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연극계의 흥행사' 코미디 연극배우 이도경

"회를 거듭할 수록 연기으 깊이가 달라져요"

싫증내지 않는 법을 묻고 싶었다. 연극배우 이도경(48). 그는 참 끈덕진사람이다. 1년전에 시작한 공연을 이미 1,300여회째 끊임없이 무대에 올리고 있다. 똑같은 작품, 똑같은 무대, 똑같은 사람으로 날마다 반복인생을 살면서도 질리는 내색이 없다.

이보다 앞선작품도 1,000회를 돌파시킨 전력이 있다. 공증받은 ‘저력의 대가’, 어떤 면에선 우리가 짐작하던 예술가 타입이 아니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먼저 나가 떨어질 ‘참을 수 없는 지겨움’을 어떻게 반전시키고 있는 것일까.


최장기 공연ㆍ최다관객동원 기록

“지겹다고 생각하면 절대 못했을 겁니다. 변화는 만들기 나름입니다. 오히려 오래 하면 할수록 연기도 점점 더 리얼해지고, 깊어집니다. 오늘도 공연을 하면서 내일은 이걸 이렇게 바꿔야지 하는 것들을 몇가지 봐뒀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단 한번도 똑같은 공연은 없다고 봐야지요. ” 그 설명이 부족하다 싶은지, 이야기를 덧붙인다.

“저도 옛날엔 1주일짜리, 길면 두석달짜리 공연을 하며 살았습니다. 제가 연기한 총 40편의 작품중 38편이 그런 것들이었 습니다.

대개 한달쯤 죽도록 연습해서 무대에 오르는데, 그렇게 고생해서 준비한 공연을 올리고 보면 이제야 좀 뭔가 배역이 내 몸에 맡는 것 같다 싶을때쯤 벌써 막을 내려야 합니다. 그게 너무나 아쉽고 억울해서 언젠가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끝까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무엇보다 보아주는 관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9년동안 그는 달랑 두작품밖에 공연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배우로서 누릴 것들을 모두 누려왔다.

3년 6개월간 공연한 ‘불 좀 꺼주세요’로 창작극 사상 최장기 공연에다 20만명의 최다 관객동원 기록을 수립, 그는 연극계의 흥행사다. 서울정도 6백년 기념타임캡슐에도 그의 작품이 들어가 있다. 낯뜨거운 장면 하나 없이도 작품만 좋으면 분명 승산이 있다는 것이 그 스스로 입증한 자랑중 하나다.

제 2차 ‘신기록’ 도전에 나선 이번 작품은 ‘이랑씨어터’에서 상연중인 코미디연극 ‘용띠위에 개띠’다. 그 안에서 극중 남편 나용두로 살고 있다. 나용두는 사실상 그의 분신이다.

작가 이만희씨에게 실제의 자기 부부이야기를 들려준뒤 이 작품이 튀어나왔다. 등장하는 배우는 단 두 사람. 52년생 용띠 남편 나용두와 58년생 개띠 아내 지견숙 사이에 벌어지는 좌충우돌의 사랑싸움을 그렸다.

이들은 못말리는 ‘내기 부부’다. 결혼계기부터가 취재차 찾아온 잡지기자 출신 지견숙과 만화가 나용두가 TV의 야구중계를 보다말고 한 선수의 출신학교를 두고 내기를 거는데서 시작된다.

결혼생활중에도 ‘63빌딩 한달 전기요금 맞추기’ ‘얼음위에 오래 서있기 시합’ 등 끈질긴 내기로 점철하는 이들은 심지어 생명이 걸린 지견숙의 중병 앞에서도 내기를 던진다. 공연중 수시로 객석에선 폭소가 터져나온다.


극예술에 반했던 시네마키드

무대밖에선 너무나도 차분한 사람. 도무지 희극배우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같은 인상의 그가 이 길로 접어든 건 중학교 시절 한 축제현장에 휩쓸리면서 부터다.

이씨의 고향은 경북 경주. 중학생일 때 대구, 경북의 지역문화문화 축제인‘신라문화제’에서 ‘에밀레종’이라는 공연을 보면서 극예술에 반했다.

그야말로 시네마 키드다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한 극장의 영사실 담당자를 담배 등의 ‘뇌물’로 매수해 시내에 들어오는 영화는 한 편도 빼놓지 않고 관람했다. 영화관은 물론, 학생이 빵집에만 가도 비행청소년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고교졸업후 연극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부모님께 말씀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릴적부터 빨랫줄에 걸린 아버지 옷만 봐도 가슴이 콩닥거릴만큼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오랜 망설임 끝에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을 때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좋다. 대신 그곳에 가서 최고가 돼라!” 너무나 감동해 눈물을 쏟았다.

1974년 서울예전 연극과에 입학해 연기공부를 시작했다. 평소엔 숫기없고 조용하기만한 청년이었지만 무대에만 오르면 이상하게도 자신도 모르는 용기가 튀어나왔다.

착실히 연극공부를 마친 뒤 군입대, 육군 취사병으로 근무하면서 6주간 요리전문가 마찬숙씨로부터 특별연수를 받기도 했다. ‘용띠위에 개띠’ 공연중 선보이는 심상찮은 칼질 흉내도 다 근본이 있는 것이다.

제대후 극단 ‘작업’, ‘마당 세실’, ‘신시’ 등에서 배우로 활동했다. 이상하게도 웃기는 역할만 단골로 그에게 맡겨졌다.

첫 작품 ‘데미안’ 때 맡은 코믹한 역할이 평생을 두고 전문으로 따라다녔다. 외형상으론 진득한 무게감만 느끼게 하는 자신에게 왜 그런 배역만 연이어 찾아왔는지 그 자신도 완벽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극과 극이 통해서일까?

자라면서 입에 익은 경상도 억양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배우로서 적쟎은핸디캡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완벽한 표준말을 구사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차라리 말대신 마음을 바꾸었다. 왜 꼭 표준말이라야 되는가? 코미디 배우는 관객들을 웃겨주기만 하면 임무끝. 가진대로 살기로 했다.

틀에 박힌 서양식 제스추어와 말투도 탐탁치 않아졌다. 이도경은 토종 배우, 우리식의 촌스러움을 자랑스레 무대에 끌어들였다. 그외에도 어떤 문제든 자기식으로 풀어내는데 탁월했다.

“저는 배고픈 연극배우란소리도 듣기 싫었습니다. 왜 연극배우는 다 배가 고파야 됩니까? 하고 싶은 연극도 하면서 금전적인 문제도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보니 공연외 남는 시간을 잘 활용하면 되겠더라구요.

물론 연극과 관련된 일이어야겠지요. 그래서 발견한 것이 분장일이었는데 실제로 10여년간 분장사로 일하면서 오히려 그 덕분에 더 자주 공연기회도 갖게 됐고, 경제적으로도 별 어려움없이 풍족하게 지냈습니다. 나중에 연기 하나만으로도 수입이 안정되면서 그일을 그만뒀습니다.“


한작품서 1인 24역까지 해낸 프로

‘우자 알버트’ ‘장터에 난리났네’ ‘등신과 머저리’ 등의 작품에 참여했던 그는 1992년 ‘불 좀 꺼주세요’로 첫 장기전에 돌입했다.

공연기간뿐 아니라 한번에 무려 1인8역을 감당해야하는 쉽지않은 역할이었다. 1회 공연내 등 퇴장횟수만 18번이 넘었다. 가장 빠르기론 단 8초만에 변신해야하는 장면도 있었다.

마술사 데이빗 카퍼필드가 따로 없었다. 시간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이미 무대위에서 슬슬 반지를 빼기 시작한 다음 장면이 끝나자마자 바로 무대뒤로 빠져나가 번개같이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 관객들을 감탄시켰다.

전문으로 그 일만 해주는 의상담당자와 이미 수십번 무섭게 연습한 결과다. 벗어둔 신발이 조금만 원위치에서 벗어나도 8초를 지키지 못하는, 프로들의 세계다.

“우자 알버트란 작품에선 1인 24역도 했습니다. 그땐 정말 정신이 없었죠. 배우들은 원래 공연때마다 은연중 극중 인물과 닮기도 하지만, 그땐 어찌나 많은 성격들을 연기하는지 나중엔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진짜 내 성격이 뭐였는지 제 자신조차 헷갈리곤 했습니다.

다리를 다친 것도 그때였습니다. 원래 나무바닥으로 돼 있던 무대가 도중에 시멘트바닥으로 바뀌었는데 그걸 깜빡한 채 평소처럼 높이 점프했다가 바닥에 떨어진 뒤 다리에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엔 그대로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억지로 고통을 참고 공연을 마쳤는데 나중에 병원에 갔더니 연골을 다쳤다고 하더군요.” 그때 다친 다리가 다시 악화돼 현재도 지팡이에 의지하는 신세다. 그러면서도 공연중엔 용수철처럼 소파에 몸을 내던지며 열연하던 이씨다. 아마도 엎드려 누운 사이 관객들 몰래 이를 악물고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비보를 접한 것도 공연중이었다. ‘불좀 꺼주세요’ 공연때엔 정작 자신의 고향집에 난 불은 끄지 못했다. 일본식 목조건물이었던 집을 화재로 잃어버렸다. 견디기 힘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의 사망소식도 무대위에서 들었다.

부모님의 경우 이미 지병을 앓고 계시던 터라 매일밤 공연만 끝나면 서울에서 경주까지 달려가며 병상을 돌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임종은 하지 못했다.

“이상한건, 밤새 빈소에서 통곡을 하다가 돌아와 다음날 무대에 서는데 오히려 그 전날보다 더 연기는 잘 되었습니다.

아마도 가슴속에 있던 것들을 눈물로 다 쏟아낸 뒤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게 연극이 없었더라면 현실에서 일어나는 그 충격들을 다 이겨내지도 못했을 겁니다.”

큰 딸마저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시켜놓고도 그날 저녁 무대에서 관객들을 웃겨야했던 모진 아버지. 그렇게까지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려했던 그는 엉뚱한 곳에서 공연 중단의 고비를 맞았다.

처음엔 지난 1월 상대역 박은주씨가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치면서 공연이 중단될뻔 했지만 응급실에서 머리를 꿰맨 뒤 기어코 불굴의 배우정신으로 나선 덕분에 공연은 무사히 진행됐다.

그로부터 한달뒤 결국 이씨 자신이 사고를 쳤다. 연속되는 강행군으로 최악의 그로키 상태에 이른 그가 무대에서 쓰러져버린 것이다. 황급히 응급실에 실려 들려온 그를 보고 ‘40대 돌연사란 것도 모르냐’며 의사가 혀를 찼다. 그러고도 그 다음날 그는 다시 무대에 섰다.


‘사’자 직업 가진 친구들도 부러워해

작년 5월, 그는 현재의 극장을 인수하면서 극단 대표겸 극장 사장으로도 나섰다. 당시는 30여개 소극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 불황기였다.

입구의 예쁘장한 안내소는 물론 무대세트며 건물 전체의 디자인부터 도색, 조명, 전기공사등 손수 공사를 하며 문을 연 뒤 해가 바뀌도록 하루 평균 약 30-40명, 주말이면 150석을 채우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배우로서든 경영자로서든 그의 세계는 작지만 확고하다.

문제는 아직도 계속되는 고강도의 스트레스다. 장기공연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는 사이, 그는 점점 비쩍 말라들고 있다. 한때 68kg였던 몸무게가 57kg까지 빠져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본능적인 공연의 부담감때문에 숨부터 막힌다고 했다. 하루 세시간쯤 오전중 운동을 하거나 사우나를 한 뒤 좋아하는 음식을 찾아먹는게 유일한 낙이다.

요즘은 침술치료까지 받자니 하루가 더 힘겹다. 그렇게 겨우 쥐어짜낸 힘으로 공연에 나선다. 사생활은 조금도 코믹하지 않은 코미디 전문배우 이씨다.

“그래도 지금이 행복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판ㆍ검사나 의사 등의 직업을 가진 친구들도 가끔 술에 취할 때마다 제게 ‘너는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게 너무 부럽다’는 넋두리를 합니다. 힘들긴 하지만 정말 이 일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의 장기전은 앞으로도 마감의 기약이 없다. 전국민의 관객화를 부르짖는 그는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계속 전진하는 것 뿐이다.

입력시간 2001/07/0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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