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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여행] 남인수

서민의 아픔을 달래주던 국민가수

우리 가요계 사상 최고의 미성가수였던 남인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반영하듯 성이 다른 이름만 셋이다. 최씨 문중에서 태어나 최창수, 강씨 문중의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들어가 강문수,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예명 남인수. 가수이외의 삶은 진주가 고향이고, 봉래보통학교 출신이라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 온통 베일에 가려 있다.

저음과 고음을 넘나드는 3옥타브의 음역을 소유한 목소리는 "백년이 지나도 나올 수 없는. 하늘이 내린 목소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또한 반듯한 매너, 술, 담배를 멀리하는 자기 절제가 몸에 밴 생활 태도는 뭇 가수들의 모범이 됐다. 그래서 그는 후배들로부터 진정한 '서정가요의 황제'로 추앙받고 있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그가 남긴 주옥같은 1,000여 곡들은 때론 나라 잃은 망국민의 처참한 마음을, 때론 아물지 않는 전쟁과 분단의 고통 속에 신음한 서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진 국민가요들이다.

1935년 어느날, 학생복 차림의 잘생긴 18세 청년 강문수는 '시에론레코드'사 음악실에서 노래 테스트를 받는다. 이때 부른 노래가 <눈물의 해협>. 기타 반주를 해주었던 작곡가 박시춘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방송 출연과 본격적인 가수 수업을 받게 된다.

<눈물의 해협,chieron 2003번>은 1936년 7월에 발매된 데뷔 SP음반. 시에론레코드 시절 강문수의 장래성을 발견한 작사가 강사랑은 그를 메이저 레코드사인 오케이레코드로 스카우트한다. 남인수란 예명은 오케이레코드가 <범벅서울, okeh1934. 1936년10월>을 내면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눈물의 해협> 멜로디에 이부풍의 신작 가사를 붙여 발표한 곡이다.

<애수의 소야곡, okeh12080. 1937년12월> SP음반의 발표는 그에겐 인기 정상으로 향한 힘찬 첫 발자국. 이 음반을 주문하려는 전국의 레코드 소매상들이 서울로 구름같이 몰려들었을 정도였다.

일본 오사카 고라이레코드사의 <강문수-눈물의 해협. korai1061> 음반도 흥미거리. 하나의 멜로디(곡)를 한 가수가 두 가지의 제목과 가사로 불러 동시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는 것은 사상 유례없는 기록이 아닐까?

시련도 있었다. 친일가요라고 비난받은 수많은 곡중 <감격시대, 1939년4월, okeh12237번>와 <혈서지원-이천오백만감격, 1943년11월, okeh31193>은 그가 부른 군국가요. 얼마 전 8ㆍ15 광복절 행사에 <감격시대>가 흘러나와 언론기관에 항의전화가 빗발친 것도 이 때문이다.

감격시대의 발표 연도를 제대로 알리 없는 방송 관계자들의 무지에서 나온 해프닝이지만, 암울했던 일제치하에서 강요당했을 군국가요의 존재는 후세들에게 나라 잃은 설움의 아픔을 전해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당시 남인수의 인기는 지금의 '오빠부대'를 능가했다. 그가 출연한 악극단은 벌떼처럼 몰려든 청중들의 거듭된 '앵콜' 요청으로 진행이 어려웠을 정도. '사회자들은 번번이 무릎을 꿇고 프로그램 진행을 사정해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청중들의 탄성과 흐느끼는 여성 관객들로 객석은 늘 술렁이고 극장 밖에는 남인수를 데려가려는 인력거꾼들이 서로 다툼까지 벌였다.

그러나 인기상종가는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던 해(1945년) 남인수는 결핵으로 병약해졌다.

민족분단의 상징인 38선이 굳어져가던 46년, 건강이 다소 회복되어 발표한 <가거라 38선>은 해방후 첫 취입곡. 박시춘이 운영하던 은방울쇼단을 맡으며 치밀한 계산, 과감한 투자로 '돈인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성공한다.

53년 7월 휴전후 발표한 또하나의 명곡은 <이별의 부산정거장, 유니버샬, 1954년>이다.

55년 추억의 소야곡, 청춘고백, 56년 산유화, 58년 무너진 사랑탑 등으로 히트 퍼레이드가 계속됐다. 마지막 취입곡은 60년 '4ㆍ19학생의거의 노래'였다.

62년(45세) 지병의 악화로 남인수는 세상을 떠난다. 조계사에서 한국연예인협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의 장송곡은 온 국민이 사랑했던 '애수의 소야곡'이였다.

남인수도 배호처럼 사후에 우후죽순격으로 탄생한 모창가수들로 인해 가짜음반이 난무한다.

SP음반들과 50~60년대 초반의 10인치 오리지널LP와는 달리 70년대이후의 대부분 LP는 남강수, 김광남 등의 모창가수 음반들이다. 그가 활약하던 시절은 반주 자체가 촌스러울 정도로 단순했는데, 가짜 음반들은 세련미가 넘치지만 맛깔이 떨어지는 치명적 한계를 갖고 있다.

남인수를 기리는 모든 일에 정성을 들이며 '예도매미회' 모임을 결성하고, 노래비 건립에다, 1991년부터 10회째 남인수가요제를 이끌어온 신해성과 그 애호가들.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남인수 사망 39주기인 6월26일 진주에서는 남인수동상제막식과 11회 가요제가 축제형식으로 치러진다. 팬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반가운 미담이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2001/05/15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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