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중국의 탈북자들, 과연 어떤 상태일까

조선족이 전하는 ‘북조선 사람’의 실태

중국 동북3성 지역에 사는 재중동포(조선족)들은 탈북자란 용어를 쓰지 않는다. 그냥 ‘북조선 사람’이라 부른다.

동북3성의 조선족은 탈북자를 가장 먼저 접하는 사람들이다. 조선족의 눈에 비친 탈북자는 다중적이다. 동족이지만, 한편으로는 배곯고 못사는 이방인이고, 또 한편으로는 피란민이자 도망자다.

동북3성은 중국 동부지역에 위치한 지린(吉林)성, 헤이룽장(黑龍江)성, 랴오닝(遼寧)성 3개 성을 뭉떵 그려 부르는 명칭이다.

일제시대 만주로 불렸던 조선족 밀집지역이다. 동북3성, 특히 지린성 옌볜(延邊)이 탈북자의 기착지로 알려진 것은 지린성이 두만강을 분계선으로 북한과 접경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북자 생활상 진실ㆍ허휘ㆍ과장 뒤섞여

북한의 장길수군 가족이 베이징(北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무소에 들어가 망명을 신청함에 따라 탈북자의 실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중국내 탈북자들의 생활상에 대한 전언은 진실과 허위, 사실과 과장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탈북자들을 돕는 일부단체들은 사회적 반향을 위해 곤경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고, 중국 정부는 탈북자의 존재 자체를 아예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한국으로 건너온 조선족들이 탈북자에 대해 보고 들은 이야기는 실상을 파악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최근 한국에 온 동북3성 출신 조선족들에 따르면 탈북자의 입지는 최근 2년간 크게 악화됐다. 탈북 행렬이 시작됐던 1990년대 중반만 해도 탈북자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중국이 최근 2년전부터 태도를 달리했다는 것이다.

중국 공안(公安ㆍ경찰)이 단속에 나서게 된 계기는 한국측이 제공했다는 게 조선족들의 이야기다.

국내 일부 언론이 탈북자의 참상을 과장해 보도하고, 종교ㆍ인권단체 등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중국 당국이 발끈했다는 이야기다. 중국이 북한난민의 온상인 것처럼 비치자 외교부는 “중국에는 난민이 없다”는 공식 성명을 냈다. 뒤이어 대대적인 탈북자 단속과 북한인계 조치가 따라 나왔다.

단속이 있기 전까지 탈북자들은 옌볜을 중심으로 한 동북3성 지역 조선족들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1990년 중반만 해도 두만강을 넘는 북한주민들에게는 아직 ‘탈북’이란 개념이 분명치 않았다.

오히려 ‘월경(越境)’ 개념이 더 강했다. 두만강을 건너 월경한 북한주민들은 중국의 조선족 집을 찾아와 밥을 얻어먹고 옷가지를 얻어 북한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말이 통하는데다 동족이란 유대감이 있어 도움을 받기가 좋았다.

탈북한 북한인 중 일부는 중국에서 불법취업을 하기도 했다. 몇 달간 일한 뒤 손에 쥔 중국 인민폐를 들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식이다.

북한 왕래경험이 있는 조선족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중국 인민폐가 별 문제없이 통용된다. 경제특구인 나진ㆍ선봉에서는 인민폐 사용이 공식화해 있고, 다른 지역의 경우에도 암시장에서는 거래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한국행 보다는 먹는문제 해결이 최우선

탈북자가 대거 동북3성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온 시기는 북한이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를 잇따라 겪은 1997~99년이었다. 지린성 옌볜과 무단장(牧丹江) 지역으로 넘어오는 탈북자들이 특히 많았다.

조선족들에 따르면 당시 탈북자들은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간다는 생각보다는 먹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절박감이 더 강했다. 탈북자는 지역별로는 함경도 등 상대적 빈곤지역 출신이 많았고, 성별로는 여자가 남자보다 많았다.

남자들은 농촌에서 노동의 대가로 하루 세 끼니를 해결하는 경우가 가장 흔했다. 여자들은 돈을 받고 조선족이나 한족 노총각과 결혼하거나, 유흥업소에 취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젊은 여자들이 돈벌이를 위해 대도시로 떠나면서 ‘젊은 여성 부족현상’을 겪고 있던 동북3성 지역에서 탈북여성들은 상당히 환영을 받았다. 북한에 남편과 자녀를 두고 온 여자도 동북3성에서 결혼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족과 결혼한 북한 여자는 감시대상이 됐다. 혹시 북한이나 다른 지역으로 도망갈 지 모르기 때문에 마을 주민 전체가 감시원 노릇을 했다.

동북3성 지역 시골마을은 적게는 100호, 많게는 1,000호가 집단생활하기 때문에 ‘누가 북조선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곧 소문이 나게 마련이다. 어떤 남자들은 외출할 때 아예 아내를 가둬두기도 했다. 그러나 탈북자 존재 사실을 공안당국에 신고하는 조선족은 거의 없었다.

본격적인 단속 전까지 동북3성 지역 탈북자들의 위치는 한국에 불법체류하는 조선족을 유추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조선족들의 설명이다.

북한에서 파견된 특무(비밀요원)들이 탈북자들을 압송해가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공개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90년대 말부터 중국 공안당국이 직접 개입하면서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공안당국이 탈북자 일제단속에 나서고, 지린성 옌지(延吉)시 외곽에는 임시수용소가 세워졌다. 중국 공안당국과 북한 특무간 협력관계도 밀접해졌다. 임시수용소로 잡혀 들어온 탈북자들은 트럭에 태워져 북한에 인계됐다. 조선족에 따르면 두만강 너머 북한쪽에 탈북자 수용을 위한 강제수용소가 만들어진것도 이때쯤이다.

단속에 따라 탈북자들의 활동공간은 매우 축소됐다. 탈북자를 고용하고 있던 유흥업소 등의 업주들은 당국의 처벌이 두려워 이들을 쓰려 하지않았다.

탈북자 인신매매를 하던 조선족 범죄단도 된서리를 맞았다. 탈북자를 도와주거나 숨겨주는 행위도 처벌 대상인 만큼 탈북자들은 안전지대가 없어졌다.


중국 공안단속 피해 내륙행ㆍ한국행 늘어

이에 따라 동북3성 지역에 머물던 기존의 탈북자들은 공안당국의 감시가 보다 약한 내륙지역으로 방향을 틀게 됐다. 새롭게 탈북한 사람들도 동북3성 지역을 내륙행을 위한 경유지, 또는 1차 은신처로만 생각하게 됐다.

러시아 연해주와 외몽골 등 제3국으로 향하는 탈북자들도 많아졌다. 조선족들은 탈북자들이 중국 당국의 동향에 상당히 밝은 것 같다고 전했다.

조선족들에 따르면 최근 한국행을 열망하는 탈북자들이 많아진 것은 중국 공안당국의 단속강화와 무관치 않다.

아울러 조선족 사회에서 전해들은 한국의 모습과 조선족들의 한국행 러시도 한 몫을 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조선족과 똑같이 한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추구하려 한다는 것이다.

취재 중 접한 조선족들은 북한 당국이 체포된 탈북자를 소처럼 고삐 꿰어 압송한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본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또 북한으로 압송된 탈북자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과거에는 끌려간 탈북자들이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들었는데, 요즘은 그 정도까지 심하게 하지는 않는 것으로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족들은 두만강 지역에서 북한 사람들의 시신을 목격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한 조선족은 2년 전 투먼(圖門)시 공원 전망대에 비치된 영업용 망원경으로 두만강 물위를 떠내려가는 시체를 보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곳 주민들의 말을 빌어 “이들 시신은 봄철 얼음이 녹는 시기에는 하루에도 3~4구가 된다”고 전했다. 조선족들은 이들 시신이 탈북 중 얼음이 깨져 익사했거나, 강너머 북한 강제수용소에서 버린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7/04 19:14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