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장례연구전문가 국립민속박물관 정종수 과장

'전통 장례제도는 숨겨진 문화보물'

"정과장님, 제발 관(棺)은 이제 그만! " 국립민속박물관 정종수(46) 민속연구과장은 별명이 '저승사자'다.

그동안 끌고들어 온 관만 여섯 개. 수장고가 꽉 차 더 이상 들여놓을 곳도 없다며 박물관측에선 미리 보호막을 쳐둔다. 그렇게라도하지 않으면 상여든 뭐든 끝없이 끌고 들어올 열성파다. 성철 스님 다비식 때도 만장 약 1,000장을 낑낑거리며 들고 왔던 그다.

정씨는 전통 장례 전문가다. 초상집이나 이장(移葬)현장을 찾아다닌지 약 20년째. 산 자보다 죽은자의 무덤이 친근하다. 결혼식은 안 가도 초상집은 꼭 간다. 그게 철칙이다. 정 잠잠할 때는 스스로 뒤져서라도 찾아낸다.

장의사나 지관, 시골이장님 등 전국에 '정보원'들이 깔려있다. '좋은 소식 없느냐?' '조금만 기다려봐라, 곧 좋은 일이 있다. 아무개 어른이 곧 돌 아가실 것 같다.'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대화다.

"고상한 곳도 많은데 왜 굳이 그런 냄새나고 칙칙한 곳을 찾아다니냐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도많습니다. 어떤 분은 '별 희한한 공무원도 다 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남들이 눈 여겨보지 않기에 더 할 일이 많습니다. 하나씩 우리 장례제도의 숨은 비밀을 발견할 때마다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짜릿합니다."


망자의 마지막길 보려 방방곡곡 찾아다녀

부음엔 예고도 없다. 초청도 없다. 82년 국립민속박물관에 들어온 이후 지금껏 전국 방방곡곡의 상가를 돌았다. 지난 윤 4월엔 특히 바빴다. 4년마다 한번씩 이뤄지는 이장이 집중적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사망직후부터 매장순간까지 망자의 마지막 길을 함께 배웅한다.

사진을 찍으면서 수시로 기록을 하는, 잠시도 쉴 틈 없는 출장이다. 그간 현장을 지키며 관찰한 내용으로 전문연구서도 두권이나 펴냈다. '저승사자'라는 별명은 그 누구보다 스스로 사랑해마지 않는 이름이다.

그가 찾는 보물은 책에는 있지만 우리 눈엔 확인되지 않았거나 아예 책에서 조차 언급된 바 없는 우리만의 룰에 관한 것이다. 작게는 이런 것들이 있다.

어느 상가에서 부모님의 상을 치르는 세명의 형제 중 둘은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는데 한 사람은 지팡이 아닌 끈만 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왜일까? 알고보니 친자가 아닌 양자로 들어간 아들이라 지팡이를 쥐어주지 않도록 돼 있었다. 15일장을 치르는 경우, 그 긴 시간동안 대체 시신을 어디에 어떻게 보존하는가가 오랫동안 그의 수수께끼였다. 그 답도 현장에서 풀어냈다.

바깥 헛간에 두고 이엉을 덮어서 모시는 것을 보자 발견의 기쁨에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장례때 솔잎을 입에 물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예로부터 '살을 맞는다'하여 지관들이 매장을 할때 특정 출생 년의 사람에겐 참관치 못하게 하곤 했다. 나름대로 그 액을 맞는 부적역할을 하는 것이 솔잎이었다.

남들이 섬찟하게만 여기는 상가에서 그는 그 사소한 소득에도 소름이 돋도록 기쁨을 느낀다. 그러기를 20년째다. 담력과 비위를 타고 난 것은 아니다. 우연찮게 이 일에 뛰어들기 전까지 그는 상가는 물론 상여앞도 무서워 지나가지 못하는 평범한 겁쟁이였다.

중앙대 사학과를 졸업, 박사학위도 취득한 그는 2년간 양동고등학교 국사선생님으로 지낸 적이 있다. 나름대로 보람이 있었지만 새로운 도전 욕구가 발동했다.

박물관에서 연구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마자 야간열차를 타고 담당자를 찾아간 길에 '내일 당장 출근하라'는 즉답을 듣고 왔다. 갈등할 겨를도 없이 전직했다.

"처음엔 연구분야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주위에서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미약하다며 한번 시도해보라는 얘기를 듣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래도 이런 일과 연이 닿으려고 그랬는지 어떤지 그간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일은 많았습니다.

교사생활중에도 멀쩡히 나와 함께 전날저녁 식사까지 같이 한 하숙집 옆방 선생님이 다음날 아침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한달동안 화장실도 못갔습니다. 동네에서 목을 매달고 죽은 시체도 자주 보았고, 사고로 죽은 학생 등 그땐 무섭다는 생각밖에 없었지요."


관습은 또하나의 과학

첫 답사지가 전라도 부안, 정작 가려던 곳은 태풍 때문에 포기한 채 마침 인근에 상을 당한 집을 발견하고 들어간 것이 망자와의 첫 대면이었다.

초창기 그를 가장 강력히 사로잡은 것은 청산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초분 형태의 특이한 매장제도였다. 사망후 망자를 바로 입관해 땅에 묻는 일반 형태와는 달리 1차로 시신을 땅에 묻고 그위에 이엉을 덮어 가매장한 뒤, 몇해가 지나면 그 유골을 수습해 본무덤에 모시는 '복장제'다.

신기한 것은 대개의 일반 무덤 유골들은 몇 년이 지나 꺼내보면 까맣게 썩어있는 반면, 이 초분형태에서 꺼낸 유골들은 뼈는 물론 살까지 거의 미이라 상태처럼 깨끗이 수분만 바짝 마른 채 잘 건조돼 망자의 모습을 가장 깨끗이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복장제는 예로부터 환태평양 지역에 고루 퍼져있던 고대 습속이지만, 다른 나라에선 이미 그 풍속이 사라진 반면 국내에선 원시형태 그대로 꾸준히 내려오고 있다는 것.

첨단과학의 권력이 아무리 막강해도, 인간의 관습을 모두 밀어내진 못했다. 관습 역시 또하나의 과학을 품고 있었다.

"처음엔 주민들이 초분 위치조차 가르쳐 주려하지 않아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할 수 없이 꾀를 낸 것이 동네 아이들에게 500원 1,000원씩 주면서 갖고 간 초분 사진자료들를 보여준 뒤 '이런 곳을 본 적이 있냐'고 하자 아이들이 너도나도 다퉈가며 초분이 있는 곳을 알려주더군요."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망자지만 예를 다했다. 가자마자 빈소에 절을 올리며 자신의 지갑을 털어 부의금도 냈다.

장례식이라서 생기는 장점도 몇가지. 밥과 잠자리는 물론 경상도에선 거마비까지 쥐어주는 곳도 있었다. 연구의 목적을 떠나서 일 자체가 좋았다. 밤새 빈소를 지키며 상주와 술잔을 나누다보면 금새 허물없이 가까워졌다.

아침이면 아침대로 일찍 일어나 아주머니들 틈에 섞여 군불을 때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궁금증을 풀었다. 때론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갈때마다 미리 상주에게 연락해 사전허락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막상 망자의 유골까지 사진을 찍는 그를 보자 흥분해 돌연 카메라를 빼앗는 친척이나 가족도 있었다.


“사람은 죽고나서 진면목을 드러내”

"죽고나면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빈소에서부터 참 많은 일들이 벌어 집니다.부모님 관을 앞에 두고 형제끼리 재산문제로 싸우는 것도 보았고, 생전엔 이름만 대면 다들 알만한 유명인사였지만 막상 떠날때는 자식들이 어찌나 무성의한지, 거의 귀찮은 동물을 내다버리듯 아무렇게나 장례를 치르는 걸 보고 착잡하기도 했습니다.

생시엔 잠잠했던 여러가지 갈등이 장례때 한꺼번에 터져나와 시끄러워지기도 하고, 제가 보기엔 죽음에도 우아한 죽음과 천한 죽음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재산과 명예가 뭔 소용이 있습니까. 인생이 별 것 아니구나, 죽음을 대하다 보면 삶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1993년 성철스님의 다비식은 특히 충격적이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추도인파와 거대한 의식 속에서 죽음의 축제를 보았다. 불가의 법도대로 태워 없애려던 만장도 스님을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손에 넣었다.

본인조차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그렇쟎아도 틈만나면 음산한 소품을 끝도 없이 끌고 들어가 박물관측을 아연실색케 하던 정씨. 고생은 했지만, 많은 소득이 그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일찌감치 자신의 유언도 준비했다. 죽더라도 부조금은 받지 말 것, 생전에 모은 책은 박물관이나 모교의 사학과에 기증할 것.

한때는 집에서까지 갓 찍은 시신의 사진을 늘어놓고 있다가 아내를 질겁하게 만든 적이 있다. 평소 걸핏하면 상갓집으로 달려가는 남편을 보며 '대체 거기서 무엇을 하느냐'고 궁금해하던 아내의 호기심을 특히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어준 사건이 있다.

어느 토요일, 파주의 한 초상집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길에 아내를 데려갔다. 현장에선 곧 염이 이뤄질 참이었다. '염하는 것을 구경시켜주겠다'며 손을 잡아 끌자 질색을 했다. 결국 정씨 혼자 들어가 1시간반동안 사진을 찍고 돌아온 그날 이후, 가족들은 더 이상 그의 알리바이를 묻지도, 토를 달지도 않는다.

"하지만 전통적인 매장제도만을 최선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토가 좁은 현실에서 이젠 화장밖에 대안이 없습니다. 전통은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죽은 자가 산 자의 땅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현대식으로 하더라도 얼마든지 예를 갖춰 치를 수 있고, 중요한 건 공경의 마음과 태도이지 무덤의 크기가 아닙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제 친형도 화장을 했고, 저 역시 화장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묘지를 다니고 지관들과 만나다보니 풍수와 택일에도 얼추 전문가가 다 됐다. 심지어 직접시신을 수습해 염을 해본 경험도 있다. 느낌은 좋았지만 생각보다 간단치 않은 일이라 도중에 포기하고 말았다.

내년엔 염보다 더 엽기적인 '씻골'에 도전한다. 진송장과는 달리 매장후 몇 년이나 지난 시신을 수습하는 일이라 친자식조차도 꺼린다는 작업이다. 자신이 자청해 예약해놓고도, 속으론 벌써부터 진땀이 난다는 정씨. 오늘도 그의 안테나는 번뜩인다.

'좋은 일이 터져야 할텐데...'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의 '좋은 일'이란 아름다운 부음을 뜻한다.
“세시풍속 망라한 대풍속사전 만들고 파”

“앞으로도 우리나라 장례제도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해 나갈 계획입니다. 은퇴 전까지 최소한 책 다섯권은 쓰고 나가는게 목표입니다.

현재 일본인 학자 6명, 우리학자 4명이 참여해 '유골과 위패'에 대한 4개년 한일 공동프로젝트도 진행중입니다.

그리고 예산문제 때문에 쉽지 않긴 하지만, 장례뿐 아니라 우리나라 세시풍속을 총망라하는 대풍속사전도 꼭 만들고 싶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땐 뭔가좀 알 것 같았는데 알면 알수록 모르는게 너무도 많다는 걸 깨닫습니다.

특히 장례는 우리가 실제로 겪는 일이면서도 피상적으로 지나치느라 모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들입니다. 농담삼아 친구들에게 그런 얘기도 합니다. '죽어봐! 그럼알어.' 이 분야를 연구하는 동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2hk.co.kr

입력시간 2001/07/19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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