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한국과학사물연구소장 윤진명

"역사에 묻힌 과학의 화려한 외출이죠"

한국과학사물연구소 윤진명(59) 소장은 골치아픈 사업을 한다. 직원들과 함께 뼈빠지게 만들어내는 '물건'이란 것이 1개당 짧으면 1년, 길면 10년을 잡아먹는 애물단지. 그렇다고 후한 값을 받는 것도 없다.

완성된 그날부터 오히려 복제품 등쌀에 이중고를 겪는다. 서너달전엔 가진 집까지 팔았다. 사업 20년에 아직도 돈을 까먹으며 일하고 있다.

그간 가족들에겐생활비 한번 남들처럼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래도 큰 소리를 치는 건 미래를 믿기 때문이다. '그래도 집 있고, 밥 세끼는 꼬박 굶기지 않고 있으니 나도 나 하고 싶은대로 살게 내버려둬 줘!' 진작에 가족과 합의를 본 사항이다.

과학사물연구소는 우리 과학사에 등장하는 전통 과학기자재를 원형대로 복원하는 전문제작업체다. 첨성대나 간의, 혼상, 규표,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석각 천상열차분야지도 등 지금껏 약 40종을 만들어냈다.

그중 일반인들에겐 이름도 생소할 일성정시의, 규표, 현주일구 등은 국내 최초로 직접 복원해 낸 작품, 특히 고도와 방위, 낮과 밤의 시간을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조선시대 대표적 천문관측기기인 간의는 500년만에 처음 햇빛을 보게 한 최고의 역작이었다.

대전의 국립중앙과학관을 비롯해 세종대왕유적관리소, 신라역사과학관, 한국천문연구원, 연세대박물관 등 전국 곳곳에 그들의 과학문화재가 서 있다. 이런 일을 하기로는 국내에서 유일하다. 너무 드물어서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조차 없다.

"요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로 시끄럽지만, 사실 우리도 우리 과학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같은 과학분야에서도 전통 과학분야는 너무 등한시되어왔습니다.

우리 손으로 20년이나 부지런히 복원해왔지만 아직 3분의 1도 채 못다 만든게 세종때의 과학기구들입니다. 그 하나하나가 지금도 얼마나 정확하고 정밀하게 들어맞는지, 수백년전에 이미 그같은 과학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다는게 알면 알수록 놀라울 뿐입니다.

이런 1등 수준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들 서양과학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중ㆍ고등학교 과정에서 전통과학이란 교과목을 별도로 마련해 꼭 가르쳤으면 하는게 제 가장 큰 소원입니다."
모형 만들다 전통과학에 매료

윤소장이 이 일에 뛰어든 것은 1981년. 평소 역사책을 즐겨 읽었을뿐, 애초에 역사나 전통과학과는 특별한 인연이랄 것도 없었다. 1970년대 중앙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한 인쇄업체와 자동차 유리공장의 경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76년 '명진사'라는 이름으로 개인사업을 시작, 주로 관공서 기계를 제작하거나 시설을 공사, 보수하는 일과 함께 과학모형을 제작, 납품하는 일이었다.

1981년엔 '신일모형'을 설립, 인테리어 관련 일을 버리고 오로지 과학모형제작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초창기만해도 퀸엘리자베스호니 라이트형제의 비행기니 하는 서양과학모형 일색이었지만 돈을벌기는 그때가 훨씬 수월했다.

그때 비축한 돈이 없었더라면 오늘까지 버틸 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서서히 과학문화재 복원도 병행, 점점 깊이 빠져들게 됐다.

" '신일모형'을 운영하면서 많은 교수님들과 접하다보니 우리 전통과학에서도 누군가 전문적으로 유물을 복원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해서 하나둘 맡다보니 남다른 보람과 재미가 있었습니다.

결국 1990년부터는 현재의 연구소로 이름을 바꾼 뒤 완전히 전통과학분야문화재 복원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주위에선 '바보짓'이라고도 했지만 나름대로 사명감도 있었고, 한편으론 사업면에서도 분명 승산이 있다고 봤었습니다. 물론 그중 사업성에 대한 판단은 제가 틀렸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됐지만요."

수익 대신 고생만 덤터기로 안았다. 뭣보다 복원과정이 간단치 않았다. 훼손된 상태라도 유물의 일부나마 남아있으면 그나마 다행. 대개 문헌에 몇줄 적힌 것이 전부였다.

세종때에 발명된 세계 유일의 주ㆍ야 시간측정기 일성정시의의 경우엔 본체를 지지하는 용모양 기둥의 길이나 크기, 측정기에서 눈금으로 날짜를 맞추는 법까지 상세히 나와 있어 비교적 친절했던 케이스.

그외 상당수는 한두줄의 글만 남아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복원자의 몫이었다. 석각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할 때엔 현존하는 원본이 일제때 돌다리로 쓰여지면서 사람들이 함부로 밟고 지나다닌 통에 표면에 쓰인 내용조차 훼손돼 무용지물이었다.

그 위에서 아이들이 놀이터처럼 밟고 뛰어놀며 방치했던 것을 외국인의 문헌에 쓰인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단서를 발견해 재추적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고천문학연구기관도 수시로 드나들고, 조선왕조실록과 세종실록, 재가역장집, 증보 문헌비고 등 관련 문헌을 뒤지는 한편 관련학과 교수들에게도 빠짐없이 자문을 구했다. 복원한 작품중 가장 애를 먹은 '간의'의 경우엔 연구에만 5년이 소요, 제작까지 마쳤을땐 10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제작과정도 겹겹이 난관이었다. 자체적으로 갖춘 인력은 천문ㆍ기상학 분야석ㆍ박사급 연구원 3명을 비롯해 주물, 석재공장 시설의 기능공 등 약 15명. 적은 인원으로 작업하다보니 시일이 더 오래 걸렸다.

더구나 거의 전 과정이 수작업, 글짜나 눈금을 새기는 일조차 그 좋은 레이저 한번 이용할 수 없다. 재래식 제작방법외에는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물의 경우, 금속의 특성상 전 단계에서 아무리 완벽한 형태로 맞춘 것이라도 다음 공정을 거치는 동안 곧잘 변형이 생기기 쉬워 과정이 진행될때마다 일일이 각도를 재고 조정하는 등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품 많이 들고 경제적 어려움도 커

혼상의 경우 3,000개의 별자리를 일일이 손으로 다 찍어넣었고, 구 하나를 만드는데도 갖가지 재질을 바꾸어가며 수차례 실험, 한번은 종이로 외피를 감은 뒤 구가 깨지는 소동까지 겪으며 내내 돌발상황에 마음을 졸였다.

그렇게 어렵사리 만들어낸 완성품 또한 학자들의 자문에서 퇴짜를 맞는 일도 여러번, 거의 모든 작품이 그런 난산 끝에 태어났다.

"철저하게 만들기 위해선 어쩔수 없는 일이지요. 故 윤경로 선생님(전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께 처음 앙부일구를 들고 갔을 땐 '상감이 신통찮다'고 지적을 받기도 했고, 나일성(전 연세대 천문학과 명예교수) 선생님께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여드렸을 땐 '글씨체가 잘못된 것 같다'는 말씀을 듣고 고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번거롭고 힘들더라도 더 이상 문제점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문을 받은 뒤에야 손을 떼었습니다.

대개 천문학이나 과학사 분야에 계신 교수님들은 성품이 강직하고 고집이 세 말씀하실 때도 듣기좋게끔 우회적으로 말씀하시는 법도 없지만, 그런 만남 자체도 제겐 무척 의미있고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품이 많이 드는 만큼 재정적인 어려움도 컸다. 특히 과학문화재 복원은 아직도 성격이 모호한 분야. '순수 창작'이 아니라는 이유로 재료비와 기본 인건비 정도만 반영되고 있어 수익상으론 현상유지도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천신만고 끝에 복원한 뒤에도 역시 '창작물이 아닌' 관계로 저작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관공서측에서도 이들이 제시한 복원유물을 타업체에 여과없이 공개, 스스로 복제품을 양산하는 결과마저 낳고 있다.

"이것도 엄밀한 의미에선 창작에 속하거나 또는 창작보다 더 어려운 작업인데, 일반 공산품과 똑같은 취급으로 돈을 받으니 수지가 전혀 맞지 않을 수 없습니다.

88올림픽땐 호돌이 그림 하나를 그려주고도 몇십억인가 받았다고 들었는데, 생각할수록 답답합니다. 하긴 이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출장비니 조사비 등 사전조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보면서 만만치 않겠구나 생각했었고, 2, 3년쯤 지났을 때부턴 아예 손익계산을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속상한 건 그렇게 우리가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일궈놓은 복원물을 얼마나 쉽게 베껴가는지 어떨땐 우리가 만들다가 생산공정중 우연히 티가 생긴 것까지 다른 업체에서 그대로 '복원'한 걸 보고 웃은 일도 있습니다. 엄연히 작품 도둑질인데 현재로선 그걸 막아줄 법조차 없으니 그대로 당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이 일을 놓지못하는 이유. 역사속에 묻혀있던 것들을 세상밖으로 끄집어내는 쾌감 때문이다. 마침내 복원이 끝나고 작품이 공개될 무렵, 전시행사때 테입 커팅이 있을 때면 '이곳 어딘가에 우리 손으로 만든 복원유물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는 가슴이 짜릿하다.

일성정시의의 경우, 뒤바뀐 역사까지 바로 잡아주었다. 원래 중국엔 있지도 않던 그것이 한동안 중국것으로 잘못 알려져있던 오류가 윤소장의 문화재복원을 통해 공개적으로 검증됐다.


관광삼품화에 심혈, 캐릭터 작업도

풀리지 않는 재정난은 다른 방법으로 풀기로 했다.

작년부터 부설업체 '보물코리아(www.bomulkorea.co.kr)'를 개설, 그간 복원해온 과학문화재를 관광상품으로 접목시키는 작업에 나섰다.

독자적인 한국의 관광상품도 개발하고 연구소의 재정문제도 해결해보려는 시도다. 이미 제작을 마치고 판매에 들어간 상품도 상당수, 세종대왕 어보(왕실의 도장)와 12지신상의 12가지 동물, 해태상 등이 있다.

현재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과 여주 영릉 세종대왕유적관리소 등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지난해 7월 서울문화상품전에서도 수상했던 윤소장 팀의 빛나는 신작이다. 감추어둔 소재는 더욱 무궁무진하다.

관련 학계의 대학교수들에게 자문을 의뢰, 조만간 산해경에 나오는 반인반수의 동물 등 150가지 형상을 캐릭터로 만드는 작업외에도 줄줄이 후속타가 마련돼 있다. 한국 과학사를 넘나드는 윤명진 사단의 또다른 보물찾기다.

"앞으로 적당한 때가 오면 자리를 넘겨주려고 합니다. 누구보다 이 일을 잘 알고, 여기에 흠뻑 젖어있는 사람에게 맡길겁니다.

단, 제 자식이 아니라 직원들중 누군가가 될 겁니다. 비록 지금은 큰 수익이 없지만, 시간이 흐른 뒤 언젠가는 분명 빛을 볼 때도 오리라 확신합니다.

아직 은퇴시기를 생각해본적은 없지만, 은퇴하더라도 여전히 이곳에 나와 뒷바라지를 하며 지켜볼 생각입니다. 여기를 떠나지는 않을겁니다. 가능하다면 나중에 우리가 복원한 것들을 중ㆍ고등학교에 기증하는 일도 하고 싶습니다. 돈이야 아무리 많아도 누구나 하루 세끼 먹는 것, 옷 한벌 입고 사는것 다 똑같은데 지금 힘든거야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입력시간 2001/07/25 19:32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