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일산] 환락의 숲에 둘러싸인 '일산'

'쾌적한 전원도시' '죽여주는 밤문화' 두 얼굴

치겠습니다, 오빠!

키는대로 하겠습니다. 오빠!

티내지 마시고 지금 빨랑 오세요, 오빠!

(오빠, 니 오늘쥑었다)

일산, 화정 등 경기 북서부 신도시가 중년들의 신흥 유흥지로 부상하고 있다. 일산은 분당과 함께 정부가 계획적으로 조성한 대표적인 신도시.

여유 있는 녹지 공간과 국내 최대의 인공호수 공원, 바둑판 모양의 넓직한 내부 도로, 풍부한 쇼핑 시설 등 각종 기반 시설이 잘 갖춰져 국내에서는 손꼽히는 주거 타운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2~3년전부터 일산은 낮과 밤이 너무도 다른 ‘두 얼굴의 도시’로 변하고 있다.

낮에 보는 일산은 말 그대로 ‘꽃과 호수의 전원 도시’ 그 자체다. 곳곳에 위치한 쌈지 공원에선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뛰놀고, 대로변 자전거 전용도로에서 젊은이들이 조깅을 하고,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점에선 아기 손을 잡은 주부들이 한가로이 쇼핑을 즐긴다.

언뜻 봐선 외국의 한적한 도시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어둠이 내리면 일산은 모습을 바꾼다. 아파트가 운집해 있는 주택가는 어둠 속에 가려 보이지 않고, 대신 움츠리고 있던 유흥업소들이 서서히 위용이 드러낸다.


밤이면 환락의 도시로 돌변

일산 신도시의 밤은 성인 클럽의 오색 창연한 네온사인과 야한 광고 선전물에서 먼저 드러난다. 어둠이 깔리면 낮에는 보이지 않던 유흥업소 광고탑을 실은 트럭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며 분위기를 돋운다.

‘섹시하고 화끈한 미시 52명 상시 대기’, ‘부킹 120% 보장, 걸면 넘어간다’, ‘이보다 더 화끈할 순 없다’, ‘10시까지 여자 무료, 기본 1만5,000원’, ‘쇼킹한 미팅, 황홀한 만남’… 한마디로 보기 민망한 광고 선전물들이 대로변을 밝힌다.

유흥업소의 이 이동식 광고들은 구청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낮에는 숨겨 두었다가 밤이 되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광고물들은 대개 대형 풍선이나 1톤 트럭에 임시로 만든 광고탑 같이 철거가 쉽도록 만들어져 있다.

일산에 사는 주부 정하빈(33ㆍ주엽동)씨는 “주말에 가족들이 외식을 나갈때마다 아이들이 곳곳에 있는 유흥업소의 광고판을 보면 어쩔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며 “주거 전용 도시인 일산에 왜 저런 유흥업소가 판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주엽동 파출소의 한 경찰관은 “1~2년전부터 이 주변에 미시클럽 같은 중년 나이트클럽과 단란주점이 성행하면서 불법 광고물이 늘었지만 구청 소관이란 주차 위반 스티커를 발부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며 “더구나 유흥업소 내부에서 발생하는 사고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자체처리하기 때문에 우리로선 별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일산 대로변의 건물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유흥업소가 얼마나 깊이 침투해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주엽동 대로변에 위치한 S프라자는 낮에 보면 음식점과 편의점 옷가게 미장원 등이 있는 평범한 건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밤이 되면 상황이 바뀐다. 이 건물 주변은 각종 유흥업소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을 이룬다. 밤이 되면 이 건물 지하 1층에는 대형 S비즈니스클럽과 안마시술소가 영업을 개시한다.

또 3층에서는 중년 전용 나이트클럽과 게르마늄 대중탕이, 5층에는 TV화상 대화방이 문을 연다.

이 건물과 붙어 있는 바로 옆 건물에도 H성인 관광 나이트 클럽을 비롯해 과부촌, 안마방, 화상채팅방, 사교댄스 교실, 대중탕, 모텔 등이 운영되고있다.

이 건물들은 4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어, 이곳이 주거 전용 신도시인가를 의심케 만든다.


편리한 교통, 한적한 입지

현재 일산 중심가인 주엽동 그랜드백화점을 중심으로 반경 100m 안에는 성인나이트클럽과 미시클럽 같은 단란주점만 15개 안팎이 밀집해 있다.

여기에 기생하는 러브호텔, 안마방, 화상채팅방, 일반 술집들까지 치면 그 숫자는 크게 늘어난다. 더구나 이런 유흥가가 원당역, 화정역, 백석역, 마두역, 대화역 등 인근 거의 모든 전철역에도 비슷하게 형성돼 있어 더욱 문제다.

그렇다 보니 일산과 화정이 새로운 밤의 유흥 도시로 떠오를 수 밖에 없다.

일산 유흥업소의 또 다른 특징은 중년층을 주 타깃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이 부근의 유흥 주점은 예외 없이 ‘미시 클럽’이나 ‘중년 관광 나이트’, ‘비즈니스 클럽’중에 한가지 영업 양태를 취하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주거 위주 도시에 웬 중년 유흥업소’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 보면 이해가 간다.

일산 신도시가 중년들의 밤의 아지트가된 데는 입지 조건이 한 몫을 하고 있다. 일산 신도시 주변에는 가깝게 중산지구, 탄현, 구일산을 비롯해 파주 문산 교하 봉일천 벽제 광탄 일영 장흥 법원리 송추 등 상당한 중소 배후 도시들이 자리하고 있다.

△ 유흥업소 전단을 돌리고 있는 러시아 여성.

이들 중소 도시에는 이렇다 할 유흥시설이 없어 이들 거주자들이 일산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일산 유흥업소들은 서울에 비해서는 비교적 술값이 저렴한 편이어서도 자영업자나 자영농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여기에 서울 은평구와 서대문구에서도 자유로나 국도로 30~40분이면 도착할 수 있어 원정 오는 사람도 많다.


대낮에는 러시아 인터걸 활보

일산의 유흥업소들은 시설이나 아가씨수준에서 서울의 웬만한 나이트클럽에 떨어지지 않는 반면 가격은 오히려 저렴해 샐러리맨들에겐 유혹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곳 유흥업소들은 러시아 무희들을 대거 동원하거나 한때 TV에서 인기를 끌었던 왕년의 스타들을 게스트로 초빙해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전략을 쓰고 있어 중년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화정역 부근에서는 대낮에 아슬아슬한 옷을 입은 러시아 아가씨들이 나이트클럽 홍보물을 들고 다니며 대로나 공원을 활보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지난해 문제가 됐던 일산 러브 호텔문제도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유흥업소가 낳은 부작용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실제 일산 러브 호텔을 찾는 남녀 커플의 대다수는 일산 구민이 아닌 외부 사람들이다.

이 곳 유흥업소에서 짝짓기에 성공한 커플들이 러브 호텔을 찾는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는 서울이나 인근 중소도시에서 시설이 좋은 일산 러브호텔을 찾아 오기도 한다.


마구잡이 인ㆍ허가로 환락가 전락 자초

1980년대말 ‘예술 활동이 활발하고 통일의 꿈을 실현하는 쾌적한 전원 도시’를 표방하며 건설된 일산이 밤의 환락가로 변한 데는 고양시의 방만한 행정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고양시는 지난해 러브호텔 파동에서도 보듯 유흥업소의 인ㆍ허가 과정과 사후 관리에서 낙제점을 면치 못하고 있다.

고양시 관계자는 “현재 운영되고 있는 유흥업소는 1990년 토지공사가 정한 것에 따라 적법하게 만들어 진 것”이라며 “더구나 1999년 건축법이 개정되면서 자치단체장의 재량권도 없어져 토지주가 유흥업소를 짓겠다고 하면 막을 근거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일산 신도시주민들과 시민 단체들은 “고양시가 당초 계획과 달리 일산이 자족기능을 갖추지 못한 주거 전용으로 전락하자 세수 확보를 위해 유흥업소를 마구 허가 했다”며 “설사 사전에 허가가 났더라도 강력하고 지속적인 단속과 사후 관리만 철저히 했더라도 지금처럼 난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일산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인근 백마역 주변에 있는 통기타 카페들로 인해 낭만과 열정이 서려 있는 젊은이들의 해방구로 인식돼 왔다.

일산이 진정한 ‘꽃과 호수의 전원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안일무사에 빠진 고양시와 상업주의에 얽매인 토지공사의 각성,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시민들의 자체 감시 기능이 더욱 강화돼야 할 것이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07/12 17:03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