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의 길따라 멋따라] 설악산 주전골계곡

1999년 말, 한국일보는 묵은 천년을 보내면서 특집기사를 내 보낸 적이 있었다. 지난 세월 국민으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았고 새 천년에도 그 사랑이 변치 않을 여행지를 꼽는 것이었다. 내로라 하는 국내 여행전문가 10명이 작업을 벌였다. 이변은 없었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여행지는 단연 설악산이었다.

설악산에서 사람의 발길이 가장 잦은 지역은 단연 외설악의 설악동. 산행이라기 보다는 관광코스로 여겨진다. 그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은 오색지구이다. 남설악의 능선을 거쳐 대청봉에 이르는 등산코스의 시발점이다.

그러나 역시 이 곳도 산행보다는 다른 이유로 인기가 높다. 김 빠진 녹물탄산수 맛이 나는 오색약수가 주인공이다. 위장병과 빈혈에 좋다는 오색약수는 계곡 초입에 있어 다리 품을 들이지 않고 마실 수 있는 데다 양양과 인제를 잇는 한계령 둔덕에 위치해 지나는 길에 들르는 사람도 많다.

대부분의 방문자들은 약수 한 모금 마시고 물병을 채운 뒤 서둘러 떠난다. 오색에는 오직 약수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사실 오색에는 약 2시간 정도의 트레킹으로 설악의 그윽한 풍취를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계곡이 숨어있다. 주전골 계곡이다. 그리 가파르지 않고 위험한 곳은 철다리와 안전난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아이들도 쉽게 트레킹을 할 수 있다.

트레킹은 오색약수 입구 건너편 계곡에서 시작된다. 차가 다닐 수 있는 너른 길을 약 1.3㎞ 쯤 들어가면 '성국사'라는 절이 나타난다. 절터의 규모와 경내에 있는 보물 제497호 삼층석탑의 양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장율사가 창건했으나 조선시대에 승려를 가장한 위폐범들이 본거지로 삼고 몰래 주전을 만들다가 들통이 나는 바람이 폐사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래서 계곡 이름이 주전골이 됐다고 해석한다. 절은 지금 중창 중. 부처님을 바깥에 모셔놓고 대웅전 불사 시주를 받고 있다.

성국사를 지나면 주전골의 절경이 펼쳐진다. 심한 가뭄 중이지만 이 곳에는 여전히 옥수가 흐른다. 눈을 들면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도열해 있다. 정확한 이름이 없는 이 봉우리는 산악인들 사이에 만물상, 혹은 주전봉으로 불린다.

물과 봉우리의 아름다움에 취해 한동안 걷다보면 선녀탕이다. 대 여섯개의 소(沼)가 하얀 바위를 타고 연이어져 있다. 물은 신록의 색깔을 머금고 있다.

푸르름이 신선한 이 계절에도 아름답지만 홍엽의 색깔을 담는 가을에는 더욱 절경이란다. 조금 더 오르면 금강문. 주전골 최고의 비경으로 바위와 숲, 계곡물의 풍광이 잘 어우러져 있다.

갈림길을 만난다. 왼쪽은 12폭포로 오른쪽은 용소폭포로 가는 길이다. 12폭포 길은 5월말까지 산불방지를 위해 폐쇄했다. 용소폭포는 이무기가 머물다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 폭포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시커먼 소를 만들어 놓았다.

용소폭포는 트레킹의 종착지. 오던 길을 되돌아가거나 용소폭포 바로 위에 있는 용소주차장에 올라서면 한계령길과 다시 만난다. 약 3.2㎞. 짧은 구간이지만 신록의 아름다움에 푹 빠질 수 있다. 설악산의 위력을 유감없이 느끼게 해 주는 계곡이다.

권오현 생활과학부차장

입력시간 2001/05/2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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