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家 3세, 경영 전면에

고 정주영 전 현대명예회장의 타계 이후, 현대 가문의 계열분리와 더불어 3세들의 경영 진출이 본격화하고 있다.

현대가 모(母)그룹과 자동차, 중공업, 백화점 등 '몽(夢)'자 항렬 아들 형제간 기업군으로 계열 분리되면서, 각자 살림을 꾸려가는 이들 기업별로 후계 경영수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왕회장의 손자들'이 최고경영자(CEO)로 경영일선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는 셈. 이들은 할아버지 세대의 영광 아래 자라나 아버지 세대의 풍요를 누렸고, 경영권 분쟁이라는 아픔까지 직접 지켜보면서 기업 현장에 뛰어들었다.

정 전 명예회장의 2세가 '몽'자 항렬이라면 3세들은 '선(宣)'자 돌림이다. 8남 1녀 의 자녀를 둔 정 전 명예회장의 현대 가문은 손자와 손녀 10 명씩 모두 20명의 직계자손이 있다.

이들 중 2남 정몽구 현대ㆍ기아차 회장의 외아들 정의선(31ㆍ현대차 자재본부 상무)씨와 3남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의 장남 정지선(29ㆍ현대백화점 기획실 이사)씨, 4남 정몽우(90년 작고)씨의 장남 정일선(31ㆍ삼미특수강 대표이사)씨 등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일선, 현대가문 첫 3세 경영인

우선 정일선씨는 3월 30일 현대자동차그룹의 철강 계열사인 삼미특수강 이사회에서 대표이사 상무로 선임돼 현대가(家)의 첫 3세 경영인이 됐다. 삼미특수강 서울사무소장을 맡고 있던 일선씨는 상무라는 직책으로 대표이사의 직함을 수행하고 있다.

삼미특수강은 "법정관리가 지난 3월에 종료됨에 따라 이사회 중심 책임경영을 해나간다는 차원에서 일선씨를 대표이사 상무에 선임했다"고 밝혔다.

삼미특수강은 정몽구 회장의 측근인 유홍종 전 현대캐피탈 사장을 사장에 선임, 5월중 임시주총을 열어 유 사장과 정 상무를 복수 대표이사 체제로 구성할 계획이다.

일선씨는 경복고와 고려대를 나와 1996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학 석사를 마친 후 99년 큰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의 배려로 기아자동차 기획실 이사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인천제철 상무로 승진 발령났다가 인천제철이 삼미특수강을 인수하자 곧바로 삼미특수강 서울사무소장으로 자리를 옮겨 기업일선에 발을 들여놓은 지 1년3개월 만에 대표이사까지 오르는 초고속 승진을 했다.

갑작스런 그의 삼미특수강 대표이사 등극은 당초 4남 몽우씨 집안의 몫이었던 고려산업개발이 부도난데 따른 장자인 정몽구 회장의 '조카 몫 나눠주기'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고려산업개발은 원래 정 전 명예회장이 일찍부터 몽우씨 몫으로 남겨둬 일선씨의 모친인 이행자(56) 씨가 이 회사 고문으로 있었고, 이씨의 오빠인 이진호 전 회장이 지난 연말까지 경영을 해왔다.

고려산업개발은 6남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이 최대주주지만 일선씨와 동생인 문선, 대선씨도 일정 지분을 갖고 있었다.

고려산업개발이 부도 위기에 처하자 일선씨는 큰아버지인 정몽구 회장과 삼촌인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정몽준 의원 등을 찾아다니며 지원을 호소했지만 지원을 얻는 데 실패, 고려산업개발은 퇴출되고 말았다. 부도 이후 왕 회장의 장례과정에서 가족회의를 통해 현대차 그룹의 철강계열사인 삼미특수강이 일선씨 몫으로 넘어간 셈이다.

일선씨는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인 의선씨와 동갑내기로 어려서부터 왕회장의 청운동 집에서 함께 컸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 그래서 정몽구 회장도 조카의 철강회사 경영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있다.

우선 인사와 자금지원.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12월 계열사인 인천제철이 삼미특수강을 인수한 후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와 함께 대규모 자금지원을 시작했다.

인천제철은 인수 직후 단행한 인사에서 8명의 신임 이사 중 5명을 인천제철 출신으로 채웠으며, 삼미특수강이 채권단에 갚아야 할 차입금 1,468억원을 전액 빌려줬다. 또 최근에는 삼미특수강이 제2금융권으로부터 571억원을 빌릴 때 연대보증을 서기도 했다.

하지만 일선씨는 철강회사 경영 경험이 전혀 없는데다, 현대차그룹이 3세 경영 구축을 위해 부실 철강계열사에 자금을 쏟아부을 경우 자칫 그룹 전체의 동반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왕회장이 아끼던 의선, 현대차에서 담금질

정몽구 회장의 장남 의선씨의 행보도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와 미국 샌프란시스코대에서 MBA과정을 마친 그는 아버지가 현대차 경영을 맡은 1999년 현대자동차 자재본부 구매담당 이사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자동차 제조에 필요한 부품 조달과 자재 관리, 협력업체 관리 등을 담당하는 자재부문은 자동차 회사의 가장 기초적인 분야. 의선씨는 올 1월 상무로 승진해 구매실장을 맡았다. 부품과 원자재 분야에서 경영수업을 하는 것은 현대 가문의 오랜 전통.

현대차 관계자는 "자동차 회사를 제대로 알려면 자그마한 볼트와 너트까지 다루는 자재부문에서 일을 시작해야 한다"며 "정몽구 회장이 선친인 왕회장으로부터 경영수업을 받던 코스를 따르고 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의선씨는 왕회장이 가장 아끼던 손자"라며 "지난해 현대의 '왕자의 난' 시기에도 의선씨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덧붙였다.

의선씨는 또 벤처열풍을 타고 인터넷 사업에 잇따라 뛰어들어 현대자동차 계열사인 이에이치디닷컴(e-HD.com)과 오토에버닷컴의 최대주주가 됐다.

오토에버닷컴은 현대차가 인터넷을 통한 자동차 부품 공급과 사이버 차량 판매 등 전자상거래를 위해 지난해 설립됐으며, 이에이치디닷컴은 자동차 자동항법장치 등 전자장비와 위성정보 개발을 위해 만든 인터넷 벤처기업이다. 의선씨의 지분은 각각 20.1%와 25.1%.

그는 최근 인터넷계열사에 대한 모기업의 부당 지원의혹 등 공정거래위원회와 시민단체 등의 눈총 때문에 이에이치디닷컴 주식 32만주(13%가량)를 19억2,000만원에 현대차에 매각했지만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인터넷 사업에 의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선, 수수한 스타일로 직원들과 친근

3남인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의 큰아들 지선(29)씨는 1997년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곧바로 현대백화점 과장으로 취업,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경영지원본부 경영관리팀 차장을 거쳐 올 2월에는 이사로 승진, 기획실장을 맡고 있으며 몽근 회장의 신임을 두둑이 받고 있다. 아직 미혼인데다 수수한 스타일로 직원들과 잘 어울려 사내의 평판이 좋은 편.

왕회장의 장남 정몽필(인천제철 사장으로 재직중 1982년 교통사고로 작고)씨의 큰 딸 은희(30)씨는 방계회사인 건설자재업체 동서산업개발 지분 4.2%를 갖고 감사로 있으며, 이화여대 영문과 수석 입학으로 화제를 모았던 둘째 딸 유희(28)씨는 금강기획을 퇴사한 후 쌍용 김석원 회장의 장남 지용씨와 결혼했다.

5남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과 6남 정몽준 의원(현대중공업 고문), 7남 정몽윤 현대해상화재 고문, 8남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사장의 자녀들은 아직 어리거나 학업중이다.

현대가의 3세들이 1세대의 도전과 2세대의 질곡을 교훈삼아 합리적인 리더십과 기업경영 수완을 발휘할 수 있을 지는 아직 속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의 경영능력에 대한 평가는 잠시 접어두더라도,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시대 흐름에도 아랑곳 않고 우리 대기업의 경영관행은 오히려 '오너주의'로 회귀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김호섭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1/04/2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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