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룡의 선택 '당내 항쟁'

이회창 총재 향해 연일 직격탄, 정치생명 건 '저항'

문민정부를 이끌었던 구 민주계 인사들이 20일 고김동영 전 장관 10주기 추모행사 준비를 위해 모처럼 여의도에 있는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의 개인사무실에 모였다.

김덕룡 홍사덕 강인섭 김무성 신영국 의원과 서석재김봉조 전의원, 김덕룡 의원과 가까운 후배들인 이성헌 김영춘 의원도 참석했다. 오랜 만에 만난 옛시절의 동지들을 보며 DR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연히 이날 인터뷰를 위해 김 의원의 사무실을 찾은 기자에게 그는 “격세지감”이라는 표현을 썼다. 문민정부 시절 민주계의 한 축으로 세상을 호령했던 DR.

그러나 “요즘 정치 객꾼으로 밀려나 있다”고 스스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묘사할 만큼 세상이 변했으니 격세지감을 느낄 만도 하다. ‘당내에선 탈당을 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고 짚으니 그는 대뜸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야당의 뿌리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흥분했다.


“내가 이당의 주인” 주류향해 일갈

“내가 이 당을 만들었고 내가 이 당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당에 대통령을 하기 위해 온 사람도 아니고 국회의원을 하러 온 사람도 아니다. 요즘 엉뚱한데 있다가 국회의원이나 하러 온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이회창 총재와 이 총재 라인에 있는 주류그룹들을 겨냥한 발언이다.

그는 당내에서 ‘왕따’를 당하는 정도 만큼 아니 그 이상 저항감도 커진 듯했다. 김 의원은 “이 총재 주변에 누가실세인지 모르나, 소수 몇사람이 이 총재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과거에 어디서 무얼 했던 사람들인가. 이총재가 사람을 어떤 식으로 평가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 측근은 김동영 전장관을 회고하며 푸념하듯 말했다.“불곰(김 전장관의 별명)이 살아 있었다면 DR이 이렇게 무시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곰이 ‘무슨 짓들을 하는 것이냐’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DR과 김 전장관은 형제처럼 가까웠던 사이가 아니었느냐”라고.

그만큼 당내에서 DR은 외로운 처지이다.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고립됐고, 정치적 여건도 운신의 폭을 넓힐 만큼 호의적이지 않다.

당내에선 서울 시장 선거 후보로 그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그러나 그는 “관심도 없고 뜻도 없다”고 단호히 잘랐다. 남은 것은 대선이지만 이에 대해 그는 “1년반이나 남아있으니 그때 가서 결정할 것”이라며 대답을 피했다. 사실 그는 대답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회창 지배 구조’가 완전히 뿌리를 내린 상황에서 그의 입지는 좁을 수밖에 없고 한나라당의 울타리를 벗어난다고 해도 선택할 곳이 마땅치 않다. 그가 정계개편 주장을 하지만 ‘DJ의 당적이탈’을 전제로 한 발언이다.

그만큼 그에겐 정치적 자존심이 있고, 지역구도가 확연한 정치현실에서 DJ밑에 들어가는 것은 자칫 그의 정치생명을 재촉하는‘위험한 선택’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는 이에 대해 “그쪽(여권)에 동지와 친구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늘 김대중 대통령과는 반대편에서 정치를 해왔다. 이미 노선을 달리 해왔다”고 말을 끊었다.


이총재와 각 이루며 입지 넓히기 안간힘

DR은 여야와 재야 까지 망라한 개혁인사 모임인 ‘화해와 전진포럼’의 산파역을 했다. 그가 택한 돌파구였다. 그러나 이 역시도 ‘정치적 가능성’의 차원일 뿐 개혁신당의 모태가 되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요즘 DR은 “몹시 답답한 심정”이라고 했다. 또 이총재에 대한 비판의 날도 더욱 날카로와졌다. 그는 다소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현상태로 한나라당이 정권 교체를 하더라도 별로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주류그룹이 들으면 경기를 일으킬 말이고, ‘해당행위’로 까지 몰고 갈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의 설명은 결국 칼날이 이회창 총재를 향하고 있었다.“반평생 이상 민주화 운동을 했다. 그 때는 군부통치를 종식시키고 시민정부를 세우는 것이 최대의 목표이자 가치였다. 현정권이 수평적 정권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다음 대선에서 야당이 집권하는 것은 잘못된 국가 운영방식을 바로 잡는 정도의 의미는 있겠지만 정치의 질적 발전과 국가 비전 제시의 차원에서는 한나라당이 이를 담보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그런 비전을 다 못보여주고 있고 나 자신도 그렇게 주장할 확신이 없다”고 했다. 그는 나아가 “한나라당이 집권당이 되면 우리로서는 좋은 일이 될지 몰라도 큰 틀의 국가 발전에는 의미가 있을지…”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총재가 그런 비전이 없다는 것이냐”고 묻자 그는 “현 정부의 실정으로 민심이 완전히 이반 됐는데도 이 총재의 지지도가 정체상태인 것은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니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DR은 “소속 의원들까지 우리가 이겨야 겠지만 꼭 이길 수 있는가 회의하고, 이겨도 정치 발전에 보탬이 될 것이냐는 데 확신을 심어주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 라고 주장했다.


대선정국 활용, 정치적 돌파구 모색할 듯

이 총재와 DR은 ‘돌아올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 같다. 김 의원은 펄쩍 뛰지만 당내에선 “DR은 오히려 이 총재가 자신을 쫒아내 주길 바라는 것 같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명분이 없어서 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일각에선 “이 총재를 둘러싼 주류그룹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의 DR을 철저히 무시하는 전략으로 서서히 고사시킬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당의 한 관계자는 “DR은 프로이다. 아마 DJ와 YS를 제외하면 가장 프로 기질이 강한 정치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생존능력이 탁월하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의 행보는 아직 유보적이다. 그러나 ‘대선 시계’는 지금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고, DR이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하든 그는 대선 정국을 최대한 활용할 것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여권의 끊임없는 정계개편 시도와 맞물려 그는 앞으로도 주목의 대상이 될 것이고, 그의 이총재를 향한 외로운 항쟁은 계속 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DR과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의원이 10여명만 됐어도 벌써 당을 떠났을 것”이라는 정치권의 평가 처럼 DR이 탈당 등 중대 결심을 담보할 실천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부호가 찍혀 있다.

이태희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1/07/25 11:27


이태희 정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