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도망자' 박노항] 병영비리 '판도라의 상자' 열리나

파일 밝히는데 주력, 핵폭풍 될 가능성 높아

정치권을 강타할 핵폭풍이 불어 닥치나. 병역비리 몸통이자 '마지막 도망자'로 통하던 박노항(50) 원사가 4월25일 체포되면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것이란 추측이 무성하다.

박 원사의 병역비리 파일에 지명도 높은 유력 사회지도층 인사가 일부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추측이 현실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 원사의 체포를 둘러싼 여야의 설전 역시 예사롭지 않다. 한나라당의 정보통 정형근 의원은 4월26일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박 원사 체포 전후의 미심쩍은 부분을 지적하며 "수사가 야당 목죄기에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이에 대해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이 같은 여야의 공방 자체는 박노항 체포가 정치적 인화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비리의혹 100여건, 더 늘어날 수도

정치적 비화 가능성을 제외하더라도 박노항 파일의 폭발성은 적지 않다. 병역비리의 '유전면제(有錢免除), 무전입대(無錢入隊)'속성 때문이다. 거액을 주고 아들의 병역면제를 청탁했을 상당수 부유층은 수사과정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병역비리와 관련해 이전의 수사과정에서 박 원사의 도피로 '참고인 중지'처분을 받았던 24건이 우선 수사대상에 오른다. 박 원사가 체포된 이상 이들에 대한 조사는 불가피하다.나아가 박 원사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 피조사자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박 원사가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병역비리는 100여건에 달한다. 박 원사는 병역면제와 의병전역, 보직조정, 카투사 선발비리 등 거의 모든 유형의 병무비리에 연루돼 있다. 박 원사가 잠적한 것은 제1차 병역비리 합동수사가 착수된 1998년 5월12일.

하지만 그는 지난해 4월 16대 총선을 앞두고 시작된 제2차 병역비리 합동수사 관련 사건에도 상당수 개입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 2월13일 마무리된 2차 합동수사 과정에서 적발된 혐의자 327명 중 159명이 구속기소됐다.

군과 검찰은 서울지검 서부지청에 검사 2명과 군검찰관 3명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합동수사팀을 설치해 4월28일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수사의 초점은 박 원사가 혐의를 받고 있는 100여건의 기존 병역비리 및 여죄 추궁. 합수팀은 이와 함께 병역비리에서 박 원사가 과연 몸통인지, 군내부에서 조직적으로 비호했는지 여부와 도피를 도운 여인들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이고 있다.

비리혐의에 대해서는 1998년 1차 합동수사 때 구속된 원용수 준위가 우선 소환대상으로 꼽히고 있다. 원 준위는 당시 박 원사에게 12건을 청탁하면서 1억7,000만원을 제공했다.

원 준위와 박 원사는 또 '원청'과 '재하청'관계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원 준위가 자신이 받은 청탁 건을 박 원사에게 재청탁해 처리하는 알선 브로커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다.

합수팀은 '원 준위 리스트'에서 그동안 박 원사와 연루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집중분석, 두 사람을 대질신문할 단서를 상당부분 포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노항, 몸통인가 깃털인가

'원 준위 리스트'는 1차 합동수사 당시 압수된 청탁자 목록을 말한다. 이 리스트에는 400명에 총 442건의 청탁 건이 기록돼 있었다. 리스트 중에는 장군 7명을 비롯한 현역군인이 133명으로 가장 많았고, 예비역 군인 40명과 병무청 직원이 60명 포함돼 있었다.

나머지 일반인 185명 중에는 전직 국회의원 1명, 변호사 1명, 대학교수 1명 등이 들어 있었다. 작년 2월 반부패국민연대가 내놓은 병역비리 의혹자 120명의 명단과, 검찰의 내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현역 여야 국회의원 50여명의 명단은 원 준위 사건 관련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원 준위 리스트 등재 인사들 중 1차 합동수사에서 금품수수가 확인된 사람은 138명. 앞으로 원 준위와 박 원사를 대질해 추궁할 경우 청탁자 중 추가적으로 비리가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검찰은 박 원사의 잠적으로 기소중지됐던 24개 사건과 관련해 병역면제자 부모 등에 대해 법무부에 출국금지를 요청했다.

예비역 준위 B씨도 소환될 가능성이 높다. B씨는 박 원사의 옛 상관으로 그를 매우 아꼈던 인물. 합수팀은 1999년 박 원사의 자금추적 결과 B씨의 계좌에서 거액이 입ㆍ출금된 흔적을 발견했다. B씨는 또 군의관들의 인사에도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다.

합수팀은 이러한 정황을 감안할 때 B씨가 박 원사의 배후이자 병역비리의 진짜 '몸통'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군내부의 비호 여부는 의리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조직적이었는지가 관건이다. 박 원사는 자신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진 1998년 5월27일 이후 3~4개월간 헌병부대 및 군병원에 근무하던 동료 부사관(하사관) 등 4명을 차례로 만나 수사상황을 전해듣고 대책을 논의했다고 자백했다.

합수팀은 이에 따라 박 원사와 접촉한 인물들의 신병을 곧 확보해 조직적 비호 여부를 캐기로 했다. 군 검찰은 군 내부의 조직적 비호 의혹이 사실로 판명될 경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원 엄벌할 방침이다.

합수팀은 박 원사의 누나 등 가족과 10여명으로 추정되는 그의 주변 여인들도 차례로 소환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박 원사의 도피행적과 은닉재산을 추적하는 것이 목적이다.

합수팀은 4월28일 박 원사의 도피를 도와준 김모(54ㆍ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여인을 범인은닉 및 뇌물공여혐의로 긴급체포했다.

영화와 TV드라마 등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는 탤런트 출신의 김 여인은 박 원사에게 2,000만원을 건네고 아들의 병역을 면제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서영득 국방부검찰단장은 "김 여인이 박 원사의 도피 초기 은신처를 구해주고, 빚을 대신 받아주었으며, 박 원사의 수표를 맡아두는 등 도움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뇌물액수 수십억원대 달할 듯

박 원사는 대규모 병역비리 과정에서 거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합수팀은 박 원사가 3~4명으로부터 수천만원을 받는 등 100여건의 비리에서 최소 10억원 이상을 챙긴 단서를 포착했다. 박 원사가 체포 당시 갖고 있던 돈은 전세자금 1억원과 싱크대 밑에 숨겼던 6,800만원 등 3억원대.

합수팀은 나머지 상당액이 주변 여성과 친인척, 과거 동료 명의의 차명계좌나 부동산, 유가증권 등에 분산은닉됐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여죄 추궁과정에서 그가 받은 뇌물액수는 수십억원대로 늘어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박 원사의 구속 사유는 특가법상 알선수뢰와 군형법상 군무이탈 혐의. 수뢰액이 수십억원대가 될 경우 특가법상 알선수뢰죄만으로 최저 징역 10년에서 최고 무기징역까지 받을 수 있다.

문제는 박 원사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데 있다. 그가 도피중이던 3년간 전전긍긍했을 청탁자와 주변 연루인물들은 이제 박 원사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5/02 19:53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