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영화세상] “나만한 제작자 있으면 나와 봐”

별난 일이다. 제작자 얼굴이 커다랗게 나와 있다. 촬영 기념사진에도 중간에 떡버티고 앉아 있다. 배우들은 뒤에 서있다.

일반적으로 영화 팸플릿에는 제작자 얼굴을 찾아볼 수 없다. 주연배우가 최고이고, 그 다음에는 감독, 스태프 순이다. 화려한 사진들이 즐비하지만 제작자는 맨 뒷 장에 이름석자 올리는 것이 고작이다.

“영화는 배우와 감독의 작품인데, 우리 같은 사람은 뒤에서 가만히 돈이나 대고 있으면 되지”라는 태도이다.

그런데 태흥영화사 이태원(63) 사장은 그게 아니다. 촬영에 들어간 임권택 감독의 새 영화 ‘취화선’ 자료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놀라고 웃었다.

첫 장을 넘기자 마자 자신의 얼굴을 맨 먼저 큼지막하게 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 자기보다 나이 많은 임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도 있는데 자기 자랑이나 하고”라며 놀렸다.

그러자 다혈질의 괄괄한 이태원 사장은 열을 냈다. “무슨 소리야, 자기 돈으로 이런 영화 만드는 제작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배우만 “오냐, 오냐”해 어른도 몰라보고, 버르장머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영화계가 불만이다.

또한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런 영화’와 ‘내 돈’ 속에 그것이 들어있다. 이런 영화란 바로 ‘취화선’ 같은 영화를 말한다.

할리우드를 베끼건, 아이디어를 모방하든 흥행만 찾는 한국영화계. 돈이 많이 있을수록 더 돈만 좇는 세태속에서 한국 전통 사상과 예술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든다.

이태원 사장이 있었기에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도, ‘춘향뎐’도 나올 수 있었다. 판소리를 영상으로 옮기는 거장의 실험정신이 발휘될 수 있었고, 한국영화의 꿈인 ‘칸영화제 진출’도 가능했다.

‘취화선(醉畵仙)’ 은 ‘그림과 영상의 결합’이다. 구한말 화가인 장승업의 일대기를 다루는 이 영화는 시대와 삶과 그림의 결합이다. 시대극이자 인물극이고 한국 예술정신의 재현이다.

이런 영화가 돈이 될까. 될수도 있다. ‘서편제’가 증명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이런 영화는 흥행성이 적다. ‘춘향뎐’이 평가와 달리 흥행에서 참패했을 때 난감해 하던 이태원사장과 임 감독.

그런데 왜 이태원 사장은 ‘내 돈’ 50억원을 들여 또 다시 ‘취화선’을 만들까. 그의 말은 거칠고 간단하지만 정확하다. “나 아니면 누가 이런 영화 만들겠어.”

그도 늘 이런 영화만 만들지는 않았다. 무슨 돈이 있어서. 한때는 돈이 거덜나, 돈좀 벌어야 겠다고 임 감독과 함께 ‘노는 계집, 창’도 만들고, 젊은 관객들 꼬드겨 보자고 젝스키스를 데리고 ‘세븐틴’도 했다.

돈도 벌었지만, 잃은 것도 많았다. “이제 태흥영화사도 끝났다”는 소리도 들렸다. 그때 이 사장은 말했다. “내가 좋은 영화한다고 누가 돈 대주는 놈 있었느냐”고.

그래서 ‘내 돈’이라는 사실을 유난히 강조한다. 물론 그도 자선사업가는 아니다. 영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 그에게 그것은 돈만은 아니다. 의미 있고 좋은 영화, 꼭 필요한 영화,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면서 영화 자체의 예술성을 평가 받고 싶다.

지난해 ‘춘향뎐’이수상에 실패했을 때 임권택, 정일성 감독과 “다시 한번 와서 수상무대에 올라보자”고 약속했던 골목대장 이태원. 그는 꼭 시상식에 올라 ‘세계영화계를 향해 “나는 이래서 거지가 될 각오를 하고 영화를 만들었다”고 큰 소리치고 싶다.

그것이 허세든, 고집이든, 확실한 가치관이든, 노회한 전략이든 그가 한국영화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지키려는 제작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자기 얼굴을 커다랗게 내미는 그의 객기가 밉지 않다.

입력시간 2001/07/2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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