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로셰비치 전범재판소 인도, 유고인방 내분 비화 조짐

아돌프 히틀러 이후 최악의 전범으로 서방측으로부터 지목받았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59) 전 유고연방 대통령이 결국 유엔 구 유고전범재판소(ICTY)에 수감돼 재판정에 섰다.

그를 단죄하려는 서방측과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운 유고연방 간 자존심을 건 대결은 돈을 앞세운 서방측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고, 한때 범 세르비아를 아우르는 발칸의 패권국가를 꿈꿨던 유고연방은 정치적 내분과 함께 정치ㆍ경제적 군소국가로의 전락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밀로셰비치의 ICTY 인도는 지난 4월 1일 유고연방내세르비아 공화국 경찰당국이 권력남용과 부패혐의를 걸어 그를 전격 체포할 때부터 예견됐다.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코소보 공습 당시 파괴된 인프라를 복구하기 위해 서방의 경제원조가 절실한 세르비아로서는 전범재판소 인도를 전제로 한 그의 체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체포작전 못지 않게 서방측을 또 한번 놀라게 한 것은 지난달 29일 새벽 기습적으로 단행된 밀로셰비치의 ICTY 인도였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체포와 전범재판소 인도라는 두차례의 격변을 치르면서 전 세계는 21세기 국제외교를 주도할 힘의 논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미국 "원조 원하면 밀로셰비치 넘겨라"

콜린 파월 미국 국무부장관은 밀로셰비치의 전범재판소인도 며칠전까지 조란 진지치 세르비아 총리와 수차례의 전화접촉을 통해 노골적인 압력을 행사했다.

12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원조를 결정할 ‘국제공여국회의’에 미국이 참석하지 않을 수 있다는 ‘협박성’ 최후통첩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날인 29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이 회의 이전까지 유고당국이 밀로셰비치에 대한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성의’ 를 보이라는 게 미국의 입장이었다.

국제사회가 충격에 빠진 것은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당국이 보인 초법적 조치였다. 밀로셰비치를 재판소에 넘기기 위해 법개정이 필요했던 유고연방은 6월말 ‘전범재판소에 협력한다’ 는 연방법을 채택하려했으나 집권 연정내에서조차 강력히 반발, 의회에 상정조차 하지 못하는 난감한 위치에 빠졌다.

묘수를 짜낸 것이 의회의 승인이 필요없는 각의를 통한법령 제정이었다. 밀로셰비치 인도에 따른 법적 근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밀로셰비치 측이 자국민의 해외법정 인도를 금지한 헌법조항을 들어 헌법재판소에 위헌신청을 제기하고, 헌법재판소가 법령 발효를 중지시키면서 일은 다시 꼬이기 시작했다.

다음날 비상각의를 소집한 진지치 총리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비난하며 밀로셰비치의 인도를 결행한 것은 결국 법적 논쟁에 휘말려서는 승산도 실익도 없다는 판단과 훗날 정치적 혼란보다는 당장 눈앞의 돈이더 급하다는 현실론을 반영한 결과였다.

3일 오전 10시(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의ICTY 1호 법정에서 열린 밀로셰비치에 대한 첫 예비심리는 다시 한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전직 대통령 신분으로 유엔 전범재판소에 회부된최고위 인사로 기록된 밀로세비치가 자발적으로 법정에 출두할 것인가부터 궁금증을 자아냈던 이날 재판은 예상대로 재판장을 맡은 영국출신의 리처드 메이(62)판사와 베오그라드대 법대 출신의 밀로셰비치 간 팽팽한 신경전으로 일관했다.

13분간 진행된 이날 심리에서 밀로셰비치는 변호사의 조력을 거부한 채혈혈단신 법정에 입정, ICTY를 맹비난했다.

“거짓 재판소이고, 거짓 기소이며 불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법정” “정작 유고를 공습한 것은 나토”“ICTY는 유엔총회에 의해 임명되지 않은 불법단체이기 때문에 변호사를 선임할 필요가 없다” 등 전범재판소에 대한 반감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4가지 기소혐의에 대한 유무죄를 묻는 메이 판사에게 “그것은 당신들 문제” 라며 ICTY에 대한 정치적 발언을 시도하다 메이 판사로부터 “지금은 연설할 때가 아니다” 라며 여러 차례 제지를 받기도 했다.

결국 재판부가 밀로셰비치를 대신, 그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것으로 결론짓고, 변호사선임을 재고할 수 있도록 30일간의 시간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날 심리를 끝마쳤다.


혐의입증에 어려움, 재판 장기화 가능성

그러나 이날 밀로셰비치가 재판에 임하는 자세로 보아 다음달 27일까지 정회가 선언된 재판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우선 밀로셰비치가 끝까지 변호사 선임을 거부할 경우 재판과정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해 재판이 장기화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법조계의 전망이다.

칼라 델 폰테 수석검사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할 경우 재판이 10년이상 계속될 수 있다” 고 밝혀 당초 최소 2년으로 예상했던 법적 공방이 크게 길어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더욱이 밀로셰비치는 1999년 코소보에서 행했던 잔학행위라는 자신의 기소내용보다 ICTY의 정치성, 정당성 자체를 거론할 태세여서 경우에 따라서는 또 한차례 당사국간 정치적 파문을 몰고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밀로셰비치의 혐의를 입증해 내야 하는 ICTY측도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다. 밀로셰비치의 서명이 들어간 반(反) 인도적 명령의 공문서를 확보하지 못했고, 이를 폭로할 밀로셰비치의 보좌관들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폰테 수석검사는 1992~1995년 보스니아 내전당시 행해진 대량학살에 대해서도 혐의를 묻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구체적 증거가 없는 이상 나치 전범의 처리 기준이었던 ‘상급자로서의 법적 책임’ 이 준거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만약 기소 내용 중 한가지라도 재판부가 받아들인다면 밀로셰비치는 법정 최고형인 종신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럴 경우 ICTY와 전범 수감협약을 맺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 8개국중 한 곳에서 수감생활을 해야 한다.


체포·이송에 반발, 연방 해체 위기

밀로셰비치의 전범재판소 수감에 따른 유고연방 내 후유증도 엄청나다.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 연방 대통령이 이끄는 세르비아 민주야당(DOS)의 연정파트너인 몬테네그로 사회민주당(SNP) 등 소속각료 7명이 밀로셰비치의 전범재판소 이송에 반발, 사퇴해 조란 지지치 유고연방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붕괴됐다.

이에 따라 앞으로 3개월 내 새내각을 구성하거나 총선을 치러야 하지만, 문제는 이번 일로 가뜩이나 취약한 세르비아 공화국과 몬테네그로 공화국 간 연방체제가 해체되지 않을 까하는 점이다.

이미 유고 화폐단위인 ‘디나르’ 를 독일 마르크화로 대체하고, 관세, 조세 등도 독자 운영하고 있는 몬테네그로는 밀로 듀카노비치대통령이 국방ㆍ외교만을 단일채널로 하는 느슨한 연방제를 주장하고 있어 이번 파열음으로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층 커질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필립 부야노비치 몬테네그로 총리가 초미의 관심사인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강행할 뜻을 시사해 유고 내정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미한상태다.

옛 유고연방으로 1990년대 초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거친 끝에 독립한 보스니아_헤르체고비나 역시 밀로셰비치의 전범인도가 선례로 작용, 자국 내 숨어 있는 전범 기소자들을 처리하는 문제로 고민에 빠져 있다.

‘발칸의 도살자’ 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전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대통령 라도반 카라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 전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사령관 등 ICTY가 기소한 핵심 전범들이 보스니아에 은둔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보스니아당국이 어떤 조치를 취할 지 주목의 대상이다.

황유석 국제부기자

입력시간 2001/07/12 16:28


황유석 국제부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