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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골짜기의 또다른 병역비리

벤처골짜기의 또다른 병역비리

벤처사 병영특례제도 악용

강남 테헤란밸리에서 B to B 전자상거래를 하는 A벤처사 김민섭(39ㆍ가명) 부사장은 지난 주 귀가 솔깃해 지는 제안을 받았다.

메이저급 거래처의 오너가 돌연 "미국 유학을 마친 외아들을 취직 시켜 주면 앞으로 막대한 물량의 거래를 터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매출 신장을 고민해오던 김 부사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 메이저사의 오너를 만난 김 부사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오너가 은밀히 제시한 조건은 다름 아닌 "현역 병으로 입대해야 할 외아들을 병역 특례 요원으로 받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요즘 벤처에서는 쉽게 해주는 일 아니냐"는 꼬리표까지 달았다. 병역 특례 지정업체는 아니지만 요구를 들어주고 싶었던 김 부사장은 "서둘러 병역 특례 신청을 해 보겠다"고 말한 뒤 허가 절차를 알아봤다. 4~5개월이면 전문연구요원 배정(TO)을 받을 것을 판단한 김 부사장은 오너 아들의 학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 보았다.

그런데 유학을 갔다 왔다는 아들은 미국에서 제대로 대학 졸업도 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미국 유학을 했으면 석사 학위 정도는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결국 김 부사장은 이 호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산업기능요원·경영자 '이중생활'

벤처사의 병역특례제도 악용 사례가 늘고 있다.

병역 특례 제도란 정규 군 소요 인원을 충원하고 남은 과학기술 인력을 연구소나 산업체, 농어촌에 투입해 국가 경제ㆍ산업에 이바지 하도록 하는 병역 대체 복무제도의 하나다.

국가 지정 기관이나 업체에서 일정기간 복무하면 국방의 의무를 한 것으로 간주 한다. 이런 국가 인력 관리 제도인 병력특례제도가 일부 몰지각한 벤처 기업인들에 의해 병역 특혜의 한 방편으로 오용되고 있다.

최근 한 인터넷 게임업체인 A사는 병역 특례와 관련해 병무청으로부터 실태 조사를 받았다.

온라인 게임을 운영하는 이 회사가 게임 유료화를 시도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PC방 업주들이 병역특례 요원 관리를 문제 삼고 나선 것이 발단이다.

업주들은 이 회사 산업기능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박진명(가명)씨가 대표이사의 아들이라고 폭로하며, 산업기능요원은 경영에 참여할 수 없는 데도 아버지를 대신해 회사를 맡아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박씨는 지난해 이 회사의 자회사를 설립해 공식적으로 대표 이사직을 수행하고 있다. 실제로는 산업기능요원이란 이름으로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는 '이중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병무 규정에 따르면 병역특례는 입영대상자 개인별로 자격을 따는 것이 아니라 해당업체가 병무청으로부터 특례로 지정을 받으면 그 업체가 입영대상자에게 혜택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권한이 업체쪽에 쏠려 있다.

이런 규정 때문에 일부 부유층들은 '상속과 병역 면제'라는 혜택을 받기 위해 아예 벤처회사를 설립하기도 한다. 그 다음 병무청으로부터 전문연구요원이나 산업기능요원 지정업체 허가를 받아 자녀를 병역 특례 요원으로 특채 한다. 이런 벤처회사들은 박씨의 예처럼 젊은 아들에게 회사 경영을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택 대가로 지분인수, 거액투자 등 '거래'

'병역 특례자 맞교환'도 은밀해 행해지는 수법 중 하나다. 한 벤처사 간부에 따르면 군미필 상태에 있는 벤처 CEO들이 서로 짜고 병역 특례 혜택을 악용하는 사례도 적잖게 있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 출신인 A씨와 B씨는 주변에서 젊은 CEO로 각광받는 청년 사업가들이다. 이들은 '해당 법인의 대표이사나 이사 같이 경영에 관여하는 간부는 그 법인의 산업기능요원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을 피하기 위해 상대 친구 회사의 전문연구요원으로 등록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거의 매일 각자 자신의 회사에서 일을 한다. 일년에 한번 정도 병무청의 정기 실사가 나올 때만 잠시 상대방 회사에 가서 일하는 시늉만 하는 게 전부다. 이런 방법으로 이들은 회사 경영과 국방의 의무를 한꺼번에 하고 있다.

일부는 자신의 친척이나 가족을 대표 이사로 올려놓는 방법으로 법망을 빠져 나간다.

S벤처사의 창업자인 김모씨는 최근 부인을 회사 대표에 앉히고 자신은 다른 벤처 전문연구요원으로 취직했다. 그 역시 자신의 회사 경영을 사실상 맡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벤처업계에서는 해외 유학파들까지 병역특례제도를 악용한다고 말한다. 한 벤처사 CEO에 따르면 모 회사의 회장은 미국에서 유학중인 자신의 아들을 거래처의 전문연구요원으로 입사 시킨 뒤 그 회사 대표의 배려 아래 유학 생활을 시킨다.

전문연구요원의 경우 지정업체가 공동연구나 기술연수, 기술지도 등 병무청장이 정한 사유에 합당할 경우에만 최장 1년 6개월까지 외국으로 파견 갈 수 있다.

이런 조항을 이용해 현재 외국에서 석ㆍ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자녀들을 국내 벤처회사에 전문연구요원으로 편입시킨 뒤 절차를 밟아 다시 외국으로 돌아가도록 한다. 공식적으로는 지정업체의 연구활동을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유학 공부를 하는 것이다.

병역 특례 혜택을 둘러싼 거래도 종종 일어난다. 일부 졸부들은 자녀에게 병역특례 혜택을 주는 대가로 그 회사 지분을 인수해 주거나 거금을 투자하기도 한다. 극히 일부지만 사이비 벤처 CEO의 경우 브로커를 통해 돈을 받고 특례 혜택을 판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합법을 가장한 이런 병역 비리는 이미 대기업이나 정치인들이 2세에 적용해왔던 오래된 수법이다. 2세를 계열 회사의 전문연구요원으로 입사 시켜 병역 의무를 치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오랜 구태를 막 태동한 국내 벤처사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IT 열풍'에 힘입어 벤처의 병력특례가 활성화하면서 일부 알선업체나 기술 학원들에서도 부정이 발생하고 있다. 대졸이나 대학원 중퇴자 중 현역 판정을 받은 입영대상자가 산업기능요원이 되려면 해당 분야의 자격증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현역병 입영대상자 중에는 인문계나 순수 자연계열을 나온 사람은 기술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을 다녀야 한다. 이를 노린 일부 학원업자들이 '급행료'명목으로 입영 대상자들을 상대로 한 사기 행각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이들은 "잘 아는 특례업체 사장을 통해 취업 시켜 주겠다","자격증이 없는 사람도 먼저 입사 시켜준 후 추후에 딸 수 있도록 선처하겠다"는 식으로 입영 대상자들을 꾀어 금품을 뜯어낸다.


단속민원 절대부족, 악용사례 점점 증가

최근 IT 벤처업체에 병역 특례의 오용 사례가 두드러지는 것은 근무 여건 영향이 크다.

예전까지만 해도 산업기능요원들은 거의 제조나 생산 산업체에서 근무하는 게 관례 였다. 하지만 최근 벤처 인력난이 심해지면서 정부가 벤처쪽 특례 인원을 대폭 늘리는 조치를 취했다.

특히 벤처들은 지방에 몰려 있는 제조ㆍ생산업체와 달리 근무처가 대부분 서울 강남 중심지에 몰려 있다. 근무 여건도 소프트웨어 개발 같은 화이트 컬러 업종이 대다수라 입영 대상자들에겐 선망의 대상이 된다.

벤처의 병역 특혜 부정이 확대되자 병무청은 최근 일제 단속에 나서는 등 비리 적발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관리ㆍ감독 인원이 절대 부족해 이렇다할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3월말 현재 전국의 병역 특례자는 1만6,800여 업체에 7만6,80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관리감독 인원은 56명에 불과하다.

더욱이 벤처업체가 몰려 있는 서울시의 경우 특례 요원은 3,700여개 업체에 1만여명이 있는데 이를 감시하는 서울지방병무청 산업지원과 실태조사반은 4~5명에 불과하다. 감시반 한 명이 820명의 요원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솔루션을 제작하는 한 중견 벤처사의 대표는 "병력특례제도는 인력난에 허덕이는 벤처들이 고급 인력을 데려올 수 있게 해 주는 단비와도 같은 제도다.

이런 좋은 제도가 일부 부도덕한 벤처업자들 때문에 위축될까 걱정 된다"며 "관할 병무청이 지정업체 선정에서 관리ㆍ감독, 그리고 처벌을 대폭 강화해 부정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말했다.

병무청의 김재화 사무관은 "벤처에 대한 병력 특례는 형평성 문제가 제기돼 병무청 내부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지만 산자부나 정통부의 쿼터 확대 요구 때문에 줄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현재 인력 여건으로는 부정 행위를 완전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속적인 감시와 벤처인 스스로의 양식과 준법 의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벤처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꿈과 야망을 실현하는 마당이다. 그 만큼 벤처는 진취적 도전 의식과 건강한 투명성을 생명으로 한다. 국내 벤처업계가 21세기 한국 경제의 희망이자 견인차가 되기 위해선 병역 비리 같은 암초는 하루빨리 제거해야 한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herosong@hk.co.kr

입력시간 2001/05/15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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