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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들의 천국 필리핀

뛰어난 컴퓨터 실력, 해킹은 암울한 현실의 탈출구

일자리가 없어? 돈도 없고? 미래도 없다고? 그렇다면 해킹이라도. 필리핀은 이러한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에겐 해킹의 천국이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외곽에 위치한 위성 도시인 칼루칸시에 있는 한 작고 무더운 방.

아직도 앳띤 얼굴의 21세 청년 아이스트레인은 의자 깊숙이 앉아 에어컨의 스위치를 올렸다. 군데군데 노란색 페인트가 벗겨져 나온 에어컨은 팬조차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한켠에 놓인 침대에는 지저분한 매트리스가 깔려 있다.

그러나 책상 위에는 값비싼 신제품 컴퓨터가 자리를 잡고 있다. 청년은 19인치 새 모니터 쪽으로 몸을 돌려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온라인 꽃 배달업체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어떤 사람이 낸 장미꽃 배달 주문과 감동적인 연애편지를 읽는다.

그러나 그는 연애편지에는 관심이 없다. 배달 주문을 낸 친구의 신용카드의 내용을 복사해오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봤지요? 이렇게 간단해요." 그는 신용카드 번호를 자신의 컴퓨터로 옮기면서 말했다.

아이스트레인은 본명이 아니다. 본명을 절대 밝히지 않는다. 그는 "지금 사용하는 이 컴퓨터 장비 모두를 인터넷상에서 빼내온 신용카드로 산 것이죠"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해커다. 지저분한 머리에 검은 옷을 입고 저질 팝송가사나 흥얼거리는 그런 해커가 아니다. 짧고 검은 머리는 단정하게 젤을 발라 넘겼고 옷차림은 뉴로망서(Neuromancer)보다 더 최신식이다. 아이스트레인은 은밀히 프로그램 차단장치를 넘어 들어갈 때는 뛰어난 해커 못지않게 능란하다.


인터넷 속속들이 파헤치는 실력

일반적인 인터넷 이용자들이 인터넷의 겉을 헤매고 있는 사이 인터넷의 뿌리부터 훑는 해커들의 거대한 세계가 필리핀엔 구축돼 있다. 하지만 아이스트레인과 같은 많은 해커들은 그렇게 질이 나쁘지는 않다.

그들은 뛰어난 컴퓨터 기술과 상당한 창조적인 재주, 그리고 사이버 용기를 갖고 있다.

로커스츠(locusts)와 아부 사야프 보이즈(Abu Sayaff Boyz)와 같이 집단으로 형성된 해커들이 인터넷 서버 운용자들과 싸우는 것은 그들이 뛰어난 컴퓨터 실력에도 불구하고 문명화한 필리핀 사회에서 괜찮은 직업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해커들은 사회에 대해 엄청난 적대감을 표출하고,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한 채 남의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훔치고 소프트웨어를 복제하는 기술만 늘어났다.

필리핀 해커의 상징은 오넬 더 구즈만(23)이다. 마닐라에서 사는 그는 지난해 컴퓨터의 모든 파일을 파괴하고 파키스탄에서 미 국방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컴퓨터의 인터넷 접속을 불가능하게 만든 '러브 바이러스'를 유포한 것으로 알려진 친구다.

데 구스만도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해 남의 계좌속으로 숨어 들어감으로써 해킹을 조금씩 배웠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인터넷에 접속조차 할 수 없었다. 전형적인 필리핀의 해커형이다.

뛰어난 컴퓨터 실력을 가진 필리핀 해커들은 자신들의 창조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마음은 갖고 있지만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게다가 끝없는 가난과 정치적 불안정, 그리고 잘못된 컴퓨터 교육은 필리핀을 인도에 이어 가장 값싼 인터넷 관련 전문가들의 양성을 막고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 혹은 콜 센터와 같은 서비스, 기술적 지원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필리핀 전역의 컴퓨터 대학에는 35만명의 학생들이 등록돼 있으나 그들이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직업을 구하기는 거의 하늘에 별따기다.


사이버 도둑질 "컴퓨터로 모든 것 얻었다"

또 다른 요인은 사회적인 것이다. 필리핀 대학이나 아테네요 데 마닐라 대학, 델라 살르 대학과 같은 일류 대학들은 일류 고등학교를 나온 중산층 이상의 가정 출신 학생들이 다닌다.

그들은 일류 대학 졸업장을 갖고 우선적으로 최고의 일자리를 찾아가고, 그외의 수준 낮은 프로그래머들에게는 별볼일 없는 일들만 돌아간다. 아이스트레인도 마찬가지였다.

필리핀 남부의 루세나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스트레인은 12세 때 처음으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학교가 컴퓨터를 처음 받았을 때였다.

그리고 그것이 컴퓨터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다. 그는 "그동안 충분히 얻을 수 없었는데, 컴퓨터에 앉자 말자 모든 것을 얻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점심을 거르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고, 수업이 끝나도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능력을 타고 난 것도 아니다. 기계공인 그의 아버지와 가게 점원이었던 어머니는 타이프라이터 한번 사용하지 않았다.

아이스트레인은 17세 때 마닐라로 가 시스템스 테크놀로지 대학을 다녔다. 이 학교는 값싼 임금의 프로그래머를 키우는 기술대학. 수업은 한마디로 실망스러웠다. 선생들의 실력이 그보다도 못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그를 수업에 참여시키는 대신 컴퓨터 운영을 돕도록 했다.

그는 다른 컴퓨터 학교의 문을 두들겼다. 그러나 곧 정상적인 프로그래밍 교육을 받는 것을 포기했다. 필리핀 엘리트 대학 어느 곳에서도 컴퓨터과학 학위 과정 입학 허가를 받지 못했다.

1999년 온라인으로 마닐라에 있는 친구와 채팅을 하다 다시 마닐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달랑 150달러를 주머니에 넣고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프로그래머나 시스템 운영자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러나 관련학위 없이는 컴퓨터에 관한 일자리를 잡는다는 게 불가능했다.

마닐라 사무소에만 280명의 직원을 두고 있는 필리핀 보안전문회사인 트렌드 시스템즈의 이에타 치 본부장은 "내 책상에는 아이스트레인 같은 친구들의 구직신청으로 항상 만원"이라면서 "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친구들을 면접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대신 사이버 도둑질을 시작했다. 몇 개 전자상거래 웹사이트를 해킹해 수백명의 신용카드 번호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경찰에 체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넷 밴딧 클리닝 하우스(Net Bandits Clearing House)와 같은 채팅방에서 메일 시스템을 이용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그는 남의 신용카드로 두 대의 모니터를 주문해 채팅방에서 만난 한 친구의 워싱턴주 타코마의 주소로 보낸다.

타코마에 있는 그 친구는 두대중 한대는 자신이 갖고 다른 한대는 필리핀으로 보내준다.


신용카드번호 도용, 컴퓨터장비 구입

이때 주소는 절대로 공개하지 않고 카드는 단 한번씩만 사용한다. 그의 하드웨어 장비는 모두 이렇게 장만한 것들이다.

그리고 지금은 또 그것들을 이용해 또 다른 사이버 범죄를 꾀하거나 CD를 구워 장당 1달러20센트에 판다. 이것은 그가 원했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기는 아주 쉽고 시간도 충분하다.

지난해 필리핀에선 적어도 40개의 웹사이트가 해킹을 당했다. 거기에는 필리핀의 해군 및 공군기지는 물론 가장 유명한 포탈 사이트인 에헤이(yehey.com), 아마(AMA) 컴퓨터 대학도 포함돼 있다.

많은 사이트엔 그 시스템의 운영자에게 허술한 보안시스템을 비웃는 해커들의 문구가 남았다. 라이벌 해커에게 남기는 문구도 있었다.

"창조성이 잘못 발휘되면 종종 파괴적이 된다"고 필리핀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인 랜디 데이비드는 말한다."

그는 "해커가 적의를 품은 대학의 컴퓨터까지 해킹하는 나라에서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라면서 "사이버 세계에서는 필리핀의 유력 가문인 록서스(Roxas) 로페즈(Lopez) 조벨(Zobel) 출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이 없다. 누구도 당신의 신원을 알지 못한다. 우리와 같은 계층 사회에서 살지 않는 사람은 그 충격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이스트레인과 그의 친구 히로는 해커세계에서 나와 지방의 인터넷서비스업체(ISP)의 보안담당 직원으로 일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무시한다"고 두 친구는 불만이다. 웹사이트들과 ISP업체들은 자신의 데이터베이스가 해킹을 당하고, 수천개의 신용카드 번호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을 때 자신들의 결정을 후회할지 모른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2001/04/18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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