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세태고발 소설 내놓은 전 국회의원 이철용

"정신불구에 빠진 사회에 경종 올리는 계기 됐으면"

" 제 글은 문학작품도 뭣도 아닙니다. 너무나 화가 나서 쓴 것 뿐입니다. "

두 권짜리 책을 쓰고도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다. 현대인들의 성적 방탕을 담은 신작소설 '10시간'을 내놓은 전 국회의원 이철용(53)씨.

'10시간'이란 제목부터가 한 남자가 일생동안(50년) 성생활을 하면서 경험하는 사정시간의 총합을 뜻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성적인 문제로 이혼을 당한 뒤 희대의 카사노바로 돌변하는 한 남자의 성적행로가 담겨있다. 차마 읽기 불편할 만큼 적나라한 행각이 '생중계'된다.

화상채팅, 전화방, 안마방 등의 각종 퇴폐현장은 물론 소위 '꽃뱀'이 조직화, 폭력화한 일명 '왕거미'조직도 등장한다. 이야기의 전개상 일부만 손을 보았을 뿐, 소재 자체는 모두 현실 그대로다.

눈만 돌리면 얼마나 많은 곳에 매춘의 덫이 포진하고 있는지, 너무도 사실적이라 오히려 절망스러운 보고서다.


노골적 성묘사, 포르노그다피로 보는 사람도

"주인공으로 나오는 황인열은 제가 아는 실존 인물입니다. 상당한 고관의 아들로, 지금까지 상대한 여자만 3,000명쯤 될 겁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구요. 병을 얻은 뒤에도 여전히 또 다른 변태로 빠져 헤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동네 술집에서 손님이 여자를 청하자 인근에 살던 가정주부가 윤락녀로 달려나온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까지 달동네가 무너진 건 막무가내의 단속 탓도 적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대안없이 처벌만 강화하면 오히려 더 무서운 부작용만 불러오게 됩니다.

지금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지만, 이렇게 가다보면 나중엔 직접 매춘이 아니라 성을 빌미로 자해나 폭력을 휘둘러 돈을 뜯는 자해공갈단 등 더 살벌한 변종범죄로 바뀌어 나타날 겁니다. 한번 두고 보십시오. "

그의 묘사는 너무 노골적이다. 대체 이렇게까지 친절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만큼. 심지어 성행위의 과정 하나 하나까지 책속에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포르노그라피로 보는 사람도 많다.

물론 여기에는 작가 이씨가 의도한 목적이 따로 있다. 갖가지 성적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 남성들에게 현실적인 성의 정보를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이혼과 불륜의 가장 큰 원인중 하나도 성문제에서 오는 갈등이라는 것. 어떤 면에선 사회고발보다도 성의 지침서로 활용되기를 저자는 더 크게 바라고 있다.

모든 이야기는 현장에서 나왔다. 수년간 사창가와 퇴폐업소를 직접 돌았다. 그간 만나본 윤락녀들만도 100여명. 화상채팅 하나만 해도 20~30명의 관련 윤락녀들의 이야기를 축약한 것이다.

각 시설의 분포에서부터 화대, 거래 주변의 정황들, 윤락에 뛰어든 사연 등 나름의 인터뷰 노하우를 통해 얻어낸 정보 총량으로 보면 책에 쓰인 내용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뒷골목 구석구석의 최근 동태까지 여느 노련한 경찰이나 기자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확보하고 있다.

"확실히 변했습니다. 1960년대엔 배가 고파서, 1970년대엔 인신매매로 사창가로 흘러든 여성이 대부분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부터는 제 발로 찾아 들고 있습니다. 여성 스스로가 그것을 즐기는 겁니다.

섹스를 즐긴다는 게 아니라 돈을 즐긴다는 뜻입니다. 매춘장소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건물은 2층이 화상채팅방이면서 3층이 비디오방입니다. 화상채팅으로 화대를 흥정하고나면 이젠 여관에 가지 않고 바로 가까이에 있는 비디오방을 찾아 성행위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비디오방에도 몰래카메라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찍힌 테이프는 다시 포르노테이프 등이 거래되는 암시장으로 몰래 팔려나갑니다. 그런 시장이 시내에 몇 군데 있습니다. 그런 테이프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매춘이 얼마나 사회 깊이 들어와 있는지,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겁니다. "


숱한 우여곡절 겪으며 사창가 등 음지순례

청량리의 사창가, 일명 588에선 큰 낭패를 볼 뻔도 했다.

손님으로 가장해 들어간 곳에서 상대 여성을 설득해 "차라리 포장마차에서 술이나 마시며 이야기나 나누자"며 데리고 나오다가 업소 건달들에게 들켰다. 기세가 험악했다.

상대쪽에선 자신들의 윤락녀를 빼내가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선수들끼리 왜 이러냐"고 예의 배짱으로 밀고나가던 중, 마침 한 친구가 이씨의 얼굴을 알아보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오히려 밤늦도록 함께 술을 마시며 기분좋게 돌아왔다. 언젠가는 역시 음란테이프 암거래 시장을 찾아갔다가 다 끝났던 흥정이 수포로 돌아간 일도 있다. 테이프를 건네려던 남자가 문득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순식간에 내빼버렸다.

얼굴이 알려져서 불편할 때는 그럴 때다. 그의 이런 음지 순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생활중 일부가 돼 왔다. 거창한 자료조사를 위해서가 아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곳에 가면 가장 잘 보였다.

그는 원래 작가였다. 1970년대 말부터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 사람들' '들어라 먹물들아' 등의 세태소설을 낸 바 있다. 그의 파란만장한 과거도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서울 필동의 한 판자집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살때 왼쪽다리에 결핵성 관절염을 앓고 장애인이 되었다. 태어날 때도 유복자였지만, 열네살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홀로 세상을 떠돌며 힘겨운 삶을 살았다. 친척들조차 아무도 받아주는 곳이 없어 잘 곳, 먹을 것을 직접 해결해야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 때문에 슬픔도, 겁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연명했는지도 기억하기 힘든 그 시절, 열다섯살때엔 지나가던 학생의 돈을 뺏다가 걸려 소년원에 들어가기도 했다.

뒷골목 패거리에도 합세, 한때 왕초 노릇을 한 적도 있다. 아무런 가망도 없어 보이는 삶에 너무도 지쳐 죽을 생각도 여러 번 했고, 그나마 마음을 잡고 출가해 스님이 되고자 했지만, 그마저 장애인에겐 무망한 꿈이었다.

"장애인은 스님이 될 수 없다며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신체장애가 전생에 지은 업보 때문이라며 안된다는 겁니다. 가톨릭에서도 장애인에겐 사제 서품을 허용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그후 저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사랑과 박애를 부르짖는 종교조차도 그러한대 일반인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총각때 제가 길을 걸어가면 옆을 지나가던 꼬마가 자기 엄마에게 "엄마 저 아저씬 다리가 왜 저래?" 하고 묻습니다.

그 엄마는 "아저씨가 엄마 말을 안 들어서 저래, 나쁜 짓을 해서 그래"라고 대답합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장애인들은 멀쩡히 돌을 맞는 겁니다. 그런 사회의 편견과 매도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


도시번민운동 시작하며 서민의 대변자로 변신

20대초 방황속에서 만난 허병섭 목사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달동네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목사의 삶을 보면서 판자촌 이웃들의 삶에도 눈을 뜨게 되었고, 그와 함께 도시빈민 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그로 인해 고초도 많이 겪었다.

부정선거를 고발하고 대책없는 철거에 반대하다가 결혼 20일만에 교도소에 간 것을 비롯해 1976년엔 안기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40일간 심한 고문을 받고 만신창이가 되어 나왔다.

1979년 삼엄한 유신치하에서 모 집회의 노동운동을 지휘했다는 이유로 수배자의 신세가 됐다. 그 피신기간에 처음 쓴 책이 '어둠의 자식들'이었다.

비록 정부의 눈밖에 나 쫓기며 살아가는 아버지이지만, 두 아들에게 만큼은 떳떳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본명도 숨긴 채 이동철이란 가명으로 쓴 그 책이 의외의 파장을 일으켰다.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올랐고, 뒤이어 10여권의 세태고발소설을 꾸준히 발표, 소외계층의 아픔을 전하는 서민들의 대변자로 자리잡았다.

1987년엔 제13대 국회의원이 됐다. 인텔리들의 탁상공론에 질린 국민에겐 무학만 간신히 면한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에다, 달동네 출신, 신체장애인이라는 겹겹의 핸디캡을 딛고 일어선 현장운동가 이씨의 등장 자체가 남다른 충격이었다.

첫 선거유세장에서부터 '절름발이는 내려오라'는 야유를 들으며 시작한 싸움이었다. 투표결과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의 상대후보를 약 1만표의 차이로 당당히 제쳤다.

국회에 들어서자마자 장애인용 출입시설을 만들어달라는 휠체어 시위로부터 시작한 국회생활은 분주하고도 보람이 있었다.

장애인과 환경, 복지분야에서 나름대로 원없이 일하고 나왔다. 수개월간의 줄다리기 끝에 심신장애자복지법이란 명칭을 장애인복지법으로 개칭한데 이어 장애인 고용촉진법을 만들고 팔당호 주변 수질오염 문제를 개선하는 등 적지않은 성과를 기록했다.

그 어떤 문제든 그는 서류더미보다 직접 현장을 발로 뛰며 답을 찾는 일꾼이었다. 국회안에서도 소문난 최다발언자였던 그는 그 저돌적인 활동 때문에 모 일간지에선 '상습소란꾼'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85년부터 시작한 달동네 청소년 공부방도 벌써 16년째를 맞는다. 현재 서울 동소문동에 자리한 새뜻희망공부방이다.

사실상 결식아동들을 위한 급식소로 시작했지만 곧이곧대로 밥을 먹으러 오라고 하면 행여 아이들 마음이 다칠까봐 공부를 핑계삼아 식사를 제공하는 자상한 배려가 숨어있다. 도와주는 자원봉사자만 20여명. 집을 옮긴 뒤에도 잊지 못하고 계속 이곳만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을 만큼 밝고 화기애애한 어린 가족들이다.


5년전부터 장애인 문화사업에 분주

이씨 자신도 24년째 변함없는 미아6동 달동네 주민이다. 국회의원이었을 때도 그 주소 그대로였다. 5년전엔 사단법인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을 만들어 장애인들을 위한 문화사업에도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다. 직접 시나리오를 쓴 연극작품도 몇 차례 무대에 올린 바 있다.

최근 공연한 '사랑아 사람아'란 작품에선 처음으로 시각장애인 연출, 시각장애인 주연을 기용해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주연을 맡았던 시각장애인 배우는 일반인들이 놀랄만큼 훌륭하게 그 역할을 해냈다.

물론 남모르는 연습과 노력의 결과였다. 한 대사를 마친 뒤 어느 방향으로 몇 걸음을 움직인 뒤 다음 대사를 하는 식으로 철저히 자신의 장애를 이겨낸 것이다.

앞으로는 도심 한가운데에 당당히 장애인문화센터를 열고 보다 본격적으로 장애인들의 숨은 재능을 발굴하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안에 들어 있다.

그가 정말 걱정하는 것은 '정신 불구'에 빠진 우리 사회다. 국회의원까지 지낸 양반이 주책이라는 소리까지 각오한 채 최근 때아닌 성교육을 자청한 것도 현대인들의 성적 방종 속에서 찾아낸 나름의 고육지책이다. 어쨌든 그는 할만큼 했다.

그가 던진 화두에 이 사회가 어떻게 화답할지, 그 자신도 기대를 걸고 지켜보는 일만 남겨두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가려져있던 현상만 제가 밖으로 끌어내놓았을뿐, 앞으로 어떻게 공론화하고 풀어나갈지 그 나머지는 더 똑똑한 전문가들이 나서서 맡아줘야 할 몫입니다. "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05/0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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