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본, 나는 남자"

트랜스젠더 이문기씨의 파란과 역정의 삶

작가 이문기(44)씨는 별난 이력의 소유자다. 스포츠형의 짧은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컬컬한 목소리, 털털한 양복 차림. 다소 말라 보이지만 그는 영락없는 이 시대 40대 초반의 샐러리맨의 형상이다. 하지만 그의 주민등록증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거려 진다.

호적상 본명은 이동숙(李東淑). 그는 여자로 태어났다. 건설업을 하던 부친의 5남2녀 중 6번째, 막내 딸로 이 세상에 나왔다. 그래서 부모와 오빠, 언니들로부터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부모와 언니 오빠들은 그를 ‘공주’라 불렀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형과 누나’가 있었을 뿐 ‘오빠와 언니’가 있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비록 몸은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한번도 스스로를 여자라고 여긴 적이 없었다. 6살 때 여자 고무신을 신기면 두세시간을 울며 남자 구두를 달라고 떼를 썼을 만큼 그는 남성적 기질이 강했다.

이처럼 타고난 성(性)과 본능적 성(性)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괴리는 그를 파란과 역정 속으로 몰아 넣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겪어야했던 성적 모순

이씨의 인생 여정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여자 아이들의 우상이었다. 건장한 체격을 지녔던 그는 겉으로만 여자 느낌이 조금 났을 뿐 남자 아이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로 인기를 독차지 했다. 같은 반 여자 아이들로부터‘좋아한다’는 내용이 편지도 많이 받았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자신의 성적모순으로 인한 문제점에 직접 부딪쳐야 했다. 단 한번도 입지 않았던 치마를 입어야 했고, 여학생 사이에서 ‘길들여 지지 않은 야생마’ 처럼 생활해야 했다.

중학교 시절 내내 그는 치마 속에 남자 팬티를 입고 다녀 친구들로부터 ‘더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번은 포크댄스 시간에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여선생님으로부터 3일간 혼이 났지만 결국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버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중 3때는 J라는 한 동급 여학생을 사모해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깜찍한 외모에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던 그녀. 이씨는 이런 J에게서 첫사랑의 야릇한 감정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중2 수업시간 중 우연히 J를 보는 순간 가슴이 쿵쿵 거리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머리 속은 온통 그녀로 가득 찼습니다. 3학년 때는 10분간의 휴식시간 마다 J를 보러 구관에서 신관 3층을 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15년 동안 제 마음 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첫사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3 어느날 그는 주변 사람 몰래 깜짝 사고(?)를 친다. 당시 불과 16세였던 그가 학교를 3일간 무단 결석하고 모방송국 탤런트 시험에 응시, 아역 탤런트로 합격한 것이다.

탤런트의 꿈은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좌절 됐지만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원하던 예술고 진학을 못하게 된 이씨는 ‘더 이상 학교 다니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집을 나왔다.

당시 동네에선 ‘배짱 있는 남자’로 명성이 나 있었던 그였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동네 한량들이 ‘싹수가 있어 보이는’ 이씨를 밤의 문화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 때부터 이씨는 ‘형’들과 함께 외제차를 타고 소위 잘 나간다는 서울의 특급 호텔 나이트클럽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하는 일이라곤 잘 빠진 여자들 꼬시는 일이었다.

“나이트클럽에 가 보니 이 세상의 미녀들은 온통 그 곳에 다 모인 것 같았습니다. 거기서 술에 취해 보고 여자와 블루스도 처음 춰 봤습니다. 외제차에 쉽게 넘어가는 여자들을 보며 ‘여자로 살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 했습니다. 아마도 저를 여자로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조폭에 가세, 결국 교도소까지

그러던 중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만한 일이 벌어진다. 밤 무대에서 이씨의 명성을 들은 한 폭력조직이 그에게 ‘은행을 털자’는 엄청난 제의를 해온 것이다. 한창젊은 열기가 끓어오르던 그는 유흥비도 마련할 겸해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대신 가능성이 없는 은행털이 대신 나이트클럽에서 취객의 돈을 터는 일을 하자고 수정 제의했다. 이 제의가 받아들여져 이씨는 일본 범죄 잡지에서 수법을 익히며 실제 범죄 행각에 들어갔다.

이씨는 그간의 나이트클럽 경험을 바탕으로 돈 많고 매너가 나쁜 취객을 골라 이들의 호주머니를 털었다. 그렇게 번 돈 중의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범죄 행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범죄 사실이 발각돼 전국에 지명 수배가 된 것이다. 이씨는 자수를 했지만 결국 주범으로 몰려 범죄단체조직 및 특수강도 혐의로 여자 교도소에서 2년6개월간의 실형을 살았다.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도 그의 인생은 평탄치 못했다. 출소 3일이 되던 날 삼청교육대에서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여기서 잡혀 가면 끝’이라는 생각이 든 2년여간의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추격을 따돌리려고 거지 행세를 하며 거리를 헤매기도 했고, 주린 배를 채우고 피신처를 삼기 위해 일부러 가벼운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 그는 전과 3범이라는 계급장을 받게 됐다.

정권이 바뀌면서 도망자 신세는 끝이 났다. 그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천주교에 귀의했다. 1985년에는 자기처럼 갈 곳이 없는 출소자들의 재활을 도와 주는 ‘아브라함의 집’이라는 사회봉사 단체를 설립했다.

1989년에는 한국 출소인 상담연구소를 만들어 한 때의 잘못으로 영원히 사회에서 냉대 받는 출소자들에게 새 삶을 찾아주는데 전력했다. 출소자의 의식주 해결은 물론이고 직업 알선에서 진로와 결혼 상담에 이르기까지 출소자의 모든 재활 활동을 지원했다.

이 같은 그의 선행이 알려져 1989년10월 서울시민상 장려상을 수상, 각계로부터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회봉사자로 주목 받았다.


사회봉사로 거듭난 인생

1997년 IMF로 ‘아브라함의 집’이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되자 이씨는 재정 마련을 위해 집필을 시작했다.

그 해 처음 자신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 ‘성이라 불리는 여자’를 출간했고, 지난 해에는 수필 ‘감옥 여행’을 펴냈다.

올해에는 처음으로 시(詩)를 썼는데 그것이 동아일보 신춘문예 본선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씨는 이 시들을 모아 최근 ‘가물치의 꿈’이라는 자전적 시집을 출간했다.

“저는 한번도 제가 여자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단 남자나 여자, 단 하나의 완전한 성으로 태어나지 못한 게 아쉬웠을 따름이죠. 저는 오히려 보통 남자보다 더 격정적이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라며 “요즘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에 스스로 매몰돼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성(性)으로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라. 그러면 세상도 우리를 이해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씨는 1990년 지인을 통해 성전환수술을 받고 현재 독신남으로 살아가고 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07/25 18:42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