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ㆍ검사 갈등] 한 뿌리, 두 갈래…미묘한 경쟁심

눈앞 대결 보다는 대의를 보아야

올해 초 대법원은 '검사는 피고인과 다투는 당사자지 추궁하는 역할이 아니다'라며 재판시 검사의 자리를 판사석이 있는 법대 쪽이 아닌 피고인쪽으로 내려가라는 취지의 형사소송법을 개정하려다 검찰의 반발을 샀다.

지난달에는 대법원이 판사들에게 법인카드를 발급키로 하자 검찰도 질세라 검사들에게 업무 추진비를 지급하는 대응을 했다.

또 올해 1월에는 '문화상품권'이라는 명칭의 상표권 인정 여부를 놓고도 한바탕 자존심 대결을 펼쳤다.

1994년에는 법원이 검사가 재판 때 법관과 같은 출입문 이용을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예규를 만들다가 검찰과 신경전을 벌이는 등 그간 판ㆍ검사간의 자존심 대결은 공소나 양형 등 업무적인 것에서부터 극히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잦았다.


갈등 잉태한 힘의 불균형

판ㆍ검사 갈등의 시초는 30년전 1차 사법 파동 때로 거슬러 올라 간다.

박정희 정권 시절이던 1971년 7월 27일 서울지검 공안부(최대현 부장검사)는 변호사로부터 출장비를 지원받은 이범열 부장판사 등 판사 2명에 대해 뇌물 수뢰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영장은 법원에서 '도주와 증거 인멸의 위험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됐지만, 현직 판사에 대한 검찰의 영장 청구는 법조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판사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나 집단 사표를 제출하며 반발했다.

이 사태는 한달간의 지리한 공방 끝에 민복기 대법원장이 사법권의 독립을 책임지는 선언을 함으로써 일단 봉합 됐지만 그 앙금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법원과 검찰이 이처럼 앙숙 관계에 있는 1차적 원인은 두 기관이 원천적으로 갖는 구조적 특성 때문이다. 양측은 모두 스스로를 '인권 보호의 최후 보루'임을 자임한다.

하지만 양측은 적절한 힘의 배분을 통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지렛대의 양쪽 끝에 서 있다. 검찰은 범법 행위를 한 자에 대해 공소권을 행사함으로써 다수 국민의 안위를 보호하고, 법원은 검찰이 기소한 피의자에 대해 법과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

겉으로만 보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상보(相補) 관계에 있는 법원과 검찰의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양측의 자존심 대결이 시작됐다. 속내를 들여다 보면 판사와 검사 간에는 정권과 시대 배경에 따라 분명한 힘의 차이가 존재했다.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힘의 불균형은 반대편의 견제를 부추겼고, 그것이 확전돼 갈등 양상으로 치닫곤 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런 힘의 중심은 검찰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으로 군사 독재 정권이 이어질 때마다 검찰은 옷을 갈아 입으며 정권의 '시녀'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역대 정권은 검찰에 힘을 실어주고는 '엄정한 법의 집행'이라는 미명하에 사실상의 검찰 통치를 했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권한 집중은 남용을 부르면서 검찰의 위상과 신뢰를 떨어뜨려 국민의 신뢰를 잃게하는 원인이 됐다.


견고한 성벽, '검란' 겪으며 균열

문민 정부 말기까지 정점을 누리던 검찰 파워는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조금씩 누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민의 정부는 출범 직후인 1998년초 검찰을 순치(馴致) 시키기 위해 검찰 내부에 대한 경영진단을 실시하는 등 검찰 개혁에 들어갔다.

하지만 DJ 정권의 검찰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법무부와 함께 정부 개혁의 도마 위에 올랐던 검찰은 자기 조직이 형사사법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법원의 개혁과 연계시켰다. 결국 이 안건은 사법개혁추진위원회로 넘어 가면서 흐지부지됐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일부에서는 검찰 조직을 손에 넣기 위한 엄포성이었다는 평가도 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검찰의 위상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특히 대전법조비리 사건과 관련한 항명ㆍ서명파동, 김태정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옷로비 사건, 진형구 대검공안부장 사건 등이 치명타였다. 잇단 '검란(檢亂)'을 겪으면서 검찰의 견고한 성벽에 균열이 온 것이다.

법원 역시 정치권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간 정치인이나 재야 인사들에 대한 판결이 과연 법과 양심에 따라 행해졌는가에 의구심을 갖게하는 사례가 있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유권무죄, 무권유죄'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법원이 검찰 보다 국민적 지탄을 덜 받는 것은 법원 자체의 조직과 인사 구조 시스템 때문이다. 법원은 검찰 보다는 정치권의 영향을 덜 받게 구조가 짜여져 있다.

검찰은 '검사동일체(檢事同一體)'원칙에 따라 상명하복(上命下腹)의 엄격한 위계 질서가 지켜지는 유일한 관료 집단이다. 상부의 명령은 검사 개개인의 판단에 우선한다.

사소한 공문 하나도 모두 상부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여기에 기소독점이라는 배타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인사권은 검찰 총장이 아닌 법무부 장관에게 있어 정치권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국회의원이나 장관 같은 정치권 주요 인물의 구속은 법무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런 안팎의 상황으로 인해 검찰 중립을 논하는 것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는 말까지 나온다. '검찰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는 말이 우리 현실에서는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반면 법원은 검찰에 비해 외부 입김을 덜 받는다. 기본적으로 법관에게는 검찰처럼 상하 위계 조직이 명확하지 않다. 15년 이상 재직해 부장 판사로 승진하기 전까지는 직급 변화가 없이 오직 판사로만 남는다.

또 검찰처럼 '검사동일체 원칙'같은 것이 없고, 판사 개개인이 하나의 독립된 판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상부 눈치나 보직에 연연하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하면 된다.

개인적으로 범법 행위만 하지 않으면 법복을 박탈 당하지도 않는다. 판사들은 종종 이런 정황들을 예로 들며 검사들을 공격한다.


연수원 성적 빗댄 자존심 싸움

판사와 검사의 감정 싸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엘리트 의식이다. '어느 쪽이 더 우수한 집단이냐'하는 자존심 싸움이다.

연간 100명 내외를 선발했던 사법시험 22기(1980년)까지는 본인 의사에 따라 마음대로 판사나 검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다 사시 23기부터 합격자수를 300명으로 늘리면서 판사나 검사직 임용은 철저하게 사법 연수원 성적에 따라 정해지게 됐다.

사시 21기에는 112명의 연수원 수료생중 106명, 22기는 149명중 130명이 판ㆍ검사로 임용됐으나 23기는 267명중 200명, 24기는 310명중 99명으로 판ㆍ검사 임용이 대폭 줄었다. 그때부터 판사나 검사직 중 어느쪽으로 상위권 수료생들이 더 몰리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연수원생들의 선호도가 법원쪽으로 기울었다. 검찰이 국민의 지탄을 받으며 위상이 추락하자 권한은 적지만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는 법원쪽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어진 것이다. 2000년에는 연수원 졸업생 590명중 상위 100위내 성적 우수자중 검사직 지원자가 없어 400등이 넘는 졸업생이 검사에 임용되기도 했다.

옷로비 사건이나 임창열 경기지사 항소심으로 법원과 검찰이 감정 싸움을 벌였을 때도 상당수 판사들이 연수원 성적을 빗대며 검사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검사들도 이에 발끈, "최근에는 그럴지 몰라도 논란이 된 부장 판사 시절에는 어느쪽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느냐"며 반론을 펴기도 했다.

법조계 원로들은 최근의 판ㆍ검간의 대립은 결국 스스로의 위상과 신뢰를 훼손하는 '상처뿐인 영광'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판사와 검사가 진짜 싸워야 할 대상은 국기를 문란케 하는 범죄자들이며, 진짜 고민해야 할 것은 상대방에 대한 자존심 세우기가 아니라 진실 규명을 통한 정의 실현에 있다는 조언이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04/18 13:30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