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우익으로 가는 일본] 대처식 신보수주의 길 닦는다

고이즈미 총리, 국내선 '개혁'외교·안보선 '강경·보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등장 이후 일본이 많이 달라졌다. 역사 교과서 문제로 한중 양국과의 관계가 급랭하는데도 일본 정부는 별 반응이 없다. 한중 양국과의 원만한 관계가 총리의 정치 생명에 중요한 변수가 됐던 과거와는 딴판이다.

한때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편찬한 역사교과서를 비난하는 등 적극적 대응을 기대하게 했던 다나카마키코(田中眞紀子) 외무장관은 완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는 한 술 더 떠서 8월15일의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하고 난 후 한중 양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 고이즈미 총리가 참의원선거를 앞두고 대형 브로마이드를 걸어놓은 유세차에 올라 연립 여당 후보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고이즈미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한국의 국민 감정을 더욱 자극하는 것은 물론 교과서 문제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제해 온 중국마저 격렬한 반발로 몰아갈 뿐이다. 어차피 맞을 매이니 한꺼번에 맞자는 뜻일까.


교과서 문제 의도적 외면 분석

문부과학성이 우리 정부의 재수정 요구를 사실상 거부, 우리 국민과 정부의 반일 감정이 폭발한 직후 도쿄(東京)외교가에는 몇차례의 기회를 한일 양국이 모두 놓쳤다는 지적이 나돌았다.

우선 문부과학성의 검정 과정에서 '만드는 모임' 교과서의 문제점을 제거, 검정 신청본 내용에서 비롯한 한중양국의 우려를 씻을 수 있었다. 교과서 시장 교두보 확보를 최우선 목표로 삼은 '만드는 모임'의 전략상 검정 불합격은 불가능했지만 특색을 완전히 지울 정도의 대대적인 수정은 가능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지난해말 모리 요시로(森喜朗) 당시 총리의 지도력이 땅에 떨어진 상태에서 가토 고이치(加藤宏一)자민당 전간사장의 반란까지 터져 자민당은 온통 차기 정권 구상으로 달렸다. 더욱이 막바지 검정 단계인 1월 기밀비 사건이 터지면서 외무성의 외교적고려가 검정과정에 적극 반영될 여지가 사라졌다.

4월3일 검정결과 발표후에도 기회는 있었다. 137곳의 대대적 수정을 겪은 문제의 교과서는 검정 신청본이 빚은 선입관만 아니었다면 양국 관계를 긴장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정말 중요한 대목만을 짚어 재수정 요구를 10여항으로 압축하고, 물밑에서 조용히 재수정 방향을 협상할 수 있었다.

전혀 다른 결과였지만 그래도 또 기회는 있었다. 문부과학성이 최소한 '만드는 모임'이 자율 수정한 한일합병관련 기술이나 고대사 관련 기술 등에 덧붙여 일부 항목의 균형 감각 결여를 지적하기만 했어도 상황은 많이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재수정 요구'와 '검정제도의 취지'라는 양측의 형식적인 주장 이외에 외교적 물밑 접촉은 없었고 문부과학성은 관료나 학자 차원의 고식적인 검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경기침체 불구 인기 상종가 행진

다나카 장관 취임 이후 외무성이 관료와 장관의 싸움터로 변해 서로 물고 뜯느라 기능마비 상태에 빠진 것이직접적 요인이다. 그러나 보다 크게는 고이즈미 총리를 비롯한 정치권이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결과이다. 더욱이일본 정치권의 지도력 미발휘가 지도력 부재 때문이 아니라 관심의 부재, 또는 의도적인 외면의 결과라는 점에서 앞으로의 문제 해결 전망을 흐리고있다.

도쿄(東京)증시의 닛케이(日經) 평균주가는 1만2,000엔대의 바닥에서 헤매고 있지만 취임 이래 고이즈미총리의 인기는 상종가 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그가 무엇을 하건, 어떤 말을 하건 박수를 받을 정도의 이유없는 열광이 번지고 있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고이즈미 총리의 외면은 정치적 판단의 결과이다. 80%를 넘은 사상 최고의 내각 지지율에 대해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지만 대체적인 분석은 끝나 있다. 기존 정치 관행을 철저히 부정하는 '바꿔' 스타일이이 최대 요인이다. TV 정치시대에 걸맞는 외모와 때묻지 않은 이미지가 안방으로 그대로 파고 들었다. 그가 외치는 경제개혁에 수반할 고통이나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과거와 다른 정책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당당하게 주장하는 데 국민의 관심이 집중돼 있다.

장기 경제 침체로 자신감을 잃고 정신적 공황에 빠진 일본 국민들의 심리 상태, 되도록 모나지 않게 대세를 추종하려는 전통적 행동 양식 등의 토양은 있었지만 국민의 정서에 직접 호소하는 정치스타일은 독특한 감각의 산물이다.

그런 그의 최대 약점이 외교이다. 외교 문외한이기도 하지만 '일언거사'(一言居士)라는 별명처럼 한번 뱉은 말은 끝까지 고집하는 성격 자체가 외교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로 최근 미국 방문이나 영국, 프랑스 방문을 통해 그는 모처럼 꼿꼿한 일본 총리의 모습을 국제무대에 선보였지만 현안 해결의 성과를 거두는 데는 실패했다.

고이즈미 총리 주변에서는 그가 스스로의 약점을 잘 알고 있으며 한중 양국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는 약점을 덮어두려는 시간벌기 차원이라고 전한다.

근대화 당시 풍미, 일본 보수파의 사상적 원천이 됐던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자세를 계승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아시아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날로 커지고 있는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고이즈미의 시간벌기 전략

야스쿠니신사 참배도 같은 맥락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총리 취임에 앞서 일본 유족회에 참배를 약속하고 언론에 공언한 만큼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야 한다는 고집이라는 설명이다.

일본 정계 보수파의 태두로 지금은 고이즈미총리의 막후 후견인 역할을 맡고 있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총리와의 약속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교분리 원칙과 A급전범 문제와 관련한 야당의 잇따른 공세에 대해서도 그는 나카소네 전총리나 우익단체처럼 논리적 정당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저 전몰자 참배를 이유로 들어 '나는 이런 생각이니 오해하지 말라'는 식이니 논쟁이 좀처럼 성립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29일의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교과서나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극히 미미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한중 양국과의 관계 냉각이라는 결과를 두고는 상당한 관심을 표하면서도 직접적 계기인 문제의 교과서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서는 별관심이 없다.

압도적인 국민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서는 소수파여서 정치 기반이 취약한 그로서는 이번 참의원 선거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러니 약한 분야가 선거 쟁점화하는 것을 피할 수 밖에 없다.

그의 개혁 노선이 일본의 우경화를 토양으로 삼아 그것을 더욱 자극하는 악순환을 부를 것이란 판단은 아직 이르다. 국내 정치와 경제 문제에서는 개혁주의자, 외교·안보문제에서는 강경 보수주의자의 야누스적 모습은 '대처리즘'의 틀안에서 하나로 합쳐지고 있다.

한때 유럽을 풍미한 신보수주의 물결의 뒤늦은 도입이다. 나카소네 전총리의 영향력 등으로 보아 그것이 급속한 우경화로 물길을 틀 가능성도 있다. 대중의 열광이라는 핵심 요건도 충족돼 있어 그런 우려를 더하게 한다.

그러나 대중의 열광은 국내 개혁에 몰려 있을 뿐 외부의 적을 찾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재 일본의 변화를 우경화로 몰아 치면서 사생결단이라도 하려는 듯한 태도는 국민 정서로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전략적 판단과는 거리가 멀다.

도쿄=황영식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1/07/19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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