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수정 요구, 일본 속셈은 시간끌기

"일본이 재수정을 받아들일 때까지 물러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교과서의 검정 취소는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 정부가 5월8일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내용 중 35개항에 대해 재수정을 요구하는 비망록을 일본 정부에 전달하면서 '교과서 논전'은 이제 제2 라운드로 접어들었다.

우리 정부는 재수정 요구안을 통해 일본이 답해야 할 사항을 전달한 만큼 당분간 일본측의 태도를 지켜본다는 입장이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이제 일본이 성의 있는 조치를 보여야 할 차례"라며 "일본의 태도 여하에 따라 우리 정부가 취할 대응 조치의 강도가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학문적 접근에 '검토' 모양세

정부의 재수정 요구를 계기로 일본의 정치권과 언론에서 찬반 논쟁이 활발한 것과는 달리 일본 정부는 "원칙적으로 재수정은 어렵다"는 쪽에 기울어져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11일 참의원 본회의 대표 질문에서 "교과서의 검정 합격을 취소하는 문제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단언했다.

다만 일본 정부는 한국민의 분노와 한일 관계 등을 감안, 한국 정부의 요구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교과서 검정 조사관과 역사연구가로 구성된 검토위원회를 발족시키기로 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마치 한국 정부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검정 결과 발표 직후인 4월3일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대책반'을 출범시키고 왜곡 내용 분석을 위한 전문가팀을 구성했던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한국의 재수정 요구안에 대해 "전문적으로, 학문적ㆍ객관적으로 면밀히 검토하겠다"며 "한국 정부가 차분하게 충분히 검토해 의견을 낸 만큼 이쪽으로서도 시간을 두고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학문적 접근에 학문적으로 대응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시간을 벌겠다는 속셈이다.

정부 관계자는 "검정통과 당시 일본측은 '주변국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교과서 내용 중 문제되는 부분은 모두 걸려냈다고 주장해 왔다"며 "우리 정부의 수정 요구서는 이 같은 일본측의 주장이 허구임을 학문적ㆍ논리적으로 입증해낸 반박서"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일본측의 학문적ㆍ객관적 검토 표명은 '교과서 논전' 제 2 라운드가 양국간의 역사 논쟁으로 흐를 수 있음을 알리고 있다.

우리 정부가 재수정을 요구한 항목은 일본의 우익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측이 집필한 후소샤(扶桑社) 교과서의 25개 항목과 기존 7종 교과서 10개항 등 모두 35개 항목.

정부는 이 항목 낱낱의 수정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본측의 사실(史實) 기술에 숨겨진 뒤틀린 역사인식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시대 착오적인 사관에 의해 씌어진 고대사와 근ㆍ현대사의 왜곡에 메스를 가해 일본의 퇴행적 역사관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 의지가 이번 재수정 요구안에 담겨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사 폄하

특히 정부는 후소샤 교과서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일본사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국사를 폄하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3국의 일본 조공설을 기술하거나 조선을 중국의 복속국으로 표현하는 것 등이 대표적 예이다.

또 후소샤 교과서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계에서 인정 받지 못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처럼 기술, 한일 관계사 서술에서 일본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논리로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특히 군대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고의로 누락하고, 태평양전쟁 당시의 반인륜적 잔혹행위의 실체를 은폐하는 등 가학사관(加虐史觀)을 드러내고, 러ㆍ일 전쟁을 마치 일본이 황인종을 대표해 백인종과 싸운 것처럼 서술하는 등 인종주의적 시각을 표현한 것도 재수정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부 관계자는 "이번 재수정안은 우리 정부가 학계의 신중한 의견 검토를 거쳐 냉정하고 합리적인 대안으로 제시한 것으로 일본 정부가 성의 있게 대응할 것을 촉구한다"며 "재수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일본은 앞으로 국제적인 위신 실추를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일 정치부 차장

입력시간 2001/05/1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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