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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축구공 위의 수학자' 강석진 교수 (下)

축구에 맺힌 한, 수학 풀듯 풀어가

처음 그와 만나기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매번 그의 첫 응대법은 이런 식이었다.“ 실례지만....” “실례하십시오.” “아침부터 죄송하지만,...” “아침부터 죄송하십시오.”

알고보니 유전이었다. 대학시절 친구 하나가 그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가 부친이 받은 적이 있다. “여보세요. 거기 석진이네 집인가요?” “아니오. 여긴 내 집이오.”

자연대 축구부의 송별회 자리에서도 ‘퇴임말기’를 맞은 자칭 ‘조폭두목’의 일장훈시는 남달랐다.

“공식적으로는 떠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나더러 ‘전(前) 감독’이라고 부르는 놈만 있으면 죽을 줄 알아! 앞으로도 내 이름은 영원히 강 감독이다, 알겠냐!” 그날도 약 1주일간의 중국출장후 귀국하자마자 집에 가방만 던져놓고 부리나케 운동장부터 달려나온 강 감독이었다.

서울대에서 이적하는 프로수학선수 강석진(40)교수. 그가 얼마나 지독한 축구광인지는 익히 알려져있다. 5년전 ‘축구공 위의 수학자’란 책까지 직접 써서 스스로 공표한 바가 있다. 제목만 그럴듯하지 사실상 수학자 얘기보다는 축구공 얘기로 도배한 글이다.

평소 행동거지도 ‘교수용’이 아니라 ‘축구감독용’이다. 복장부터가 당장이라도 시합에 뛰어들 태세다. 운동모자에다 깡충한 반바지, 배낭과 운동화차림으로 온 교내를 활보한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온통 생채기들로 화려하다. 일부러 그것들을 봐달라고 다리를 드러낸게 아닌가 의심마저 들게 한다.

그나마 배낭속에 축구공을 담고 다니지 않는게 다행이다. 얼굴도 동안인데다가 도무지 학자티가 나지 않다보니 엉뚱한 오해도 받는다. 서울대에 부임한 초창기 몇해 동안엔 조교인줄 알고 따라와 ‘시험문제를 좀 가르쳐달라’며 떼를 쓰다 혼나고 간신입생들도 많다.


약골에서 축구광으로 변신

어릴때만해도 운동 근처엔 얼씬하지도 못했다. 마음 여리고 겁 많은 약골이었다. 다른 아이들에겐 능수능란한 팽이치기나 연날리기, 공차기 종목조차 단 한가지도 제대로 할 줄 아는게 없었다. 하기만 하면 넘어지거나 엉키기 일쑤, 아무도 자기편에 끼워주지 않았다.

가족 내력이기도 했다. 집안을 통틀어 책벌레만 많았을뿐 운동체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는 전 성균관대 교수 강신항씨, 어머니는 전 성신여대 교수 정양완씨, 그외 15분차이로 12대 종손의 자리를 놓친 쌍둥이 동생이나 삼촌 등 온통 교수들로 집단을 이룬 학자집안이다.

특히 아버지는 타 대학 학생들까지 몰려와 북새통을 이룰만큼 호쾌한 명강의로 이름난 국어학자였지만 가정에선 더없이 무서운 사령관이었다. 새벽 5시반의 아침 식사를 비롯 철저한 스파르타식으로 전 가족을 이끌었다.

그런 아버지 아래 동생은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총애를 받았지만 오히려 장남에다 종손인 그는 갖가지 일탈 전력으로 오래도록 부모님 속을 썩혔다.

초등학교 2학년때 우연히 아버지의 학과 조교가 라디오 농구중계를 듣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스포츠란 것을 알았다.

당시 제5회 아시아 농구 선수권 대회 마지막 날, 한국과 필리핀의 경기 중계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 조교로부터‘농구엔 신동파, 축구엔 이회택’이란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축구와 이회택의 이름이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년 뒤 직접 TV에서 지켜본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은 더욱 그를 사로잡아 버렸다. 그건 운동경기가 아니라 거의 한편의 영화였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브라질 공격대앞에 장렬히 몸을 던지며 그 아찔한 문전 골을 기어이 걷어낸 뒤 품안에 공을 꼭 껴안고 파란 잔디위에 쓰러져 있던 이탈리아의 골키퍼.

일찍 한자를 깨친 것도 신문에 나온 축구선수의 이름을 외다보니 생긴 결과였다. 예나 지금이나 외는데는 도사. 대학때까지도 웬만한 종목의 세계 랭킹 순위는 줄줄 외고 다녔다.

한때 부모님이 대만에 계실 때엔 당시 마음의 우상이었던 포르투갈의 ‘검은 표범’ 에 우세비오를 흠모하다 못해 자신의 편지에까지 ‘강 에우세비오 올림’이라고 개명해 편지를 올렸다가 부모님이 아들 편지도 몰라보는 사태까지 만들었다.

한달 급식비를 빼돌려 축구공을 사느라 때아닌 ‘결식아동’도 되어보았다. ‘월간 축구’라는 잡지를 보려고 그것이 비치된 은행에서 월례행사로 죽치고 앉아있는가 하면, 매일 방과후마다 동네 아이들과의 축구대결도 모자라, 밤이면 밤마다 방에 이불을 펴놓고 다이빙 연습을하며 혼자 뿌듯해 하기도 했다.

신통할만큼 학교성적은 언제나 최상위권이었다. 이를테면 같은 시간을 공부하고도 유난히 집중력이 높은, 소위 ‘상위 몇퍼센트의 선택받은 소수’에 가까웠다.

하지만 시험성적이야 어떻든 아버지에겐 환영을 받지 못했다. 맨날 축구공만 껴안고 사는 아들에 대해 부친은 ‘머리만 믿고 노는 놈이 더 나쁘다’며 더 무섭게 나무라셨다. 당시 흔치않던 TV를 어렵사리 장만했을때도 호시탐탐 축구중계만 노리는 장남을 보자 가차없이 벽장안에 던져넣어버리셨다.

오로지 축구선수가 되겠다던 꿈을 결국 포기한 건 가족의 반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상 한계를 보면서부터 였다. 아무리 연습해도 타고난 축구재목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땐 당시 유럽축구의 살아있는 전설, 요한 크루이프 선수의 백넘버 14번까지 베껴 달고 나섰지만 이미 학교대표팀 선수들중에서도 후보로 밀려나 있었다. 삼선중학교 축구반 시절엔 1년에 한차례 밖에 없는 공식대회마저 아예 출전 엔트리에 끼지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제2의 펠레가 되겠다던 꿈이 문전에서부터 꺽이면서 엄청난 사춘기의 열병을 앓았다.


축구 포기하고 수학으로 진로 선택

다행히 또다른 출구가 나타났다. 중학교 2학년때 수학공부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배운 공식들과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너무도 재미있었다. 공부라기보다 즐거운 게임이었다.

특히 좋은 수학선생님과 모 여중 수학선생님이었던 어머니 친구로부터 친절한 ‘코치’까지 받아 빠른 속도로 일취월장했다. 수학점수가 좋으면 무엇보다 신이 났다. 축구에서 받은 상처가 수학에서 치료됐다.

위당 정인보 선생의 외손답게 문학적인 재능도 드러내던 고등학교 시절엔 그야말로 좌충우돌로 지냈다. 이런저런 우연에 휘말려 난데없는 싸움꾼으로 불리기도 했다, 진로를 정할때쯤 긴 고민끝에 결국 축구를 포기하고 수학을 선택했다.

서울대 수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스포츠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따라붙었다. 본 학업에다 대학신문 기자, 면목동 야학 교사로 분주히 대학생활을 보내는 중에도 3학년때 당시 국내에 하나뿐이던 권투전문잡지사를 찾아가 번역 아르바이트겸 스포츠 전문기자의 꿈을 새롭게 키우기도 했다.

원래는 원문번역만 해도 될 것을 자신이 알아낸 주변 정보들까지 덧붙여 재미있게 써내자 꽤 호평을 받았다.

서울대 대학원 1년을 맞을때 쯤 국비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해 미국 유학길에 나섰다.

예일대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는 동안, 그러나 수학도의 길은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파고 들면 들수록 너무나 어려워 난생 처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해보았다. 이미 축구는 잠정 중단중이었다.

평소엔 하루 다섯시간 꼬박 앉아있기도 힘들 것 같던 공부를 박사학위 무렵엔 하루 열시간이상 미친 듯이 매달려 있었다.

지도교수는 ‘이따금 차라도 마셔가며 공부하라’고 충고까지 했다. 그렇게 무서운 집중과 노력으로도 쉬 넘지 못하는 것이 수학의 벽이었다. 어떤 것은 한달만에 풀리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세계적인 대학자들 조차 350년이나 걸려서야 겨우 풀어낸 수학문제도 있었다.

힘들때마다 ‘축구를 했을때 처럼만 열심히해보자. 그래도 도저히 안될 것 같으면 그때 포기하자’며 애써 용기를 냈다. 그 와중에 어느날 동료들과 함께 나누었던 대화는 충격처럼 다가왔다. 다들 어려운 공부 때문에 의기소침해진 상황에서 서로를 위로하던 중이었다.

누군가 ‘어쩌다 우리는 이 어려운 수학을 공부하게 됐을까’란 질문을 던져놓았다. ‘아름답고 깨끗하니까’ 등 그저 그렇고 그런 대답들이 흘러나오더니 다시 ‘그렇지만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는 한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말없이 듣기만하던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나는 수학이 어렵기 때문에 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어렵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나는 수학을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힘겨운 수학공부 도전정신으로 이겨내

그때까지의 고통이 순식간에 짜릿한 도전욕으로 바뀌었다. 쉽지않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이다. 공부가 주는 고통은 지금도 적지 않지만 그래서 그는 더 맹렬히 싸우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일대를 나올 때쯤엔 전교를 통틀어 총 6명에게만 수여하는 Teaching Prize를 받기도 했다.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전임강사를 거쳐 노틀담 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했다. 예의 활달한 기질로 강의때마다 학생들의 인기를 얻었다. 마침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그곳의 교수들까지 대거 미국 대학들로 몰려나와 치열한 자리경쟁이 벌어지던 상황이었다.

그 어려운 경쟁속에서 차지한 노틀담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갑자기 고국에서 일하겠다고 하자 교수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서울대에 가면 이곳보다 월급이 많은가? 아니면 수업시간이 이곳보다 적은가?’등의 질문을 퍼부었다. 전부 아니라고 하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뿐이었다.

유치할만큼의 ‘애국심’과‘충성심’ 하나로 짐을 싸들고 돌아왔지만 대학의 현실은 생각보다도 더 힘겨웠다. 이후 8년만에 평생 봉직을 결심했던 서울대를 떠날때까지 그간의 심경이나 과정은 지난번 이야기에서 밝힌 바와 같다.

서울대 수학과에서 마지막 수업이 있던 날, 하마터면 이 ‘조폭두목’ 강 교수도 울음을 터뜨릴뻔 했다. 강의가 끝난 뒤 고의적으로 시간을 끌던 학생들은 그를 위해 가슴 찡한 이별의 선물과 축하파티를 몰래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래도 헛 살지는 않았구나, 학생들에게 보기 흉한 선생은 아니었구나,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눈물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았습니다.”

소속이 바뀌는 마당에도 오히려 장기집권의 권력욕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강 감독으로부터 자연대 축구부원들은 그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얘기가 있다.

‘반칙을 쓰지 않고도 정정당당하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라! 아무리 상대가 강해도 우리가 혼 내 줄 수 있다는 걸 보여줘라! 비겁하게 기다리지만 말고 스스로 공격찬스를 만들어라!’

어쩌면 그가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인지도 모른다.‘기다린다’는 말과 ‘비겁하다’는 말은 그의 사전에 있어 동의어다. 이만하면 그의 이적도 쉬 이해될 것이다. 회식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총감독 김명환 교수는 넌지시 협박도 건넸다.

축구라면 강 교수 못지않게 극렬분자인 그는 1년간 미국에 건너가 있던중 강 교수로부터 노마크 찬스로 감독직을 기습탈취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더좋은 학자가 되겠다고 가면서 만약 거기에 간 뒤에도 제대로 연구 안 하고 딴 짓이라도 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어!” 송별회인지 출정식인지도 모를 술자리가 밤늦도록 끝나지 않았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1/06/27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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