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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총리 탄생, 일본의 앞날

고이즈미 총리 탄생, 일본의 앞날

'당원 혁명'이 이룬 기적이 드라마

4월 26일 출범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정권을 보는 일본 국민의 눈길에는 기대가 가득하다. 총리 지명을 앞둔 자민당 총재 경선에서 예상과 달리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 총리를 눌러 환호를 자아낸 그는 당직ㆍ각료 인선과정에서도 변화를 실감시켰다.

반면 고이즈미 정권의 출범을 바라보는 한국과 중국의 눈길에는 우려와 긴장의 빛이 가득하다. 자민당 총재선거 과정에서 일본 국내용으로 천명한 개혁 노선과 달리는 역사ㆍ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강경 보수 노선을 드러낸 때문이다.



고이즈미가 자민당 총재 경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 그의 승산을 점치는 사람은 없었다. 당내 파벌의 세력 분포는 하시모토 전총리에 비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중ㆍ참의원을 합친 346명의 의원 가운데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파에만 102명이 소속돼 있었다. 그가 회장을 맡았던 모리파는 제2 파벌이라고는 하지만 60명이 고작이었다.

파벌간 합종연횡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제4 파벌인 호리우치파(43명)는 하시모토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고노그룹(12명)도 내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하시모토 지지가 대세였다. 야마사키파(23명)와 가토파(15명)가 지지를 약속했지만 무파벌(23명) 일부의 지지를 포함한다 해도 100~105명에 불과했다.

하시모토가 확보한 145~157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당선보다는 지분 확보를 위해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를 후보로 낸 에토ㆍ가메이파(55명ㆍ제3 파벌)는 언제든 하시모토 지지로 돌아 설 태세였다.

마지막 기대는 47개 광역단체 자민당 본부별 당원 투표로 치러지는 예비선거였다. 자민당의 총재 경선은 늘 의원과 당원의 투표를 합치는 방식으로 이뤄져 왔지만 대부분 동시에 개표해 왔다.

1978년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1982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재 선출때만 의원투표에 앞서 당원투표를 예비선거처럼 치렀을 뿐이었다.

당원 투표를 예비선거로 치르기로 한 결정은 고이즈미에겐 실낱 같은 희망이었다. 의원이 지구당 위원장인 현실로 보아 당원투표도 어차피 의원투표의 재판일 수 밖에 없다. 딱 한번 1978년 예비선거에서 오히라 전총리가 예상을 뒤엎고 1위를 기록,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총리의 사퇴를 부른 예외가 있었다.

그런 기적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지만 예비선거에서 1위에 오르더라도 약 50표에 이르는 의원의 차이를 지방본부별 3표, 총 141표인 당원 투표에서 극복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1차투표 2위로 결선투표로 갈 경우 결정권을 쥔 에토ㆍ가메이파의 지지로 하시모토 전총리가 승리할 것이 뻔했다.


예상 뒤엎은 예비선거 결과

그러나 4월23일 끝난 예비선거 결과는 기존의 많은 시나리오와 일반인들의 상상을 뒤엎었다. 고이즈미는 141표중 123표를 얻는, 소위 '산사태 득표'로 15표에 그친 하시모토 전총리를 압도했다.

당원의 열망을 무시할 수 없는 에토ㆍ가메이파가 가메이후보의 사퇴와 고이즈미 지지로 돌아섰고 호리우치파도 '하시모토 지지'에서 몸을 돌렸다. 이튿날의 총재선거 결과는 굳이 지켜볼 필요조차 없어진 것이다.

예비선거의 고이즈미 돌풍은 7월의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의 바닥에 흐르는 위기감과 불만이 '변화' 욕구로 폭발한 결과였다. 지난해 4월에 출범한 모리 요시로(森喜朗) 정권의 지지율은 주가ㆍ경기와 함께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져 내각 지지율은 13~18%를 기고 있었다.

지난해 나가노(長野)현 지사 선거 이래 4차례의 지사 선거에서 자민당 후보는 번번이 고배를 들었다. 7월 참의원 선거의 참패는 불을 보듯 뻔했다.

당지도부에 대한 당원들의 불만은 뒤집어 말하면 자민당을 주도하는 하시모토파에 대한 불만이다. 하시모토 전총리는 1998년 7월 참의원 선거 참패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경력까지 있어 당원들의 불만과 불안을 더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런 흐름을 읽고 하시모토파를 겨냥한 탈(脫)파벌ㆍ근본적인 개혁 선언으로 불만세력을 표로 끌어 들였다. 독특한 개성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려온 그였지만 이런 변화를 혼자의 힘으로 이룬 것은 아니었다. 자민당내 국민 지지율 1위를 자랑해온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다나카 전총리의 딸) 외무장관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승리의 일등공신은 다나카 마키코

다나카 장관의 고이즈미 지지는 커다란 놀라움이었다.

1995년 하시모토 전총리와의 대결에서 참패한 고이즈미가 3년뒤인 98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총리ㆍ가지야마 세이로쿠(尾山靜六) 전관방장과 함께 경선에 나섰을 당시 다나카 장관은 세사람을 각각 '헨진'(變人ㆍ괴짜)ㆍ '본진'(凡人)ㆍ'군진'(軍人)이라고 평했다.

모두 자격 미달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헨진'의 어머니인 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돌보겠느냐"고 선전대장을 맡았다. 그리고는 프로 만담가를 뺨치는 특유의 따발총 연설로 하시모토 전총리를 맹폭했다. 가는 곳마다 청중들이 몰려 들어 박수를 쳤다.

고이즈미 총리가 3번째 도전에서 하시모토파에 대한 울분을 풀었다면 다나카 장관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었던 한을 풀었다.

아버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총리는 1974년 폭로된 금권정치 문제로 총리직을 사임하고 이듬해 록히드 사건으로 치명타를 입었지만 재기의 꿈을 버리지 않다가 1985년 뇌일혈로 쓰러지면서 정치 생명이 다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총리의 '반란'이었다.

따라서 오부치ㆍ하시모토파로 이어진 다케시타파에 대한 그의 한은 깊을 수 밖에 없었다. 한풀이와 동시에 일본 사상 최초의 여성 외무장관에 올라 '일본판 올브라이트'로 주목받게 됐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1/05/0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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