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가족풍속도] "내 배로 낳은 아이와 똑같아요"

사랑이 익는 가정, 사회적 편견 없어져야 진정한 행복

낳은 정보다 기른 정. 흔히 하는 말이지만, 그 말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는 직접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한다.

김병수(44ㆍ회사원)ㆍ이미숙(37)씨 부부는 요즘 기른 정이 무엇인지를 날마다 절감하며 산다. 결혼 10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두 사람은 1999년 12월 생후 일곱달 된 여자 아이 하은이를 입양했다. 하은이를 처음 본 날, 두 사람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했다"고 말한다.

"그 전에 둘이 살 때도 불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이미숙씨는 그러나 "상담원이 '이 아이입니다'라고 하며 품에 안은 하은이를 넘겨 주었을 때, 놀랄 만큼 남편을 닮은 아이를 내 품에 안았을 때, 전에 알지 못했던 기쁨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돌을 막 넘긴 하은이가 응급실에 실려 가 처음으로 '엄마'라고 부렀을 때 눈물이 났다는 이씨는 지금도 때로는 힘들고 짜증스러운 아이 보기에 지쳐 있다가도 엄마를 보고 방긋 웃는 하은이 웃음 한번이면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린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만난 아이"

하지만 김씨 부부가 하은이를 만나기까지 마음 고생도 적지 않았다. 아이를 낳지 못한 부부는 시집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한번에 1,000만원이나 드는 시험관 아기 시술을 받을 만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입양. 두 사람 모두 예쁜 여자 아이를 원했다. 입양을 결정한 다음에는 서류까지 준비해 놓고 어른들께는 통보만 했다.

다행히 "그래도 집안에서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려야 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입양기관에 서류를 제출하고 기다리기를 3개월여. 그 사이에 부부는 아이를 뱃속에 품고 열 달을 기다리는 여느 부부들과 다름없는 설레임과 기다림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만난 아이라는 뜻에서 하은이라 이름을 짓고 여러 번 부르는 연습까지 했다.

이미 두 딸을 낳고 아들을 입양한 유두한(47ㆍ인테리어업)ㆍ김정화(44)씨 부부도 기른 정의 의미를 안다. 두 사람은 20개월 전 태어난 지 두달반 된 정빈이를 입양했다. 두 딸 진아(25)씨와 진영(22)씨도 부모의 뜻에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유씨와 역시 아버지를 일찍 여읜 김씨는 "세상에 나온 바에야 무언가 뜻 있는 일을 해보자"고 오래 전부터 입을 모았다.

입양을 선택한 건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인데다 아르바이트로 동네 아기들을 봐주었던 김씨의 남다른 아이 사랑 때문이었다. 이미 딸이 둘이나 있어 아들을 입양하기로 한 부부는 신청 열흘 만에 정빈이를 만날 수 있었다.

정빈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발육이 늦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걸음도 19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걷기 시작했고 26개월이 된 지금도 아직 '엄마, 아빠' 소리를 하지 못한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장애는 아니지만 발육부진이라고 했다.

정빈이는 요즘도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고 있다. "건강한 아이를 데려왔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정화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예요.

자기 자식이 장애가 있다면 버리겠어요? 정빈이는 처음 만난 날 이후 엄연한 우리 자식인 걸요"라고 했다. 내가 낳은 자식, 남이 낳은 자식이라는 구분이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받아들인 이상 우리 자식이라는 것이다.

유씨 부부는 비록 정빈이가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늘 "너는 우리가 사랑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말해 준다. 실제 김정화씨는 친 딸들이 섭섭해 할 정도로 정빈이를 예뻐한다.

"예전에는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아 그런지 잘 몰랐는데 정빈이를 기르다 보니 기쁨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올 가을 쯤에는 정빈이가 보다 빨리 말문을 트고 친구를 삼을 수 있도록 더 어린 남자 아이를 입양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


대부분 딸 원하고 입양사실 비밀로

김씨와 유씨네 가정처럼 혈연이 아닌 인연으로 이루어진 가정은 아직 소수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입양된 아이는 모두 4,046명. 같은 해 아동보육시설에서 사는 어린이는 1만7,820명으로 조사되었다.

입양된 아이 중 절반이 넘는 2,360명은 해외로 입양되었고 국내 가정에 입양된 아이는 1,686명이었다. 국내 입양은 1999년의 1,726명에 비해 줄었다.

특히 장애아의 경우는 해외 입양이 634명인데 비해 국내 입양은 18명에 불과했다. 아이를 입양하는 가정의 대부분은 불임 부부고 유씨네처럼 유자녀 가구는 드물다.

또 호적, 상속 문제 등을 걱정한 탓에 아들보다는 딸을 원하는 부부가 압도적으로 많다. 아이를 입양한 부모의 99%는 대개 입양 사실을 비밀로 한다. 아이에게는 물론이고 친지나 이웃들에게도 자기가 낳은 아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데려온 아이' '주워온 아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에서다.

물론 혈연에 대한 집착이 유난한 우리 사회에서 입양 사실은 아직도 드러내기에 조심스러운 점도 이유 중의 하나다.

하지만 김씨와 유씨 부부는 입양 사실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이웃들이 뻔히 아는데 새삼 숨길 것도 없고 무엇보다 입양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또 입양을 백안시하는 사회적 풍토에 작은 변화의 씨앗을 뿌리고 싶다는 뜻도 있다. 기왕 알릴 바에는 자연스레 받아들이도록 일찍 말해줄 생각이다. 그래서 이미숙씨는 하은이가 오고 나서부터 일기를 쓰고 있다.

하은이를 만난 과정, 하은이의 친부모에 대한 이야기, 하은이가 자라는 과정을 기록해 두었다가 언젠가 하은이에게 보여줄 생각이다. 또 두 사람은 하은이의 생일 잔치를 일년에 두번 해준다. 한번은 하은이의 진짜 생일, 한번은 하은이가 김씨 부부를 만난 날이다.

김정화씨도 친권을 포기한 정빈이의 친부모와 두형에 관한 기록을 입양기관으로부터 받아 두었다. 언제가 정빈이가 어른이 되어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어한다면 기꺼이 찾아줄 생각이다.


입양은 새로운 시작, 상처 입을까 조마조마

김씨나 유씨네 같은 입양 가정에서는 입양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인연으로 만난 자식을 키우려면 갈 길이 멀다. 낳은 정과 기른 정을 똑같이 여기기에 큰 걱정은 없다.

남이 낳은 자식을 받아들이면서 아이에게는 부모의 욕심보다 아이 본인의 행복이 더 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더욱 그렇다.

다만 한가지, 입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혹 자라는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때로 불안하다.

"남편이 다른 데서 낳아 온 것 아니냐" "씨가 좋지 않아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하냐" "근본도 모르는 남의 자식을 키워 뭐 하려느냐" 등등이 입양아는 물론이고 입양가정 전체를 힘들게 하는 선입견의 표현이다.

김정화씨는 아이를 입양하는 과정에서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입양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은 입양 제도의 개혁 또는 정책적 배려에 의해 보다 빨리 바뀔 수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는 무엇보다 입양기관에 내는 수수료부터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적으로도 입양을 망설이게 할 만큼 적지 않은 부담이 될 뿐더러 아이를 돈 주고 사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수수료는 입양 가정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다르게 부과되는데 적게는 150만원, 많게는 300만원까지 한다.

이 돈은 정부로부터 거의 보조를 받지 못하는 22개 입양기관이 운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돈이다. 부모에게 받는 돈과 약간의 기부금으로 꾸려지는 대부분의 입양기관은 상담사의 수도 부족하고 입양 설명회 개최에도 힘이 딸린다.

물론 아이를 입양한 다음에는 사회보장 차원에서의 지원 같은 것은 일체 없다. MPAK(한인입양홍보회) 한연희 회장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사회적 책임의 일부라면 어쩔 수 없이 버려지는 아이들을 가정으로 돌려 보내는 입양에 대해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김지영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4/25 14:48


김지영 주간한국부 koshaq@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