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의 길따라 멋따라] 곰배령

원시의 숲이 펼치는 꽃잔치

불행일까 다행일까. 곰배령으로 가는 길은 대부분 아스팔트로 포장이 돼 있었다. 짧은 길이 아니다.

강원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서 방태천을 따라 약 26㎞. 앞에 펼쳐지는 것은 오로지 산의 능선이다. 산만 바라보고 계속 산으로 들어간다.

처음 16㎞는 포장, 이후 4㎞는 비포장, 다시 4㎞ 포장, 그리고 마지막 2㎞는 비포장이다.

포장길은 시골의 농로 같은 소박한 포장이 아니다. 노면이 고속도로처럼 매끄러운 왕복 2차선 도로이다. 손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이 사는 이 곳에 왜 포장공사를 했을까. 알고 보니 사람을 위한 도로가 아니었다. 그 험한 산 속에 양수발전소를 짓고 있다.

이름은 양양양수발전소. 산 중턱을 허옇게 파내고 콘크리트 구조물이 들어서 있다. 전력 소비량이 적은 야간에 남는 전기를 이용해 물을 퍼올렸다가 낮에 그 물을 이용해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이다. 그래서 길을 만들었다.

그 길 때문에 자연에 묻혀 있던 오지가 드러났다. 설피마을(인제군 진동리)과 곰배령이다. 설피는 눈 길을 걸을 때 발에 묶는 일종의 체인신발.

겨울에 설피가 없으면 활동을 못 할 정도로 눈이 많은 곳이어서 설피마을이란 이름이 붙었다.

여행 마니아에게는 겨울 명소로 꽤 유명하다. 곰배령은 설피마을과 인제를 잇는 고개. 남설악의 최남단 봉우리인 점봉산의 옆줄기이다. 말이 고개이지 해발 1,100m나 된다. 설피마을과 곰배령을 잇는 왕복 8㎞의 산행로는 원시림의 풍취에 젖으며 가벼운 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이다. 요즘은 가끔 관광버스가 사람을 실어 나를 정도로 외부에 알려졌다.

급경사가 없고 바위나 너덜지대도 없다. 가족 트레킹에 제격이다. 산보하듯 걸어도 왕복 4시간이면 충분하다.

트레킹의 시발점은 설피마을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조침령과 곰배령 길이 나뉘어지는 삼거리.

오른쪽은 조침령, 왼쪽은 곰배령이다. 약 1.5㎞ 구간은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넓은 길. 그 길 끝에 다섯 채의 민가가 있다. 한 곳에 몰려 있는 것이 아니라 200~300m의 간격을 두고 이어져 있다. 예전에 화전민이었던 주민들은 곰취, 감자 등을 재배하고 산나물을 뜯으며 산다.

민가가 끝나는 곳에서 길의 모습이 확 바뀐다. 두 사람이 교행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좁다.

그리고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원시림이 펼쳐진다. 도대체 원시림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이 길에 들면 직접 볼 수 있다.

온갖 활엽수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하고 덩굴식물들이 그 가지를 감고 있다. 고사리는 배드민턴의 셔틀콕 모양으로 자라 사람 키만큼 솟아올랐고 사이사이 속새라는 희귀식물이 까만 줄기를 드리우고 있다. 영화에서 분명히 본 모습이다. 어떤 영화일까. '쥬라기 공원'이다. 숲 속에서 커다란 공룡이 눈을 부라리고 튀어 나올 것 같다.

약 1시간 쥬라기 공원을 걷다보면 갑자기 하늘이 터진다. 곰배령 정상이다. 정상은 넓은 초원이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이어서 키 큰 식물도 없다. 모두 발목까지 오는 풀이다. 그냥 풀이 아니라 꽃풀이다.

이제 꽃의 잔치가 시작됐다. 9월 말까지 온갖 꽃들이 연이어 피면서 초원의 색깔을 계속 바꾸어 놓는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아이들이 초원에서 뛰논다. 또 영화가 생각난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다. 줄리 앤드류스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던 알프스의 평원을 닮았다.

행복한 상상은 코를 통해서도 자극된다. 바람에 실려오는 더덕 냄새. 혼절할 듯 진하다.

권오현 생활과학부차장

입력시간 2001/06/06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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