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63)] 야키모노(燒物)①

도자기를 가리키는 일본어로는 한자를 소리로 읽은 '도지키'(陶磁器)라는 말이 있지만 '야키모노'(燒物)라는 고유어가 훨씬 널리 쓰인다.

'구운 것'이라는 뜻으로 '이자카야'(居酒屋)에서 고급 '료테이'(料亭)에 이르기까지 각급 음식점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생선구이도 똑같이 불린다.

일본 음식점의 그릇이 거의 도자기이니 일본인은 늘 '야키모노에 담긴 야키모노'를 먹고 있는 셈이다. 도자기가 얼마나 일본인의 생활속에 깊이 파고 들었는지를 잘 짚은 말장난이다.

식기용이나 장식용 도자기를 살 때 생산지를 따지는 버릇도 우리에게는 낯설다.

'아리타야키'(有田燒)는 사가(佐賀)현 아리타 도요지에서 만들어진 야키모노이고, 교야키(京燒)는 교토(京都) 일대의 도요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밖에도 세토야키(瀨戶燒) 비젠야키(備前燒)등 일일이 도요지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 생산지마다 독특한 전통을 이어오지 않았으면 정착하기 힘든 버릇이다.

도자기는 질그릇(토기)과 오지그릇(도기) 사기그릇(자기) 등 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모든 그릇을 총칭한다.

세계 어디서나 토기에서 도기, 도기에서 자기로 발전했고 자기 가운데서는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했다. 도기 단계까지는 어느 나라나 쉽게 이르렀지만 자기로의 비약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과 중국, 베트남이 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자기 단계에 도달했던 것으로 꼽힌다. 그 중에서도 중국에서 수입한 원천 기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결과인 한국의 청자와 백자는 당시 세계 최고의 기술 수준에 도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한국의 선진 도자기 기술은 일본 도자기사의 전환점마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야키모노에 미친 한반도의 영향은 3세기 무렵까지 약 500년간 만들어 진 '야요이'(彌生) 토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해 패총에서 발견된 '김해식 토기'는 쓰시마(對馬)와 규슈(九州)의 야요이 유적에서도 출토됐다.

고분 시대에 들어 야요이 토기를 계승한 '하지키'(土師器)가 널리 만들어진 가운데 5세기에 한반도에서 '스에키'(須惠器)가 전래돼 일상용구로 각광을 받았다.

도기(陶器)라는 한자 이름이 차용됐지만 '스에모노'라고 불린 이 토기는 일본 최초로 환원 번조(燔造)에 의한 회색 경질 토기였다. 그릇을 구울 때 산소를 많이 들여 보내는 산화 번조와 달리 1,1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공기 주입을 막아 불완전 연소시킴으로써 재질을 고르고도 단단하게 했다.

환원번조에 필요한 가마는 물론 양산을 가능하게 하는 녹로도 함께 도입됐다. 당시까지 부녀자의 과외일이었던 그릇굽기가 남성 장인의 손으로 넘어가는 사회적 변화도 '스에키'가 계기였다.

도기의 역사는 8세기 중엽 아이치(愛知)현 사나게(猿投)요에서 잿물 유약을 발라 고온에서 그릇이 구워져 만들어지면서 시작됐다. 9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만들어졌고 '시라시'(白瓷)라고 불렸지만 어디까지나 도기였다.

일본의 도기는 이후 16세기까지 여러 갈래의 발전을 거치며 풍부한 독창성을 획득했다. 자기를 전문적으로 굽는 사람까지 도공(陶工)이라고 부르는 데서도 도기가 야키모노의 주류라는 뿌리깊은 인식을 읽을수 있다.

도기의 발달은 차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중국식 덩어리차 마시기에서 시작한 일본의 차도는 14세기 상류층에 크게 성행했다. 그것이 찻그릇을 비롯한 중국 물산, 즉 '가라모노'(唐物)의 유행을 불렀다.

수입 물량이 한정된 만큼 중국의 청자와 백자를 흉내낸 도기가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흐름은 16세기 다케노 조오(武野紹鷗)·센노리큐(千利休) 사제가 '와비차'(侘び茶)를 꽃피우면서 반전했다.

완전한것보다는 어딘가 흠이 나고 부족한 것, 날렵한 것보다는 투박한 것을 높이 치는 와비의 미의식이 풍미하면서 기술적으로 뒤진 일본산 도기의 수요를 크게 끌어 올렸다.

중국산에 비해 은은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자랑한 한국 도자기에 대한 열기도 와비차 전통과 뗄 수 없다.

무로마치(室町:1338~1573년)시대 후기 들어 가장 각광을 받았던 찻그릇은 '고라이차완'(高麗茶碗)으로 불린 한반도산 도자기였다.

일본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조선 상류층이 쓰던 고급 백자가 아니라 서민들이 생활용기로 쓰던 잡기였다.

현재 일본 최고의 찻잔으로 꼽히는 '이도차완'(井戶茶碗)은 누가봐도 당시 조선 서민들의 막사발이었다. 우리는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 못했던 이런 막사발을 찻그릇으로 확보하려는 일본 상류층의 경쟁은 임진왜란의 중요한 동기로 꼽힐 정도로 치열했다. (계속)

입력시간 2001/06/2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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