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56)] 우키요에(浮世繪)

우리 동양화는 한국화, 일본 동양화는 '니혼가'(日本畵)이다. 근대 이후 도입된 서양화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지만 원형인 중국화와도 구별해 독자성을 강조하려는 말이다.

수묵화건 채색화건 한국ㆍ일본화가 실제로 이런 이름처럼 중국화와 분명한 차별성을 확보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다만 우리 민화나 풍속화는 중국, 일본과 다른 한국적 정서를 충실히 그려내고 있다. 보편성이 우선 관심사인 상류층의 감각과 다른 서민ㆍ 대중적 정서를 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니혼가'의 독자성은 에도 (江戶, 1603~1867년) 시대에 꽃핀 '우키요에'(浮世繪)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우키요에는 '우키요'를 그린 그림이다. 우키요란 말은 애초에 '우울하고 서글픈 세상'(憂き世)을 뜻했다.

불교 사상의 확산으로 현세를 무상한 세상, 또는 임시 세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 '뜬구름 같은 세상'(浮世)이란 표기가 정착한 배경이다. 피안이 아닌 현세, 과거도 미래도 바로 현재의 세상을 뜻한 것은 물론 호색과 탐욕 등 세속적 관심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등의 복합적인 의미를 띠었다.

우키요에가 실재하는 현실 세계, 당시 유행한 사회 풍속을 묘사했다는 점에서는 조선 후기 풍속화와 비슷하다.

그러나 귀천승속(貴賤僧俗)을 가리지 않고 소재로 삼았던 초기 풍속화와 달리 에도시대에 번성한 우키요에는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유흥·연예장을 주된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더욱이 노골적이고 과장된 성묘사로 유명한 '마쿠라에'(枕繪)가 중요 장르였다는 점에서는 성묘사가 가벼운 해학에 그쳤던 우리 풍속화와는 많이 다르다.

우키요에의 가장 큰 특성은 표현 형식이 목판화였다는 점이다. 화가의 육필화는 상업자본이 지배하는 제작 과정의 한 요소였을 뿐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이를 목판에 새기고, 색을 칠해 떠내는 3단계의 작업이 상인자본 아래서 분업을 통해 이뤄졌다. 대개 200~300장을 찍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밑그림은 먹으로 테두리만을 그리는 예가 많았고 원화의 색감을 살리는 경우에도 소비자의 기호에 따라 색깔의 변화가 있었다.

우키요에는 독립하기 전 오랫동안 목판본의 삽화에 머물렀다. 그림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대중소설이나 경전 등에 작게 실렸던 삽화가 점점 커졌고 나중에는 아예 그림이 주가 되고 글은 양념으로 곁들이게 됐다.

용도도 대단히 실용적이었다. 유곽의 유녀들은 요염한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브로마이드처럼 선전·기념용으로 뿌렸고, 가부키(歌舞伎) 극단은 유명 배우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오늘날의 영화 포스터처럼 이용했다. 순수한 감상용으로 벽을 장식하는 예도 있었지만 오늘날의 '이발소 그림'처럼 대중적이고 초보적인 감상 수요를 겨냥한 것이었다.

18세기 중반 우키요에는 질적인 변화를 통해 예술적 가치가 커졌고, 화가들의 사회적 지위도 크게 높아졌다. 우선 미인화에서 시작된 이런 변화는 1794년에 함께 데뷔한 우타가와 도요쿠니(歌川豊國)와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齋寫樂)의 가부키 배우 그림에까지 이르렀다.

도요쿠니가 인물의 표정을 이상형의 틀에 가둔 반면 샤라쿠는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모습을 그렸다. 대중적인 인기는 도요쿠니쪽에 쏠렸지만 이듬해 홀연 행적을 감춘 샤라쿠의 그림은 순간적 표정을 포착한 생동감으로 해외에서의 평가는 오히려 높았다.

우키요에는 1833년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가 잇달아 발표한 연작 풍경화 시리즈를 통해 절정기를 맞았다.

후지산의 36가지 모습을 묘사한 호쿠사이나 에도에서 교토(京都)에 이르는 도카이도(東海道) 주변의 풍경을 그린 히로시게의 대조적인 화풍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우키요에를 예술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일본 국내의 관심이 사라져 간 반면 이들의 그림은 유럽으로 대량 유출됐고, 인상파나 아르 누보 등 서구의 신예술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것이 일본에서 우키요에를 재평가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일본식 춘화인 마쿠라에는 무사의 액땜용 부적이나 출가를 앞둔 여성의 성교육용, 단순한 즐거움을 위해 쓰였다. 낙서 수준을 넘는 정교한 그림이 13세기부터 나타났고, 에도시대의 우키요에 화가들이 가장 공을 들인 그림이기도 했다.

황영식 도쿄 특파원

입력시간 2001/05/0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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