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중구 광희동 광희문(光熙門)

서울 중구 광희동2가에 광희문(光熙門)이 있다. 부근 무학동에는 옛날 아리랑고개가 있었다.

서울도성에는 4대문(四大門)과 4소문(四小門)이 있었는데, 오늘날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북문은 숙정문(肅靖門)이었다.

이들 4대문 사이사이에 소의문(昭義門:남대문과 서대문 사이), 창의문(彰義門:서대문과 북문 사이), 혜화문(惠化門:북문과 동대문 사이), 광희문(남대문과 동대문 사이)에 있다. 4소문이다.

광희문은 세조2년(1456년)에 오늘 날 장충동2가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타워호텔부근에 세워졌다. 예종 때 이 문이 풍수지리상으로 저승으로 가는 길목인 경복궁의 황청문(黃泉門)이 된다하여 막아버리고 현재의 위치에 새로운 문을 지으면서 '광희문'현판만 떼어서 옮겨달았다.

이 문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바로 옆에 청계천으로 빠지는 삼간수문(三間水門)과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어, 도성안 대부분의 물이 이 문 부근으로 흘러나간데서 기인한다.

또, 일반 주민들이 시구문(屍口門)이라 부른 것은 성안의 사람이 죽으면 시체가 반드시 광희문과 서소문으로만 나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문을 지나서 신당동 화장터나 금호동 공동묘지로 가게 되므로 이 문을 '시체가 나가는 문' 이라는 뜻에서 '시구문'이라 하였다.

시신이 나가는 길목엔 통상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무당(巫堂)집이 즐비했는데, 무당골 또는 신당골(神堂谷)이라 부른 것이 오늘날 그 신당골이 신당동(新堂洞)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광희문 밖의 고개를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아리아리(멀고 먼)한 고개'라는 뜻에서 아리랑고개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한번 가면 다시 못오는 북망산천과 서방정토로 가는 길목과도 같은 고개로 도성안 주민들에게 아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는 이 시구문 밖에 시체가 즐비하게 쌓였다는 기록도 있으니, 처음 문을 세울 때부터 경복궁의 황천문이라 하여 옮긴 그 자리가 결국 숙명적으로 서울 백성들의 황천문이 된 꼴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해 한국군을 신식군대로 만든답시고 구 군대를 해산시키자 이에 불응한 군인 1천2백명이 의거를 일으켰다. 그들은 서소문과 남대문 사이의 성벽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을 벌였으나 120여명이 전사했다.

이때 가담했던 1천2백명의 병사 가족들이 생사를 확인하기위해 전사한 군인들의 시체를 모아둔 광희문 밖으로 몰려들어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 가거던 시구문 돌가루 긁어오라'는 시골사람들의 인사말이 있을 정도였다.

수백년 동안 수 많은 참사와 죽음을 지켜본 광희문이었기에 그 문의 돌가루가 영약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 광희문은 '광희'=명(明:밝고 빛남)이 되므로 '광명의 문'이라는 뜻이 될 뿐더러 조선조의 마지막 연호가 '광무(光武)'와 '융희(隆熙)'로서, 이 연호의 앞뒤 글자를 맞추면 '광희'문의 '光熙'와 일치하는 것도 신기하다.

광희(光熙)라는 이름이 사람의 시체가 마지막으로 나가는 문에다 또, 조선왕조의 마지막 종말을 암시해 주는 것만 같아 씁쓸한 생각마저 든다. 때문에 이 문에 숙명적으로 붙어다녔던 죽음의 냄새는 곧, 죽음이야 말로 영원한 '광명으로 통하는 문'이며, '영원의 밝은 길로 이어지는 문'이 아니던가...

입력시간 2001/04/2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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