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세먹는 하마' 전시행정 언제까지…

잇단 부작용 불구, 내년 선거 앞두고 선심성 정책 남발

4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7가 동대문운동장 건너편의 한 화장실 건물. 1층은 장애인 전용, 2층은 일반인용 화장실이고, 3층에는 커피와 스낵을 파는 카페가 들어서 있다.

이 곳에는 비대를 비롯해 유아용 보호의자, 기저귀 교환대, 음료수대, 위급 경비설비 등 특급 호텔 화장실 버금가는 최신 시설이 구비돼 있다.

중구청은 주변 밀리오레 두산타워 등 대형 패션 쇼핑몰에 올 외국인 관광객을 고려해 6억7,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이 같은 초호화 화장실 두 곳을 만들었다.

하지만 알루미늄 재질에 자동 개폐 센서까지 달린 최첨단 장애인 화장실 문은 이날 오후 늦게까지 '사용중(Occupied)'이라는 불이 켜진 채로 굳게 닫혀 있었다. 이 곳을 이용하려던 몇몇 장애인들과 외국인들이 한참을 기다리다 낭패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결국 이 문은 오후 늦게 관리인이 와서 수동으로 열고 난 후에야 재가동할 수 있었다. 관리인은 "밤에는 술취한 노숙자들이 어지럽혀 문을 잠그는데 낮에도 시민들이 작동법을 모르고 안에서 잠그는 바람에 하루 종일 문이 닫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수억원을 들인 첨단 화장실이지만 사용 안내 표지가 없어 무용지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혈세가 새고 있다. 정부와 지방 자체 단체들의 선심성ㆍ전시 행정으로 국민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세금이 낭비되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여론 몰이용 선심 행정을 펼치고, 지방 자치단체는 '주민 숙원 사업'이라는 명목 하에 각종 이벤트성 행사를 경쟁적으로 유치한다. 이런 '눈 가리고 아옹'식의 전시 행정으로 골병이 드는 것은 국민이다.

생색은 정부와 지차체가 내지만 결국 이 비용은 국민과 주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내년 자치단체장 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같은 선심성ㆍ전시 행정은 더욱 기승을 부릴 전망이다.


BK 21사업 시행 2년만에 부작용

정부의 전시 행정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두뇌한국(BKㆍBrain Korea)21 사업이다.

1999년 교육부가 '국제 경쟁력을 갖춘 연구 인력 양성'을 목표로 2005년까지 7년간 총 1조4,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한 이 사업은 시행 2년째인 올해 벌써 이곳 저곳에서 부작용이 터져 나오고 있다.

연구 지원금으로 교수와 학생 20여명이 관광 여행을 다녀온 사실이 적발되는가 하면 일부 교수는 자신이 경영하는 벤처회사 직원 월급까지 정부 지원비로 충당하는 횡령 사건까지 터졌다. 일선 대학가에서는 BK21 지원금이 연구팀의 회식비나 용돈, 내지는 담당 교수의 판공비가 되 버린 지 오래다.

일부 대학 주변 유흥가 주변에서는 'BK21 특수'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다. 이 사업에 대해서는 대학 교수들 조차도 사업 집행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한나라당 김정숙 의원이 대학교수 182명(BK21 참여 106명 포함)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답변은 28.5%인 반면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55.9%나 됐다.

시행초기 지원 대학 선정에서부터 물의를 일으켰던 이 사업은 지원 대상 73개 대학 386개 사업단을 관리ㆍ감독하는 인원이 학술진흥재단 BK21사업 지원부 상근 직원 7명에 불과해 원천적으로 말썽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부 당국은 대학의 연구력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 올릴 고급 인력을 양성한다는 장밋빛 청사진만 강조하며 추진을 강행했다.

최근 문제가 됐던 '천년의 문'기념 조형물 건립 사업도 전시 행정의 표본이다. 문화관광부는 지난해 말 새천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앞에 지름 200m의 원형 조형물인 천년의 문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시민단체들이 "제2의 경제 위기가 우려되는 현실에서 수백억원을 들여 필요성이 의문시 되는 거대 조형물을 짓는 것은 '천년을 후회할 일'"이라며 강하게 반대하자 논란끝에 계획을 철회했다.

문화관광부가 내세운 백지화의 이유는 모 당선작에 대한 풍동 실험 결과 안전성에 문제가 제기돼 설계 보완을 거치면서 원형이 변질됐다'였다. 하마터면 800억여원의 예산이 낭비될 뻔했다.


열지도 못한 천년의 문, 무궁화 사업은 코미디

정부는 지난해 장애인 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시행령을 10년만에 개정, 국가ㆍ지자체의 장애인 의무 고용 비율을 2%로 높였다. 또 장애인 공무원수가 1만명에 이를 때까지 공채 비율을 5%로 유지토록 했다.

그러나 지난달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국가ㆍ지방자치단체의 장애인 고용 비율은 1.48%(민간기업은 0.91%)에 불과하다.

더구나 법으로 정한 고용 비율(5%)에 따르면 지난해 최소한 160명의 장애인을 채용해야 하는데 실제 채용된 인원은 114명에 불과했다. 구조조정 여파로 공무원 인원을 줄이는 판에 장애인의 고용 비율을 늘리라는 정책은 누가 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 행정이 아닐 수 없다.

행정자치부가 지난달 24일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무궁화 조기 개화'사업은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 듯하다.

행자부는 내년 열리는 월드컵 기간(5월31일~6월30일)에 꽃이 핀 무궁화 9,200그루를 경기장 호텔 선수단 숙소 등에 전시하기로 하고 해당 시도에 20억여원을 지원, 조기 개화 사업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월드컵 기간에는 무궁화가 개화되지 않는 시기라는 비난과 함께 무궁화 수요 급증으로 중국산 무궁화까지 수입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업 추진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더구나 이 사업을 추진한 위원회 위원 11명중 상당수가 조경업자들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업계와의 유착 의혹까지 나돌고 있다.

이런 이벤트성 행정이 끊이지 않는 데는 정치권의 인기 영합 정책과 공직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정부ㆍ여당은 집권 초기부터 대선공약 실천과 국민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세금과 공적 자금을 동원한 선심성 행사를 줄기차게 벌여 왔다.

대우차, 현대건설 등 부실 덩어리 기업을 살리기 위해 천문학적 규모의 공적자금을 쏟아 붓고 있다. 경제 침체로 악화된 여론을 달래기 위해 가지고 있는 탄환을 모두 동원하고 있는 셈이다. 나라 살림을 하고 남은 세계잉여금의 사용처를 놓고 여야가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다.

여당이 국채 또는 차입금의 원리금 상환에만 쓸 수 있는 세계잉여금을 관련 세법 개정을 통해 경기부양과 실업대책 등에 투입키로 하자, 야당은 내년 대선 등을 겨냥한 선심정책을 펴려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야당은 나아가 여당이 나라빚을 갚아나갈 생각은 않고 차기 정부에 떠넘기려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기에 개발 독재시대부터 내려온 공직 사회의 안일한 예산 집행도 문제다. 지방 자체단체들은 중앙 정부로부터 지속적인 지원을 받으려면 '일단 있는 돈은 쓰고, 신규 사업은 벌어야 한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더구나 자치단체장이 선거로 선출되면서 지자체 마다 선심용 예산을 타내기 위해 혈안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결제장치 마련, 감사기능 활성화 시급

경기 하남시가 1999년 개최했던 '하남 국제환경 박람회'는 지자체 행정 폐해의 대표적인 사례다.

하남시는 시민단체의 반대와 정부 당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총 235억원을 들여 이 행사를 치렀다. 이를 통해 하남시가 벌어들인 수입은 불과 12억원. 그런데도 하남시는 올해 다시 이 행사를 추진하려다 시민단체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결국 포기했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이벤트성 행정은 관련 사업 업체들과 유착된 경우가 상당수 있다. 때문에 일부 지자체 단체장이나 담당 부서장들은 업자들의 로비에 이끌려 무리하게 행사를 강행하기도 한다.

올해 2월에는 근린 공원 계획용지에 스포츠 센터를 세울 수 있도록 공원조성계획을 변경해 주는 대가로 2,000만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발각돼 물러난 기초 자치단체장이 그 사례중의 하나다.

문화연대의 유승준 팀장은 "'내 손에 곳간 키를 갖고 있을 때 우선 선심이나 쓰고 보자'는 식의 선심성ㆍ전시 행정은 선거제를 실시하고 있는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병폐"라며 "주민 소환제나 납세자 소송 같은 견제 장치 마련과 자체 감사기능 장치를 활성화 하는 방법 외에 달리 방안이 없다"고 말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05/09 15:27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