산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엄청난 교육 과정의 변화를 언급하지 않은 채 역사문제만을 언급한 극히 이례적인 담화이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편찬하고 후소샤(扶桑社)가 찍은 역사교과서가 부른 한중 양국의 커다란 반발을 의식한 때문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일본 정부의 설명과 달리 검정을 통과한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한중 양국에 커다란 분노를 안겼다.


과거 바라보는 시각에 큰 변화 없어

애초에 시대착오적 황국사관을 바닥에 깐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는 137곳이나 수정돼 검정 신청 당시와는 크게 달라졌다.

한반도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크게 약화한 대신 부당ㆍ강제성을 언급했다. 강화도 사건을 일본이 유발했고, 그 결과 체결된 한일수호조약이 불평등조약임을 인정하기도 했다.

또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구미 열강이 지지했다는 내용을 당시의 동북아 정세를 배경으로 들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표현을 완화했고 한일합방이 한국내의 반대를 무력으로 억누르고 이뤄졌음을 밝혔다.

한일합방에 대한 한국내의 '찬반 양론'도 '일부의 수용과 격렬한 저항'으로 바뀌었다. 토지조사 사업과 동화정책에 대한 반발도 소개했다. 3ㆍ1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했다는 내용이나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좌익과 함께 해를 입었다는 기술도 새로 들어갔다. 징용과 징병, 황민화 정책, 창씨개명에 대한 언급도 추가됐다.

이런 대폭적인 수정에도 불구하고 이 교과서의 문제점은 완전히 제거되지 못했다. 처음 한중 양국과 일본내 진보세력이 우려했던 대로 과거를 바라보는 기본시각이 바뀌지 않고 남았다.

우회적으로 동남아 침략이 식민지 해방에 기여한 것으로 기술했고 도쿄 전범재판의 정당성이나 난징학살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제기했다. 군대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등 가해 사실의 기술이 함께 검정을 통과한 다른 7종의 교과서에 비해 크게 부족하다.

어떻게든 검정을 통과해야 한다는 전술에서 수정 요구에 응하는 대신 어떤 형태로든 '만드는 모임'의 주장을 남기려는 편법을 곳곳에서 쓰고 있다.

가미가제 특공대에 대해 '미군도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됐다'는 일방적인 찬양이 지적을 받자 이를 손질하는 대신 나라를 위한 각오와 다짐으로 가득찬 특공대원의 유서를 싣고 토론을 요구한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거의 수정을 거치지 않고 통과된 다른 7종 교과서가 가해 사실 기술에서 크게 후퇴한 점이다.

우선 군대위안부 문제를 기술한 교과서가 7종에서 3종으로 크게 줄었다. 교과서 시장의 80%를 장악한 이른바 '빅4' 가운데 니혼쇼세키(日本書籍) 교과서가 관련 기술을 강화해 눈길을 끌었으나 나머지는 모두 뺐다. 사실상 중학교 교과 과정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교육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학생들의 연령으로 보아 군대위안부 문제가 중학교 교육과정에 포함된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교육 현장의 지적에 따라 출판사들이 자율적으로 관련 기술을 뺐다는 게 문부과학성의 설명이다. 27종의 교과서 가운데 26종이 군대위안부 문제를 기술한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내년도 검정을 지켜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침략'대신 '진출' '남진' 표기

그러나 이런 설명은 7종 교과서의 제목과 본문에서 '침략' 용어가 크게 줄어드는 대신 '진출''남진' 등으로 바뀐 사실에 이르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더욱이 7종 교과서는 일본군이 대중 게릴라전의 기본 전술로 삼았던 '모두 태우고, 모두 빼앗고, 모두 죽인다'는 '삼광(三光)작전'은 물론 인체실험으로 악명높았던 731부대의 만행,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일본군의 가해 사실을 거의 은폐했다.

내년부터 수업시간이 주4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어드는 데 따라 전체적으로 교과서의 양이 30% 정도 줄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변화이다.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과거사 반성에 충실했던 7종 교과서의 이런 변화야말로 일본 역사 인식의 전반적 후퇴를 상징한다. 1982년 교과서 파동이 침략이냐 진출이냐를 둘러싼 것이었음을 상기하면 크게 보아 교과서의 역사 인식이 82년 당시로 되돌아 갔다고 볼 수 있다.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가 일본중심적 사고 방식에서 씌어진 것과 다른 7종의 교과서가 세계사적 보편성을 희석한 것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흐름이다.

어느 나라나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때는 세계사의 큰 흐름속에서 객관성과 스스로의 역사를 보는 주관적 해석을 조화시키려 애쓴다. 절대적인 균형 확보가 어려운 데다 역사가 늘 현재의 관점에서 되씌어진다는 점에서 균형축은 수시로 변한다.

2차 대전후 일본 역사 교과서의 인식은 1945~55년, 1956~82년, 1982~2001년 등 시기별로 진보와 보수 시각 사이에서 요동쳐 왔다. 전후의 진보적 분위기는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 자민당이 출범한 이후 보수파의 장기 집권에 따라 180도 바뀌었다.

56~82년의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침략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한중 양국의 격렬한 반발에 따른 82년 교과서 파동을 거쳐 시정됐다. 그후 20년만에 일본의 역사 인식이 다시 뒷걸음질을 시작한 것이다.

이런 변화의 배경으로 우선 지적되는 것이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다. 80년대 후반 미국에서 미일 역전 우려가 일 정도로 위를 향해 치달았던 일본 경제는 거품 경제 붕괴와 함께 90년대를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렸고 아직까지도 헤어나지 못했다.

2차 대전후 최초의 디플레이션 선언이 나올 정도의 경기 침체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함께 국민적 자신감의 상실을 불렀다.

이런 무력감은 필연적으로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를 요구하게 된다.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나가노ㆍ구마모토ㆍ치바 현 지사 선거에서 잇따라 풀뿌리 선거운동에 의존한 시민후보가 여야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또 보수파의 논객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지사의 인기가 날이 갈수록 높아져 '이시하라 신당'의 발족이 점쳐지기도 한다. 전혀 방향이 다른 흐름이지만 변화 요구의 반영이라는 점에서는 동전의 양면이다.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가 깔고 있는 '역사에서 긍지와 자신감을 되찾자'는 주장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는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는 일본사를 통해 부침을 거듭해 온 '쇄국 멘털리티'가 고양기에 접어든 신호라고 진단했다.

메이지 유신 이전의 쇄국 멘털리티는 그나마 당시의 국제화 수준으로 보아 정서 파탄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세계가 활짝 열린 오늘날의 쇄국 멘털리티는 집단적 정서 파탄을 부르게 된다. 객관성을 결여할수록 폐쇄적이 되고 마침내는 공격적인 정신 구조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일본정계의 지도력 실추도 한 요인

오는 26일 출범할 새 내각의 총리가 될 자민당 총재 자리의 마땅한 주인이 없듯 일본 정계의 지도력이 실추한 것도 이번 교과서 파동의 큰 요인이다.

1982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총리는 지금도 자민당 우파의 정신적 지주일 정도로 보수적 정치성향을 띠고 있었지만 강한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의 미화ㆍ정당화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질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외교 현안을 해결한다는 자세로 한중 양국의 수정 요구에 응했다.

검정통과후 문부과학성 장관의 추가 수정권고는 강제성이 없지만 총리가 앞장서 밀어 붙이면 출판사는 따를 수 밖에 없다.

한중 양국의 여과하지 않고 쏟아내고 있는 우경화, 군국주의화 우려만으로는 역사 인식 후퇴의 배경에 놓인 일본의 변화 흐름을 제대로 짚기 어렵다.

일본의 사회 발전 단계는 그런 단순화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고도화했다. 한쪽에서 보수화 물결이 일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시민단체의 풀뿌리 운동이 활발하게 일고 있다.

7월에 본격화할 교과서 채택 과정에서도 이런 두 물결의 힘대결이 빚어질 것이다.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가 점유율 10%를 목표로 내건 데서도 확인되듯 아직 명백한 과거 미화ㆍ정당화는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에게는 거부감을 던진다.

일면만을 강조, 우리 스스로의 의식 우경화를 반영하는 '군국주의화' 주장으로 일본을 몰아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현재 교과서 문제의 최종 결정권은 일본 국민이 쥐고 있다. 일반 국민의 '외압 거부감'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조용한 연대로 양심적 시민단체의 발언권을 높여 일본내에서 문제가 해결되도록 이끄는 보다 높은 차원의 전술ㆍ전략이 필요하다.

온건 보수파를 '만드는 모임' 등의 강경 보수파에 동조하게 만들거나 한국에 대해 커다란 호감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염한 감정을 심는 것은 온건 보수파를 겨냥, 대폭적인 수정 요구에 응한 '만드는 모임'의 전술에도 미치지 못하는 하지하책(下之下策)이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1/04/10 19:03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