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파괴 CF로 시대상 반영, 뒤바뀐 남여 역할

발상 뒤집은 통쾌한 광고효과

스노우 보드를 타고 계단을 내려오는 미모의 여성, 입영열차를 타고 군대가는 여자.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TV광고를 타고 우리에게 현실처럼 다가오고 있다.

한마디로 성(性) 파괴.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무너뜨리고, 성의 벽을 허무는 작업이 광고세계에서부터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광고계에서 여성을 보다 적극적이고 '남자보다 더 남자다운'이미지로 그리는 광고가 잇따라 출시됐다. 이에 따라 광고계의 '남강여약 (男强女 弱)'이란 고정 관념이 급격히 붕괴되고 있다.

광고계에서 오랫동안 강세를 보이던 여성 이미지는 최진실, 김지호, 김현주로 이어지는 '귀여운 여자류'였다.

그러나 올해 들어 N세대를 타깃으로 한 광고들이 기존 트렌드에서 벗어나 여 주인공을 남성보다 더 당당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여성의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하다보니 나타난 새로운 현상으로 풀이된다.


디지털 시대의 당당한 여성상 반영

입영열차 타고 군대가는 아리따운 여인, 자신에게 무관심한 남자에게 먼저 사랑을 표현하는 과감한 여 주인공에서 보듯 남자들을 제압하는 '카리스마 걸' 이 광고전략의 핵심이다. 겁나게 당당하고 용감한 신세대 우먼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전략이다.

동양생명의 수호천사(입영열차편), 롯데칠성의 실론티(해바라기 사랑편), 파월디지털 017(동영상 편), 휠라(스타일 보드편)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대홍기획에서 제작한 동양생명의 수호천사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이 등장, 보는 이를 당황케 할 정도다. 그동안 제작됐던 수호천사 시리즈에선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지켜주는 수호천사역으로 등장했다. 당연히 남자 주인공 원빈은 당당하고 저돌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이번에 나온 입영열차편에서도 기존 포맷은 동일하다. 그런데 한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남녀의 역할이 뒤바뀌었다는 것.

CF는 곧 출발할 듯 보이는 기차가 한대 서 있고 그 앞에 선 남녀가 아쉬운 듯 작별인사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기차는 다름아닌 눈물의 입영열차. 연인 사이인 둘은 시간이 흐를수록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헤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 순간 상상을 뒤엎는 장면이 전개된다. 당연히 남자 주인공인 원빈이 기차를 타리라 생각했는데, 군대 가는 주인공은 그가 아닌 여자 친구. 당당하게 입영열차에 오르는 여자 친구.. 남자가 아닌 여자의 군입대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원빈은 기차가 출발하자 뭔가 결심한 듯 기차를 따라 여자 친구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한다. 이어 여자친구에게 "야! 김성희! 니가 어디 있더라도 난 너를 지켜줄게. 난 너의 수호천사라구"라고 힘차게 외친다.

역시 대홍기획에서 만든 롯데칠성 실론티 CF에선 여성의 과감성이 돋보인다. 남성이 손을 내밀 때까지 기다리는 과거의 여성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마음에 들면 남성이 사랑을 표현하든 말든 '넌 내꺼'라고 찜할 수 있는 신세대 여성의 모습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바닷가 절벽 위에 아름다운 여인이 있고 그 옆에는 한 남자가 서있다. 남자는 바닷가 저 멀리를 바라보며 아련한 동경 속에 빠져 있다. 그러자 여인은 남자가 사랑을 주던 말던 괘념치 않고 과감하게 자신이 먼저 사랑을 표현한다. 신세대 여성들의 당찬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인터내셔날 큐가 제작을 맡은 파워디지털 017 '동영상'편에선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카리스마'를 여주인공에게 이식시켰다.

그 주인공은 관능적인 테크노댄스로 스타덤에 오른 이후 나드리 멜, 삼성전자, 꼼빠니아, SK의 OK 캐쉬백 등 광고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전지현. 그가 매력적인 '카리스마 걸'로 변신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당당한 여인상을 그리고 있다.

배경은 복잡한 중국의 거리. 신세대 젊은 여자(전지현 분)가 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건장하고 험상궂은 남자 3명이 여자를 공격하려고 한다. 순간 이 여자는 "i야"라고 외치고 'i'로 보여지는 캐릭터가 나타나 그를 보호한다.

i의 등장과 함께 힘을 잃은 남자들을 제압하면서 여 주인공은 명령을 내린다. "꿇어"라고. 남자 3명은 여 주인공 앞에서 무릎을 끓고 그녀는 의기양양한 자세를 취한다. 힘세고 깡패같은 남자들 앞에서도 기죽거나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는 전지연의 모습에서 관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

인터내셔날 큐는 "전지현의 모습은 기존에 그가 출연했던 광고들과는 사뭇 다른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다"며 "섹시함과 함께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신세대들의 당당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리콤의 휠라(fila) '스타일 보드'편에서도 당당한 캐리어 우먼상이 돋보인다.

배경은 어느 초고층 빌딩의 92층. 젊은 여자가 정장 치마차림으로 도시의 빌딩 안을 활기차게 걸어가다가 갑자기 캐주얼 복장으로 바꾸며 스노우 보드를 타고 빠르게 달리는 모습이 연출된다. 계단 아래서 이 장면을 보던 젊은 남자는 속도와 과격함에 놀라고 여인은 멋지게 계단아래로 착륙한다.

힘이 넘치고 빠른 속도의 게임은 남자의 전유물이고 동시에 여자는 남성을 감탄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그 동안의 기존관념을 산산이 깨부수는 광고다. 여성의 당당함과 자신만만함 그리고 남자의 소극적인 자세가 대조를 이룬다.


수줍어하는 남자, 도발적인 여성

남녀의 역할이 바뀐 이미지의 광고는 지난해부터 이동통신, 음료, 제과 등 일부 N세대를 타깃으로 한 광고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새로운 트렌드의 탄생을 예고했다.

역시 남자는 수줍고 귀엽게 표현되는 반면 여성은 당당하고 도발적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여강남약'의 전도된 성 이미지를 엿볼 수 광고로는 한통프리텔의 n016 CF와 대우자동차의 마티즈 CF가 대표적인 사례다.

n016 CF에서는 톱가수 조성모와 이정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광고에서 극을 이끄는 중심인물은 조성모. 그러나 그는 '잘자, 내꿈 꿔'라고 음성메시지를 남기는 이정현의 모습을 다른 남자에게 전화하는 것으로 오해해 준비해온 선물을 슬그머니 뒤로 감추는 등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수동적이고 수줍음을 타는 남자다.

이에 비해 이정현은 직접적이진 않지만 이동통신 수단을 동원해 재치있게 솔직하게 감정을 전하는 모습을 보이며 조성모보다 한수 위의 여성으로 등장한다.

마티즈 광고에서도 여성은 당당한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제품의 성능을 논리적으로 가르치는 입장을 채림에게, 반면 억지로 자기 생각을 우기며 어리광을 부리는 역할을 차태현에게 맡기고 있다. 채림의 설명을 수긍한 뒤 '마술이다'하고 귀여움을 떠는 차태현에게 '기술이지'라고 똑 부러지게 못박는 채림은 남자를 압도하는 당찬 여성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대홍기획 서양희 차장은 이같은 남녀 이미지가 뒤바뀌는 경향에 대해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그동안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던 부분에 도전하며 역할 바꾸기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며 "시대상을 적극 반영하는 광고시장에서도 남녀 역할이 뒤바뀐 CF들이 속출하며 소비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광고속의 남녀 성파괴가 조만간 현실의 성파괴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박희정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1/05/09 18:11


박희정 경제부 h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