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사회] 재벌개혁 없던 일 되나

규제완화로 선회, 경제정책 일관성 논란

현 정권은 IMF 환란의 반사이익을 적잖게 얻고 집권했다. IMF로 인해 파탄 일보직전에 놓인 경제는 경제전반에 대한 정권의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정권과 재벌의 갈등과 긴장관계는 한국 자본주의의 이면사였다.

하지만 DJ는 취임과 동시에 경제에 대한 정치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는 행운을 누렸다. 현 정권이 집권 직후 한국경제 병폐의 원인을 재벌로 지목하고 대대적인 수술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재벌 개혁 '5+3원칙' 근본 퇴색

현 정권의 재벌정책은 1998년 2월 정부와 재계가 합의한 '5+3원칙'으로 구체화했다.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상호지급보증 해소, 재무구조의 획기적 개선, 핵심역량 강화, 지배주주 및 경영진 책임경영 강화, 제2금융권 경영지배구조 개선, 순환출자 억제 및 부당 내부거래 차단, 변칙상속ㆍ증여 방지가 그것이다.

5+3원칙의 집행을 위해 출자총액제한제도와 30대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 부채비율 200% 기준 등 규제정책을 만들었다.

특히 핵심역량 강화 방안으로 실시한 재벌간 빅딜은 한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획기적 조치였다. 이 같은 재벌정책은 그러나 집권 3년이 지나면서 현저하게 힘이 빠지는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규제완화 움직임이다.

공정거래위 등 경제부처와 전경련 등 재계 인사들로 구성된 규제완화 작업전담팀은 5월28일 모임을 갖고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완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한 출자에 대해서는 2003년 3월까지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적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기업규제 정책 완화 움직임은 최근의 경기침체를 근거로 재계가 요청하면서 시동이 걸렸다. 재계는 불투명한 경제상황 속에서 규제중심의 재벌정책이 투자의욕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규제완화가 기존의 5+3원칙을 무효화시키는 첫걸음이라며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고계현 경실련 시민입법국장은 규제완화 조짐에 대해 "DJ정권의 힘이 빠지면서 재벌에 손을 드는 것 아니냐"며 의구심을 표시했다. 지금까지 재벌개혁 원칙에 철저하지 못한 결과 근본적인 후퇴로 연결되는 인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가 재벌에 공격의 빌미를 준 점도 아울러 꼬집었다. 시장에도 충실하지 못하고, 규제대책의 실행에도 충실하지 못함으로써 경제운영의 기조를 혼란시켰다는 지적이다.


흔들리는 경제운용 기조

경제계의 평가도 곱지 않다. 삼성경제연구소는 5월23일 내놓은 보고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조건'에서 정부가 법률과 시장보다 재량에 의존한 기업정책을 양산했다고 비판했다. 자의적 정책은 예측 불가능성을 확대하고, 이것은 다시 기업전략 수립을 어렵게 한다는 이야기다.

재벌에 대한 규제완화와 지속적인 규제 중 어느 것이 장기적으로 경제에 효율적일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문제는 원칙과 일관성이다.

정부는 이미 금융기관에 대한 공적자금 지원과 부실기업 퇴출 등에서 자의적 원칙 적용으로 인해 신뢰성을 의심받는 상황에 직면했다.

민병균 자유기업원 원장이 5월초 '시장경제와 그 적들'이란 글에서 정부의 경제이념을 공격한 것은 이 같은 상황에 힘입은 것이다. 내년부터 단계 도입하기로 한 소액주주 집단소송제를 놓고도 재계는 공격을 늦추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내년 선거정국을 앞두고 여당이 남발하는 선심성 경제정책이다. 절차를 무시한 채 경제 주무부서를 당혹케하는 이같은 움직임으로 인해 경제정책의 좌충우돌이 심화할 것이란 우려가 높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6/05 21:36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