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가족풍속도] 무자녀 상팔자?

아이낳기, 필수에서 선택으로…

5월은 가정의 달. 가정 혹은 가족이라면 흔히 결혼으로 맺어진 남녀가 아이를 낳고 함께 사는 3~4인 이상의 공동체를 떠올린다.

하지만 가정이나 가족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예전에는 정상적인 가정이라 할 수 없던 다양한 형태들이 이제는 엄연히 가정의 개념에 포함된다.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 자녀 교육을 위해 떨어져 사는 가정, 혼자 사는 1인 가족, 한부모 가족 등이 그들이다.

가정의 달을 맞아 이러한 새로운 가정은 왜 생겨나고 있는지, 그 구성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사회는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 등을 5회에 걸쳐 다루어본다.

결혼 8년째인 이정훈(가명ㆍ35ㆍ회사원)씨와 김윤희(가명ㆍ35)씨 부부는 아이가 없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도 아니고 아이를 가질 수 없기 때문도 아니다. 그들 자신이 아이를 가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결혼할 때부터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합의했다.

처음 제안한 사람은 남편이었다. 이씨는 아내에게 "책임지기 싫어서"라고 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김씨도 남편의 생각에 공감이 가 이제껏 아이를 낳지 않고 '무자녀족'으로 살고 있다.

이씨 부부 같은 무자녀족은 아직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아주 드물지도 않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의 확산과 피임법의 발달에 따라 과거에 비해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밝히는 무자녀족의 주류는 역시 30대.

아직 출산의 기회가 많은 20대들이나 출산 적령기를 넘긴 40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출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연령대이기 때문이다. 30대 커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친구의 친구 정도의 범위 내에서 한두쌍씩 접할 수 있을 정도다.


아이에게 쏟는 정성, 부부를 위해…

무자녀족은 이제까지 딩크(DINK: Double Income No Kid)족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만들어진 용어인 딩크족은 남녀가 맞벌이로 돈을 벌면서 아이를 갖지 않는 커플을 말한다.

주로 남녀 모두 고소득 직종에 종사하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살기 원하고 아이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걸림돌이 되는 존재로 여겨 낳지 않으려는 이들이다. 한마디로 아이 없이 자신들의 인생을 즐기겠다는 것이다. 이씨 부부의 경우는 딩크족에 가깝다.

지금은 맞벌이가 아니지만 3년 전까지는 두사람 모두 일을 했다. 부인 김씨는 "아이가 없으니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죠. 남편은 욕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요. 만일 아이가 있다면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위해 자신의 꿈과 욕심을 포기했겠죠"라고 말한다.

아이가 없으니 아무때나 단둘이 여행도 갈 수 있고 여러모로 편하다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하는 얘기다.

하지만 무자녀족들이 반드시 자신들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만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흔히 생각하듯, 아이를 싫어하기 때문도 물론 아니다. 거기에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김윤희씨는 무자녀주의가 자신들을 위한 선택인 동시에 아이를 위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아이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것 아니냐. 한 인간을 낳아 그 사람이 원하는 인생을 살도록 해준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아이들은 다 자기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얘기가 통할 리 없다.

오히려 아이를 낳지 않는 것보다 낳아만 놓고 제대로 기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한 일이라는 주장이 이들에게는 더 설득력을 지닌다.

결혼 5년째로 아이를 낳지 않고 있는 강용훈(31ㆍ벤처회사 근무)ㆍ이용주(32ㆍ대학원생)씨 부부도 이씨 부부와 생각이 비슷하다.

6년의 연애기간에 자연스레 무자녀주의에 합의한 두 사람은 "아이보다는 자신에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 외에 한편으로 "내 아이에게 주는 사랑의 10분의 1만이라도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쏟는 것이 여러모로 훨씬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두 사람은 이씨가 공부를 마치면 불우한 처지의 아이들을 지원할 생각에 변함이 없다.

또다른 이유도 있다. 윤혜주(가명ㆍ33ㆍ회사원)씨는 "아이를 갖는 순간부터 여자에게는 남자보다 더한 육체적, 정신적 억압과 희생이 강요된다.

이미 수많은 여성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아이에게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하며 누구누구의 엄마로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결혼 이후 4년째 줄곧 피임을 하고 있다.

대학 시절 만난 동갑내기 남편도 부인의 뜻을 존중해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무자녀족들의 이유에는 모든 것이 아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가정, 내 아이에 대한 욕심이 유난한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 내지는 반감이 공통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부모압력·주위시선이 가장 큰 부담

하지만 여하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무자녀족으로 살아가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무엇보다 손주를 기다리는 부모, 특히 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쪽 부모들의 압력이 가장 큰 장애다.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가치관이 달라 벌어지는 세대 갈등에서 부모는 자식이 섭섭하고 괘씸하고 자식들은 부모가 부담스럽다. 심하면 가정불화로까지 이어진다.

예외 없이 부모의 기대 혹은 압력을 경험했던 무자녀족들은 하나같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것을 쉬쉬하지 말고 부모에게도 미리 밝히는 게 낫다고 말한다. 못 낳는다고 하면 부모를 속이는 일일 뿐더러 한약과 병원 행이 기다릴 뿐이다.

물론 설득은 거의 불가능하다. 부모 세대 중 무자녀족인 자식을 지지할만한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2남중 장남인 강용훈씨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통보에 가깝게 말할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많이 섭섭해 했지만 어차피 아이 낳기는 부모의 강요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고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강씨의 경우는 다행히 부모들이 섭섭해 하는 선에서 그쳐 갈등이 적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는 섭섭함에서 그치지 않고 분노와 비난을 드러낸다. 이때 부모 자식 간에 커다란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방법은 하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뿐이다. 외아들이라 손주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남다른 김정훈씨는 "부모님 싫은 소리에는 일일이 맞서기 보다 우리 둘이 잘 사는 게 제일 큰 효도 아니냐고 하며 그냥 넘어간다"고 말한다.

이씨와 강씨의 경우처럼 부모를 대하는데 있어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갈등을 줄일 수 있다. 부모보다는 못하지만 주위의 지나친 관심도 무자녀족을 피곤하게 만들기는 매한가지.

주위 사람들로부터 "왜 아직 소식이 없느냐"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냐"는 소리를 자주 듣는 윤혜주씨는 "아이를 낳고 안 낳고는 전적으로 부부의 일인데 왜 다른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표한다.


"아이 안낳는것도 낳는 것 만큼 중요해요"

무자녀족들도 아이가 주는 기쁨과 행복은 잘 알고 있다. 또래 친구나 친척 등 주변에서 늘 보고 듣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도 일말의 두려움은 있다. "늙어서 아이를 낳고 싶으면 어떡게 하나"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면 혼자서 외롭지 않을까"등이 그것이다. 어쩌다 문득 집안에 아이가 없으니 좀 썰렁하다고 느끼는 끝에 드는 생각들이다. 이런 두려움은 특히 가임기간이 끝나가는 30대 중반이 다가올수록 더욱 강해진다.

그래서인지 무자녀족들은 끝내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냐는 질문에는 하나같이 "죽어도 아이를 안 낳겠다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은 있다"고 말한다.

무자녀족 중 영구적인 불임수술을 받은 사례가 드문 것도 같은 이유다. 다만 그 가능성은, 부부 두 사람이 모두 아이를 절실히 원하고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에만 실현될 수 있을 뿐이다.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라고 생각해요. 어른들이 흔히 애가 있어야 가정이고 부부 사이고 유지된다고 하지만 아이가 있어야만 이어지는 관계라면 그 부부는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요"라고 김윤희씨는 말한다.

윤혜주씨는 "늙어서 혼자 남게 되더라도 자식들에게 의지하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아마 우리가 늙었을 때는 부모를 모시겠다는 자식들도 별로 없지 않을까요"라고 한다.

강용훈씨 역시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의 제 결정을 책임지며 살겠습니다. 아이를 낳는 것이 평생의 책임이듯, 아이를 안 낳는 것 또한 평생의 책임일테니까요"라고 한다.

이들에게 아이는 부부의 선택이지 결혼의 필수는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김지영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4/25 14:37


김지영 주간한국부 koshaq@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