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사람들](8)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단 단장 유향숙 박사(下)

"암 사망자 줄이는게 목표"

유향숙 박사의 미국생활은 고달팠다.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데다 전공까지 전혀 생소한 유전공학으로 바꿨으니 학과 진도를 따라가기도 쉽지 않았다.

"흔히 유학생활에서 한다는 방법은 모두 거쳤습니다. 미국인 친구 노트 빌리기, 강의시간 녹음하기, 잠 줄이기 등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어차피 공부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었고, 3~4년 후에야 남들처럼 따라갈 수 있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다행하게도 존 카본 교수와 함께 시도한 유전자 발현기전에 대한 연구성과는 좋았다. 유 박사는 연구결과를 학술토론회에 보고했고, 그 내용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그리곤 2번째 은사격인 테리 쿠퍼 박사를 따라 피츠버그 대학 등으로 옮겨다니면서 유전자 발현연구를 계속했다.

어려운 만큼 뒤늦게 결실(?)을 찾은 미국생활이었다. 미국의 셀레라사에 의해 인간게놈지도가 밝혀진 뒤 유전자 발현연구는 가장 각광받는 분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와 네가 왜 다른지를 알아내려면 유전자 발현 연구를 해야 합니다. 같은 유전자가 왜 누구에게는 인체 변화를 지시하는 단백질을 만들어내도록 신호를 보내고, 누구에게는 안 보내는지를 알아야 사람 사이의 차이를 알 수 있으니까요. 또 정상인속에서 유전병을 가진 사람을 찾 아낼 수도 있습니다.".


암세포에서 5,000개 이상의 유전자 찾아내

유 박사는 서울을 떠난지 꼭 12년만인 1987년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유전공학센타의 이영익 박사 밑에서 에이즈 진단 시약인 키츠를 개발했다. 이때도 그녀의 유전자 발현 노하우는 대장균을 대상으로 한 에이즈 시약 실험에서 큰 힘을 보탰다.

“창피한 일도 많았어요. 에이즈 시약은 원래 P41 단백질로 만든 것인데, 대장균속에 발현을 시켜보니까, 발현은 커녕 대장균이 계속 죽어버렸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요. 이 박사님은 ‘유 박사 같은 전문가가…’라면서 의심쩍은 눈길로 쳐다보니, 고민도 많았지요. 유전자 발현은 사실 식은 죽먹기였는데, 왜 그것만 안 되는지….

결국 그 단백질과 대장균은 근본적으로 안 맞았던 거지요. 그래서 지금은 실험할 때 5번 정도 해봐서 안되면 실험방식이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 실험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연구원들에게 주지 시킵니다.“

유 박사가 독자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년이 흐른 뒤였다. 유전자 발현이 아니라 효모의 세포가 생겨나 죽을 때까지 그 과정에 간여하는 유전자를 찾아내는 일이었습다. 그렇게 시작한 특정 유전자 찾기는 이제 한국유전체기능연구사업단의 첫 번째 사업인 질병 유발 유전자 및 단백질 찾아내기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 사업단의 과제는 크게 5개 분야로 30개 프로젝트입니다. 한국인들에게 특히 많은 위암 간암 유전자와 관련 단백질을 찾아내는 일이 대표적인데, 위암을 일으키는 헬리코박터의 유전자 분석이 예상보다 빨리 이뤄져 다행입니다. 첫 발자국을 잘 뗐으니 다른 분야에서도 성과가 곧 나오겠지요.“

유 박사팀의 작업은 인간게놈지도 정보를 바탕으로 정상인과 암 환자의 세포에서 발현된 유전자의 차이를 찾아내 그 기능을 밝히는 일이다.

지난해 서울대 의대 박재갑 교수팀으로부터 12가지 유형의 위암세포를 넘겨받아 이를 배양해 암세포에서 발현되는 유전자를 추적했다. 지금까지 약 5,000개의 이상 유전자를 찾아냈다. 이중 30%는 아직 보고된 바 없는 새로운 유전자다. 새 유전자가 암발병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밝혀내면 암을 조기에 진단하는 DNA칩(유전자를 미리 집적해둔 칩)도 가능하다.

모든 게 술술 잘 풀려나가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개인적인 고민은 그녀에게도 있다. 바로 5살배기 아이다. 사업단을 맡다보니까 상대적으로 아이에게 등한하기 마련. 엄마가 필요한 아이에게 시간을 많이 낼 수 없는 자신이 미울 때도 많다.

어머니 노릇 제대로 못하는 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능력있는 어머니를 둔 아이가 오히려 불행하다‘는 역설이 통하는 곳이 유 박사댁이 아닐까?


생명 연구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로 고민도

인간적인 고뇌를 제외하더라도 연구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가 유 박사를 괴롭히기도 한다.

“미국은 유전자를 잘못 건드려 ‘괴물 인간’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1975년에 엄격한 유전자 공학기준을 만들었어요. P1, P2, P3, P4 등 네 등급이 있는데, 사람 유전자를 연구하려면 시설기준이나 윤리적 기준이 가장 엄격한 P4이상이 실험실이 돼야 합니다.

우리도 미국의 예를 따라서 우리만의 기준을 만들어야 합니다. 생명 연구를 한다면 사실 그만큼 많은 생명체를 죽이는 게 사실 아닙니까? 생명공학연구원만 해도 1년에 한번씩 실험대상이 된 동물의 위령제를 지내줍니다.“

유 박사의 사업단이 지향하는 목표는 분명하다. 위암 간암에 대한 유전자 연구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려 암을 조기진단하고, 암으로 인한 사망자를 줄이는 것이다. 병의 발생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하더라도 특정한 사람에게 발병하지 않도록 미리 유전적으로 조작하거나 발병 징후가 있을 때 곧 바로 치료에 들어가도록 하는 예방조치다.

“암을 완쾌시키는 치료약을 만들어낼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계속 변종이 나타날 테니까요. 기적의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도 나름대로 문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글리벡이 앞으로 10년, 20년 후에 어떤 부작용을 만들어낼 지 지금은 누구도 모르지요.“

그렇다고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유전자 연구를 통해 노화를 방지하고 짧은 생명이나마 건강하게 보낼 수 있도록 우리 삶의 형태를 바꿀 수 있다고 그녀는 믿는다. 그녀는 그 예로 당뇨병을 들었다.

“당뇨병 치료제인 인슐린의 유전자 구조를 알아내면 대장균이나 효모세포를 이용해 대량 생산이 가능하지요.

원래 인슐린은 소 췌장에서 조금씩 추출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돈이 엄청 들었는데, 지금은 효모에서 만들어내니까 손쉽고, 돈이 훨씬 적게 듭니다. 이렇게 유전자 구조를 알아내면 값싸게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밝고 낙천적인 그녀에게도 어기지 않는 철칙이 있다. ‘뭐든지 내가 좋아서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무엇을 하면 재미있게 살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고등학교 시절은 자신에게 재미있는 게 무엇인지, 뭐를 하면 인생을 해피(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지 진로를 놓고 고민해야 할 때지요.“ 수능시험을 위해 밤잠을 설치는 고등학생들에게 성공한 여성 유전공학자가 던진 말로는 너무 순진하다 싶다.

이진희 사회부 차장

입력시간 2001/07/1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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