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덩샤오핑과 김학철

“불멸의 지도자-등소평”를쓴 그의 막내딸 등용 여사 (중국어로 덩룬ㆍ’나의 아버지 등소평’의저자)가 6월 11일 한국판 출간기념회를 위해 서울에 왔다. 그녀는 51세다.

이 책은 642쪽에 무게가 2kg나 된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 총비서 였으며 당부주석이었던 아버지 등소평의 문화대혁명시기인 1966~1976년까지의 모택동과의 관계를 쓴 것이다.

그렇게 서울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중국에서의 항일 무장독립부대인 조선의용대의 ‘마지막분대장’이었던 김학철옹은 6월 8일 서울 적십자 병원에서 감염성 종영수술을 받고 입원 중이다. 그는85세다.

그는 1996년 ‘20세기 신화’라는 제목의 소설책을 냈다. 문화 대혁명기(1966~76년)전의 대약진운동때(1957년~65년)의 조선족 자치주 연변지식인들의 삶을 그린 360쪽 짜리 무게 5백9가량의 책이다.

2kg나 5백g의 책 무게를 굳이 말하는 것은 두사람이 중국에서 누린 지위의 높낮음때문이 아니다. 두 책의 내용이 무게만큼 차이가 있냐는 의문이 있기 때문이다.

두책은 모두 신중국에서는 빼놓을수 없는 모택동(1893~1976)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김옹은 1916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를 나와 41년 태항산에서 중공군의 우군으로 조선의용대 분대장으로 일본군과 싸운 이색적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부상을 입고 나가사끼에서 수감중 해방을 맞은 의열단의 김원봉 파에 속한다. 그는 김원봉을 따라 북으로 갔고 또 1950년에 연변으로 망명해 연길 문학계의 책임지도원이 되었다.

적어도 1957년 대약진운동과 함께 우파문인으로 인민농장에 가기까지 그는 모택동을‘신명같이’존경했다.

그러나 인민농장에 불어닥친 가난, 콩한알을 1전을 주고 사먹어야 하고 젊은 지식인이 소의 콩깨묵을 훔쳐 먹어야 하는 기근을 보며 그는 울부짖게 된다. 일제 때부터 소설가였던 그는 소설속에자신을 심조광이라는 주인공으로 바꾸고 1957~1965년까지의 연변의 삶과 모택동 그리고 조선족 동포를 그렸다.

그는 왜 그의 소설의 제목을 ‘20세기 신화’로 했는가의 이유를 은근히 비치고 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있어서 작가의 역할이 무엇이냐는 자문을 그는 동료 문인들에게 목숨을 걸고 이야기하고 있다.

“도식주의의 미이라에다가 오만가지 안료로 화장을 시켜서 문단에 올려 놓는걸 우리는 창작이라고해왔습니다…. 진실을 씁시다. 날조두 하지말고 조각두 하지 맙시다. 제가 저를 속이지 맙시다. ‘20세기 신화’를 꾸며 내지 맙시다. 제발 이젠 초자연적 신화는 좀작작 꾸며 냅시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 낸 소설속 모택동 진솔은 1964년 11월 연변 모택동 동상목에 걸린 대자보였다. “진시황+뜨로쯔끼=모택동. 모택동-반소 히스테리=굶주림.극좌적*무자비한 탄압=모씨 황국. 모택동 신격화=0.0000”이었다.

그가 이 소설을 쓴 것은 1965년 3월 이를 일어로 번역 하다가 1967년 어느날 그는 27만자에 달하는 이 소설로 10년을 감옥에 살다가 1987년 ‘불허발표’속에 이 소설 원본을 찾고 1992년에 책으로 낼수 있었다.

이런 얕은 책에 비해 등용의 “불멸에는 그녀의 아버지와 문혁과 모택동과 그의 가족과 중국의 역사가 뒤섞여 있다. 그녀의 책에는 중국의 현실이 있고 역사가있고 모택동의 야심이나 강청등 4인방의 음모가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술 되어 있다. 다만 흥분이나 분노가 없다.

김학철 옹 소설속 대자보와는 달리 1966년 모택동에 사는 중남해 수영장벽에는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걸렸다.

“반동적 자본계급(부르즈아지)입장에서 문화대혁명을 갈아 뭉개고 무산계급(프로테라리아트)의 사기를 꺾고 의기양양해 있다. 이 얼마나 악랄한 일인가”. 나는 이 대자보에서 모택동 임에도국가 주석 유소기도 총비서 등소평도 이를 모르고 죽고 유배되어야만 했다.

총비서 등소평도 이를 모르고 두사람은 저멀리 조선족 자치주에서 일제와의 전투에서 한다리를 잃은 한 소설가가 부르짓는 ‘진실을 밝히자’는 소리는 들어 본적도 없었다.

등용은 ‘불멸의 등소평’을 그의 사후 3년이 지난 2000년 3월에 썼다.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은 1981년 “실천 이야말로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 사실을 통해 옳다는 것을 찾아 얻는다”는 당의 역사에 대한 결의로 개발과 개혁을 향하기로 하고 일단락 됐다고 이책은 적고 있다.

모택동의 무오류성의 신화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 결의는 “모택동은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에서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 전생얘를 통틀어서 보면 중국 혁명에 대한 공적은과오를 훨씬 능가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공적이 제1이오 과오는 제2이다”고 결론 내셨다.

과연 어쩔찌 등용여사는 김학철 옹에게 한번 물어 과연 그럴찌 등용여사는 김학철 옹에게 한번 물어 ‘나의 아버지 등소평’ 재3부를 완성 했으면 한다.

입력시간 2001/06/20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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