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상선 NLL·영해침범] “제주해협에 구멍이 뚫린다”

북 상선 무해통항, 최악의 군사 시나리오?

상선 4척을 밀어붙이기식으로 잇달아 제주해협에 진입시킨 북한의 의도는 무엇일까.

북한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만큼 한국측의 해석도 다양하다. 제주해협에 대한 무해통항권(無害通航權)을 인정받아 항로를 단축하려는, 이른바 ‘새로운 항로개척’ 의도가 유력하게 꼽히지만 단정하기는 이르다.

항로개척론과 같은 온건한 해석에 대해 군사적 노림수가 숨어 있다는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울러 무해통항권을 인정받아 상업용 단축항로로 이용하더라도, 유사시 필요하면 군사적으로 전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군사적 이용 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제주해협에 대한 무해통항권을 인정하는 것은 남한이 해양 조건의 우위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라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 해군은 동해, 서해, 남해를 장애없이 기동하면서 3면을 유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반면, 북한 해군은 동ㆍ서해로 작전영역이 단절돼 있는 현실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제주해협개방은 결과적으로 북한 해군이 남해를 동ㆍ서해 연결 회랑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군사적 이용 가능성 배제 못해

이 같은 우려는 북한에 대한 불신도 불신이지만, 무엇보다 북한 상선의 성격에서 기인한다.

총톤수 79만여톤에 달하는 북한 상선은 체제의 성격상 군사용과 분리해서 생각하기가 어렵다. 언제든지 군사적 목적에 사용될 수 있는 상선에 무해통항권을 인정하는 것은 북한 군함에 무해통항권을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이다.

아울러 북한은 군용선박도 외부를 민간 상선으로 꾸며 외화벌이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 상선의 제주해협 통과가 일상화한다면 북한군의 대남 해상작전에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일부에서는 북한 상선에 무해통항권이 인정될 경우 “휴전선 지하에 뚫어놓은 땅굴을 남해안에 뚫는 것과 같다”며 우려하고 있다.

남ㆍ북 양면에서 동시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들은 정부에 “남북정상회담의 분위기를 이용해 최대한의 양보를 얻어내려는 북한의 전략에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상선의 군사적 이용과 관련한 시나리오는 어떤 것들을 가상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기뢰부설을 통한 항구와 제주해협 봉쇄가 거론된다. 상선을 이용한 기뢰부설 방법은 2가지가 거론된다.

우선 상선이 직접 기뢰를 부설하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1만톤급 이상의 대형 상선에 기뢰부설선을 탑재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기회를 보아 적절한 지역과 시간에 모선(상선)에서 진수된 기뢰부설선이 신속히 기동하면서 기뢰를 까는 방법이다.

기뢰부설은 독립된 작전이 아니라 휴전선을 통한 대규모 남침과 동시에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수출입 물동량이 집중되는 부산항과 마산항, 울산항 등을 대상으로 한 항구봉쇄의 효과는 경제 목줄잡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반도 긴급상황 발생시의 핵심 대응전략인 ‘한미연합작전계획’(일명 작전계획 5027)에 치명적인 차질을 초래할가능성이 높다.

1992년 수립돼 1995년 보완된작전계획 5027은 5단계로 구성돼 있다. 전쟁예방에 초점을 맞춘 1단계는 미 전투력 증강 및 신속전개 억제전력의 한반도 배치다. 이 단계에서미군은 1개 항모전투단과 스텔스폭격기 등 200~300대의 항공전력, 2만여명 규모의 1개 해병원정군을 24~72시간 내에 한반도에 투입한다.


전쟁 반발시 기회부설 등으로 항로 차단

1단계 조치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은 90일 이내에 또다시 대규모 병력을 증파하게 된다. 지상군 50여만명과 항공기 1,600여대, 5개 항모전투단을 포함한 함정200여척이 증파 대상이다.

병력증강과 더불어 전개되는 3단계는 북진 및 대규모 상륙작전, 4단계 점령지 군사통제확립, 마지막 5단계는 남한정부주도하의 한반도 통일이다.

이 같은 작전계획 5027은 그러나북한이 기뢰부설에 성공할 경우 초장부터 빗나가게 된다. 주로 해상수송에 의존할 1단계의 해병원정군 투입과 2단계 지상군 증강계획이 기뢰에 발목을 잡히게 된다. 한국군에 대한 바다로부터의 지원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휴전선을 돌파한 북한군은 보다 용이하게 전략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이와 함께 항로차단을 위해 부설된기뢰는 각종 수송선의 접근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중동지역으로부터 오는 유조선 뿐 아니라 각종 군수품의 적시 수송을 막아 한국군의 보급능력을 저하시키게 된다.

1, 2차 세계대전에서도 기뢰는 해상보급로 교란에 큰 역할을 했다. 1차대전에서는 상선과 군함 1,000척 이상이, 1차대전때는 2,665척이 기뢰에 의해 침몰되거나 손상됐다.

상선을 이용한 기뢰부설은 단순한 가상이 아니다. 각국 해군전략가들은 전쟁 초기단계에서 가장 유력한 기뢰부설 수단으로 상선을 꼽고 있다.

실제로 리비아는 1986년 여름 상선을 이용해 은밀히 홍해에 다량의 소련제 기뢰를 부설한 적이 있다. 기뢰제거는 해군의 임무 중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것 중의 하나다.

한국전 당시 유엔군은 북한이 원산항 방어를 위해 부설한 기뢰를 제거하는데 수주일을 소모했다. 이 과정에서 소해정을 비롯한 유엔군 함정 10척이 손실을 입었다.

상선을 이용한 북한군의 가상 공격에는 잠수함 작전이 포함된다. 대형 상선의 하부 등에 잠수함을 바짝 붙여 기동함으로써 탐지를 회피할 가능성이 있다. 잠수함은 단독으로 기동하는 경우에도 탐지될 확률이 50% 이하에 불과하다.

대형 상선에 밀착해 움직이는 잠수함은 P-3C 대잠초계기나 함정의 기존 음파탐지기(소나)로는 탐지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해군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상선과 손발을 맞춘 잠수함은 한국해군을 쉽게 따돌릴 수 있다. 적절한 지역에서 상선이 특이 행동으로 한국해군의 주목을 끄는 동안 잠수함은 은밀히 목표 해역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북한 잠수함은 기뢰부설, 특수부대 침투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전시에 잠수함은 가장 흔히 쓰이는 기뢰부설 수단이자 항구봉쇄 무기다. 북한은 현재 60여척에 이르는 잠수함과 잠수정은 물론이고 대량의 기뢰와 상당규모의 기뢰부설선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북한 상선은 또 침투용 반잠수정의모선으로서 특수전 게릴라 부대를 풀어놓는 플랫폼으로 활용될 수 있다. 상선으로 위장한 북한 선박이 한국 근해에서 소형 간첩선을 내려놓은 경우는 실제로 있었다.

나아가 상선, 특히 화물선은 구조상으로도 상륙주정이나 고속부양선의 모선 기능을 할 수 있다. 석탄이나 곡물을 운반하는 화물선은 선체 공간(짐칸)이 텅 비어있는데다, 자체 하역을 위한 크레인 시설까지 장착돼 있다.

약간의 개조를 거친 대형 화물선은 상륙함(LST)에 버금가는 전술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남한에 대한 남ㆍ북 양면 동시공격 가능성을 기우로만 돌리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일부에서는 상선에 전자장비를 탑재해 한국측의 전파를 교란하거나, 해상 ‘대남 해적방송’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한국 해군의 작전태세 노출

문제는 이 같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상선이 군사용으로 전용되지 않도록 한국측이 감시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각 항구에 정박하거나 수리창에 들어간 상선에 대해 적재물이나 개조상황을 일일이 체크해야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공위성을 통한 감시도 한국군의 능력으로는 실현가능성이 없을 뿐 아니라, 설사감시한다 하더라도 엄청난 비용을 들여야 한다. 영해에 진입하는 북한 상선을 개별 검색하는 것도 현재 해군의 역량으로는 힘에 부친다.

군사적 시나리오가 아니더라도 북한상선의 제주해협 등 한국영해 통항은 매우 민감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 해군이 어떤 형태로든 대응하지 않을 수 없고, 이 과정에서 우리측의 기동태세를 노출하기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6월2일 북한 해운당국과 북한 상선간 교신내용에 주목하고 있다. 북한 당국이 상선에 “항로를 개척하면서 남한 군당국이 보이는 반응을 보고하라”고 지시한 점이다.

북한의 부가적인의도가 부산항에 근거를 두고 남해 방위를 담당하는 해군 3함대의 대응과 대비태세를 정탐하는데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추측이다.

평시에도 제주해협과 동ㆍ서해 영해를근접 항해하는 북한 상선은 한국 해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현재 한국 해군은 강원도 동해(1함대), 경기도 평택(2함대), 부산(3함대)에 각각 함대 사령부를 두고 3면을 방어하고 있다.

하지만 작전의 무게는 서해와 동해의 북방한계선(NLL) 방어에 두고 있다. 제주해협으로 북한 상선이수시로 통항할 경우 기존 3함대의 전력으로는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워 1함대와 2함대 지원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최대 긴장지역인 서해와 동해 북방지역에 구멍이 생길 공산이 있다.

해양경찰도 과도한 부하를 지기는 마찬가지다. 제주해경은 6월4~5일 군의 작전지시에 따라 북한 상선 감시활동에 모두 7척의 함정을 동원했다.

제주해경에 소속된 3,000톤급1척 등 300톤급 이상 5척 가운데 4척이 동원됐고, 소형 경비함도 3척이 따라 붙었다. 해경의 기본 임무는 조난선박 구조와 영해침범 불법 어로행위단속, 밀수ㆍ밀입국 선박 단속 등의 해상치안이다.

해경이 해군을 보조해 북한 상선을 감시하는 동안 해경 본연의 업무는 공백상태가 되다시피 했다.


남북간 정치ㆍ군사적 신뢰와 보장 선행돼야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는 군사적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냉전ㆍ수구적 발상이라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반론은 낙관적인 대북 정치관을 안보적 고려와 혼동하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안보는 ‘최악의 1%’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상당수 군사 관계자들은 따라서 북한 상선의제주해협 무해통항에는 남북한간 정치ㆍ군사적 신뢰와 보장장치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국제법적 기준만으로 남해 해상통로를 개방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6/12 20:41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