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사회] 국가적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

집단이기·제몫찾기 등 갈등조짐 시스템 작동 안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움직임이 심상찮다. 미국의 새로운 전략적 이니셔티브에 대응한 중국과 러시아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특히 중국은 20여년에 걸친 개혁ㆍ개방의 성과를 바탕으로 극동 패자의 지위를 노리고 있다. 일본은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힘입어 타율적이든, 자율적이든 자제해 왔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구한말을 연상시키는 열강쟁패 시대의 재도래를 우려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그러면 한국은 어떤가. 바깥이 폭풍전야라면 안은 이미 폭풍에 휩싸여 있다. 백가쟁명을 방불케하는 주장이 도처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한 진지한 논의가 아니라 집단이기주의와 제몫찾기가 중심이 된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미래 지향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인 논의는 실종된 인상이다.


소모적 정쟁, 개혁 제자리 걸음

정치권은 정권 재창출이냐, 정권 탈환이냐를 놓고 소모적 정쟁으로 일관하고 있다.

반세기만의 여야 정권교체를 민주주의의 본궤도 진입으로 여겼던 분위기는 사라진지 오래다. IMF환란은 넘었다 하지만 한국경제의 미래는 여전히 암담하다. 국제 경쟁력이 갈수록 약화하는 상황에서 선진국 진입의 구호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DJ정권이 IMF를 초래한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고 칼을 뽑아 들었던 재벌의 개혁은 레임덕이란 말이 나오자 말자 유야무야되는 느낌이다.

사회각계의 제목소리 내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노ㆍ사ㆍ정의 이견과 대립은 고삐가 풀려 갈수록 타협점과 멀어지고 있다. 민생개혁입법의 국회통과를 요구해 온 민주노총은 6월 한달간 연대파업 등 총력투쟁을 벌이겠다고 다짐했다.

이에 앞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는 내년 지방선거와 대선에서 특정후보에 대한 지지나 반대운동을 하겠다며 정치참여 선언을 하고 나왔다. 6급 이하 공무원과 교수도 내년 선거정국에서의 직ㆍ간접적 영향력을 염두에 두고 노조결성에 나섰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행정부도 시대변화에 걸맞는 자기변신을 못하고 있다. 교육부는 대학이 경쟁력을 가져야 국가가 경쟁력을 갖는다는 원론만 되풀이할 뿐 구체적인 방향과 방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대학 경쟁력 제고 명분으로 제기된 기여입학제 등에 대해서는 공론화를 꺼린 채 반대 원칙만 내세우고 있다. 의약분업 실패와 관련한 감사원의 감사결과에 대한 형평성 논란과 보건복지부의 반발도 행정력 부재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한반도 주변의 국제적 움직임에 눈 귀를 막은 이 같은 현상을 '좌충우돌식 사회'로 규정하며 우려하는 견해가 많다. 좌충우돌은 목적 지향적 행위가 아니라 대증적이고 상황에 반응하는 조건반사적 행위다. 민주사회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다.

민주사회에서 갈등은 다양성의 표현일 뿐 아니라 사회 안전판이자, 발전의 밑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충우돌식 갈등 분출이 우려되는 것은 왜일까.

일부에서는 DJ정권의 속성에서 좌충우돌의 원인을 찾는다. 노조와 시민단체 등을 우군으로 했던 DJ는 태생적으로 상대적 약자였던 사회세력에 우호적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DJ가 16대 총선을 앞두고 바람이 일었던 시민단체의 낙천ㆍ낙선운동을 실정법보다 우선함으로써 공권력을 후퇴시켰다는 비난도 있다. 홍위병을 동원한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대혁명이 혼란을 초래했듯이 DJ도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들 주장은 갈등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의미에서 기득권에 경도되거나, 과거식 국가주의로 흐르기 쉽다.


여론 주도할 국가적 목표설정 미약

영남대 사회학과 백승대 교수는 갈등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며, 그런 만큼 회피해서도 안된다고 강조했다. 백 교수는 경제성장이 상당 수준 이뤄졌고, 국제화가 진전됨에 따라 사회를 보는 개인의 시각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권리주장이 억압됐던 과거와 달리 개인이나 집단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야기다. 갈등이 보다 다양화하는 것은 민주화의 필연적 결과라는 주장이다.

그러면 현재의 좌충우돌은 문제가 없다는 것일까. 갈등의 다양성이 민주화의 척도라면 한국도 그렇다는 말인가. 백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갈등은 갈등을 조절하고 조화하는 시스템과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충우돌은 결국 이해관계와 권리주장의 대립을 조정하는 기능이 마비되거나 취약한 결과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문제의 원인을 정치에서 찾는다. 정치가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도무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백 교수는 현 정권이 여론을 주도할 국가적 목표설정과 대립조정 기능이 모두 허약해 국가적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DJ가 반독재 투쟁 경력에도 불구하고, 국가경영에서는 박정희 정권을 한 치도 탈피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미 시대적 적합성을 잃은 박정희식 국가경영노선을 답습하고, 기존의 관료ㆍ정치세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3김 시대'의 연장이 현재의 좌충우돌에 큰 책임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회는 디지털ㆍ정보화 시대로 진입했는데, 정치는 여전히 1970년대식 산업화 시대의 사고방식에 파묻혀 있다는 진단이다.

정치적 설득력 상실 징후를 실례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언론의 비판을 정치적 성과를 통해 정면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규제와 감시로 억제하려는 태도가 한 예다. DJ 집권 후에도 전혀 변하지 않은 정치권과 관료사회의 관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지적된다.

관료조직을 일방적으로 정치권의 의사를 집행하는 기관으로 고착시킴으로써 자율성을 박탈했다는 것이다. 자율성없는 관료조직이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그 과정에서 설득력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갈등 분출과 조정력 사이의 부정합 원인을 DJ의 1인정치로 설명하는 시각도 있다. 경희대 정치학과 임성호 교수는 현상황을 "총체적 위기"라고 규정한 뒤 그 원인을 저수준의 제도화에서 찾았다. 갈등은 이미 물리적 수단으로 억누를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는데, 이를 조정할 제도는 없는 것이 좌충우돌의 원인이라는 이야기다.


시민사회의 공정한 경쟁규칙이 없다

임 교수는 현 정권의 국정운영을 DJ 혼자서 구상하고 실행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현 정권은 초반부터 국정운영과 갈등조절 메커니즘을 제도화하는데 주력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DJ 개인의 권위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정치를 정체시켰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제도화 수준에서 현 정권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보다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고 진단했다. 그는 나아가 현재의 갈등분출은 DJ 정권이 출범 초 국민의 기대수준을 지나치게 상승시킨 것과 무관치 않다고 보았다. 기대수준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갈등분출을 심화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또 좌충우돌 현상을 사회적 공동가치나 컨센서스의 붕괴로 보는 견해에 반대했다. 사회적 컨센서스가 깨지는 것은 세계적 조류이자 탈산업사회의 일반적 현상이라는 것.

현재의 문제를 컨센서스의 붕괴로 돌리는 것은 자칫 정치권의 책임 회피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사회적 컨센서스는 정치권이 국민통합을 위해 만들어 제시하는 것이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 현재 위기의 원인이 DJ와 국민의 정부에만 있을까. 민병균 자유기업원장은 책임 범위를 보다 확대시켰다. 상대적인 사회적 약자의 불만분출은 권력과 명예를 지닌 사회지도층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 기인한다고 말했다.

박노항 원사의 병역비리 청탁자들이 모두 '가진 자'라는 사실은 우리사회의 상대적 박탈감을 심화시킨 게 사실이다. 노동자와 지역민의 집단이기가 표출되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는 설명이다.

민 원장은 그러나 이 같은 사회적 애로가 과정을 통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히 '막힌 것을 풀어주는 것이 정치'란 점에서 현재의 사태는 정치적 무능력과 직결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 정권이 투쟁은 잘 했는지 모르지만, 경제의 기본질서에 대한 이해와 제도 운영에는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서울대 정치학과 박찬욱 교수는 민주화 과정에서 아래로부터 욕구가 분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기간이 너무 늘어져 문제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가 보는 한국사회의 민주화 기점은 1987년 6월항쟁.

10여년이 지난 만큼 민주화가 공고해지는 단계로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그는 현재의 진통을 시민사회의 경쟁규칙 부재로 설명했다. 법과 민주적 질서가 개별적 이익실현의 룰로 정착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적 리더십의 빈곤을 이 같은 상황의 결정적 이유로 들었다.

문제는 리더십과 제도화 부재로 인한 좌충우돌식 사회행태가 과연 현 정권에서 어느 정도 개선될 수 있는가 이다. 내년이면 지자체장 선거와 대선이 잇달아 치러진다.

그만큼 파당적 이익이 우선되고, 초당적 정치ㆍ사회환경 개선을 위한 정치력의 집중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이 뿐 아니다. 사회각층의 집단적 움직임이 선거를 계기로 더욱 확대될 것은 명백하다. 한국호가 안팎곱사등의 상황에서 한 차례 진통을 겪게 될 가능성이 크다.


국가 시스템 재정비해야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는 이를 뿐 아니라, 실망해서도 안된다는 주장도 강하다. 이것은 시스템 정비 포기가 국가적 불행으로 직결된다는 당위성에 근거하고 있다.

이들 주장은 DJ가 국가의 운영을 제도화하고, 조직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쪽으로 개혁의 방향을 롤백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DJ의 임기가 아직 1년 반이나 남았기 때문에 시스템 개혁을 위해 '한번의 승부'를 걸 기회는 있다는 것이다.

비군부 정권이 2차례 들어섰지만 한국의 정치환경은 여전히 가부장적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민정권과 국민의 정권은 모두 권력획득 과정의 정당성을 통치의 정당성으로 확대하는 우를 범했다는 지적은 의미있다.

한반도 주변환경이 또 한번 크게 소용돌이치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안에서 좌충우돌하는데 몰입해 있다. 갈등의 제도화와 민주적 경쟁원칙을 조기 정착시키지 못한데서 오는 정치적 낭비는 21세기 한국의 국제적 위상에 결정타를 날릴 수도 있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6/05 21:31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